프랑스에서 엘로이(Eloi)로 불리는 성 엘리기우스(또는 엘리지오)는 프랑스계 로마인(Gallo-Roman)의 아들로 588년 프랑스 중남부 리모주(Limoges) 북쪽에 있는 샤프틀라(Chaptlat)에서 태어났다. 그는 신심 깊은 부모 밑에서 자랐는데, 금속 세공인이었던 아버지 에우케리우스(Eucherius)는 일찍 자신을 닮은 아들의 재능을 발견하고 리모주의 유명한 조폐 장인이자 금 세공인인 아보(Abbo)에게 보내 화폐 제조 기술을 배우게 했다. 성 엘리지오는 리모주의 조폐국 책임자였던 아보 밑에서 도제 수업을 마친 후 파리(Paris)로 갔고, 그곳에서 절묘한 디자인과 경제적인 재료 사용으로 유명한 금 세공인이 되었다. 당시 네우스트리아(Neustria)의 프랑크왕인 클로타르 2세(Chlothar II, 584~629년 재위)는 왕실 재무관이었던 보봉(Bobbon)의 추천을 받아 값비싼 보석들로 장식한 왕좌 제작을 그에게 맡겼다. 성 엘리지오는 하나의 왕좌를 위한 재료로 두 개의 왕좌를 만들었고, 그의 성실하고 정직한 태도가 마음에 든 왕은 그를 마르세유(Marseille) 조폐국의 책임자로 임명하였다. 마르세유 조폐국에서 일하면서 그는 예술 관련 작품과 성물(聖物) 제작에도 많이 참여하였다. 대표적으로 투르(Tours)의 성 마르티노(Maritinus, 11월 11일) 주교의 무덤, 파리의 성 디오니시오(Dionysius, 10월 9일) 주교의 무덤과 성당 성가대석의 십자가 등을 들 수 있다. 성 엘리지오는 금속 세공 분야에서 최고 전문가로서 명성을 떨치며 높은 지위와 막대한 부를 누리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교만하거나 타락하지 않고 늘 가난한 사람들을 기억하고 그들을 돕는데 힘썼다. 또한 클로타르 2세 왕과도 절친한 친구가 되었다. 클로타르 2세가 사망하고 그의 후계자로 왕위에 오른 다고베르트 1세(Dagobert I, 629~639년 재위)는 아버지의 벗이었던 그를 계속 조폐국의 책임자로 둘뿐 아니라 자신의 고문으로 위촉했다. 그 후 그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고, 외국의 사절들도 왕을 알현하기 전에 먼저 그를 찾아와 만나곤 했다. 그는 자신의 영향력을 활용해 많은 자선기금을 모아 가난한 이들을 돕는 한편, 계속해서 마르세유로 끌려오는 포로와 노예들의 몸값을 대신 지불하고 그들을 풀어주었다. 궁정에 살면서도 모범적 생활을 이어갔던 그는 동료이자 훗날 루앙(Rouen)의 주교가 되는 성 아우도에노(Audoenus, 8월 24일)와 함께 보비오(Bobbio)의 성 골룸바노(Columbanus, 11월 23일)가 도입한 아일랜드의 수도 규칙에 따라 생활했다. 632년에 성 엘리지오는 리모주 교구의 솔리냑(Solignac)에 성 베네딕토회 남자 수도원을 세우고 마스트리흐트(Maastricht)의 성 레마클로(Remaclus, 9월 3일)가 초대 수도원장으로서 운영을 담당하도록 했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왕으로부터 선물로 받은 파리 시테(Cite)섬의 저택에 막대한 재원을 들여 300여 명의 동정녀가 생활하는 여자 수녀원을 설립해 리모주의 수호성인인 성 마르티알리스(Martialis, 6월 30일)에게 봉헌하였다. 그리고 파리의 성녀 아우레아(Aurea, 10월 4일)가 초대 수녀원장으로서 아일랜드의 수도 규칙에 따라 수녀들을 지도하도록 했다. 이 외에도 그는 여러 병원과 성당 그리고 수도원을 복원 또는 신축했다. 특히 프랑크족의 수호성인인 투르의 성 마르티노와 왕의 주보 성인이 된 파리의 성 디오니시오의 유해를 모시는 여러 개의 아름다운 성당을 건립하였다. 639년에 다고베르트 왕이 사망하고 난틸드(Nanthilde) 여왕이 섭정하게 되자 성 엘리지오는 동료인 성 아우도에노와 함께 궁정을 떠나 50세가 넘은 640년에 사제품을 받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누아용-투르네(Noyon-Tournai)의 주교가 사망하자 교구의 모든 사제와 신자들의 만장일치로 성 엘리지오를 후임자로 선출하였다. 641년경 주교품을 받은 그는 수도원을 세우는 일과 선교 사업에 온 힘을 쏟았다. 그가 사목해야 할 교구는 대단히 넓은 지역으로 주민들 대부분은 여전히 이교도들이었다. 그는 19년 정도 주교직을 수행하면서 오늘날 벨기에 서부의 플랑드르(Flandre)와 네덜란드 북부의 프리슬란트(Friesland) 지역 그리고 인근 해안가에 흩어져 사는 여러 부족을 개종시키는 일에 전념하였다. 그는 주민들의 큰 반대에도 불구하고 안트베르펜(Antwerpen), 겐트(Gent), 코르트리크(Kortrijk/Courtrai) 등에서 많은 개종자를 얻었다. 성 엘리지오는 자신의 주교좌가 있는 누아용에 수녀원을 설립하고 성녀 고데베르타(Godeberta, 4월 11일)에게 원장직을 맡겼다. 그는 또한 생캉탱(Saint-Quentin)의 성 퀸시노(Quintinus, 10월 31일)의 유해를 발견해 순교자의 이름을 딴 성당과 부속 수도원을 세워 봉헌했고, 세클린(Seclin)의 성 피아토(Piatus, 10월 1일)의 유해를 발견해 직접 성해함을 만들어 정중히 모셨다. 성 엘리지오는 660년 12월 1일 열병에 걸려 누아용의 수도원에서 선종하였다. 성 엘리지오는 선종 후 플랑드르와 프리슬란트의 여러 도시에서 큰 공경을 받았다. 중세에 그의 유해는 특별한 공경을 받으며 여러 차례, 여러 곳으로 옮겨졌으나 오늘날 대부분의 유해는 누아용의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모셔져 있다. 그는 금세공 기술자, 대장장이, 모든 금속 장인들의 주보 성인이며, 택시 운전기사들도 주보로 모시고 있다. 그의 동료였던 성 아우도에노 주교가 그의 전기를 썼다. 교회 미술에서 성 엘리지오는 보통 모루 위에서 작업하고 있는 대장장이의 모습으로 또는 주교 복장을 하고 주교 지팡이와 망치 등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옛 “로마 순교록”은 12월 1일 목록에서 누아용의 성 엘리지오 주교가 수많은 기적으로 인해 빛나는 삶을 살았다고 전해주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같은 날 목록에서 오늘날 프랑스에 속한 네우스트리아에서 금 세공인이자 다고베르트 왕의 고문이었던 성 엘리지오가 많은 수도원을 세우고, 성인들을 기념하기 위해 예술적으로 뛰어나고 아름다운 무덤을 건립했으며, 누아용과 투르네 교구의 주교로 선출되어 사도직 활동에 열정적으로 헌신했다고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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