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목록

구분 성인명     축일 신분 지역명 검색
올리버 플런킷(7.1)

올리버 플런킷(7.1) 기본정보 [기본정보] [사진/그림] [자료실] 인쇄

성인명, 축일, 성인구분, 신분, 활동지역, 활동연도, 같은이름 목록
성인명 올리버 플런킷 (Oliver Plunkett)
축일 7월 1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대주교, 신학자, 순교자
활동지역 아일랜드(Ireland)
활동연도 1629-1681년
같은이름 올리바리오, 올리바리우스, 올리베리오, 올리베리우스, 올리비에, 플런케트, 플런켓
성인 기본정보

   성 올리버 플런킷은 1629년 11월 1일 아일랜드 북동부 미스(Meath) 지방의 러프쿠르(Loughcrew)에서 귀족 가문의 아들로 태어났다. 소년 시절 그는 더블린(Dublin)의 성모 마리아 수도원의 원장이자 삼촌인 패트릭 플런킷(Patrick Plunkett)에게 맡겨져 교육을 받았다. 사제직을 지망한 그는 1647년에 로마(Roma)에 있는 아일랜드 신학교에 들어가 수학한 후 1654년 1월 1일 포교성성(Congregatio de Propaganda Fide, 인류복음화성[Congregation pro Gentium Evangelizatione]을 거쳐 2022년 새복음화촉진평의회와 통합해 복음화부[Dicasterium pro Evangelizatione]로 재조직되었다) 신학교에서 사제품을 받았다. 그는 즉시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했으나 영국의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이 주도한 아일랜드 재정복을 위한 전쟁(1649~1653년)과 그로 인한 가톨릭에 대한 종교적 박해로 인해 바로 귀향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로마에 남아서 1657년부터 12년 동안 로마 교황청 신학대학의 교수로 재직했다.

   그는 1669년에 아마(Armagh) 교구의 대주교이자 아일랜드의 수석 대주교로 임명되었다. 1670년 3월에 아일랜드에 도착한 그는 미스의 주교가 된 그의 스승 패트릭 플런킷의 영접을 받았다. 올리버 크롬웰이 죽고 영국에서 스튜어트(Stuart) 왕정이 복원되었으나 나약하고 방탕한 찰스 2세(Charles II, 1660~1685년 재위) 왕은 아일랜드인들이 요구한 관용을 허락하지 않았다. 여전히 가톨릭을 제한하고 박해하는 법이 유효했으나 총독의 성향에 따라 비교적 평화로운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성 올리버 플런킷은 주교좌에 오른 후 조심스럽게 교구 내 본당을 방문하여 성직자와 신자들을 만나며 4년 동안 거의 5만여 명에게 견진성사를 주었다. 또한 교회 회의를 소집해 박해 중에 만연했던 여러 폐해를 바로잡기 위한 결의안을 채택했다. 트렌토 공의회의 결정에 따라 교회의 규율을 정비하고 예수회 신부들을 초빙해 대학을 설립하고 청소년들에 대한 교육을 맡겼다.

   그러나 이러한 평화는 오래 가지 않았다. 1672년 아일랜드에 새로운 총독이 부임하면서 극심한 박해가 재개되었다. 대학은 폐쇄되고 교회의 관리들은 국외로 추방되었으며 사제와 주교들에게는 현상금이 걸려 외국으로 망명하거나 숨어지내야 했다. 국내에 남기로 한 성 올리버 플런킷은 숲속 오두막으로 피신했고, 추위와 굶주림으로 많은 고통을 겪었다. 그 당시 그가 쓴 많은 편지는 끝까지 자신의 양 떼를 떠나지 않고 충실한 목자로 남으려는 결심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하느님과 사도좌를 위해 희생할 수 있는 은총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를 드렸다. 그렇게 몇 년 동안 박해의 광풍이 지나고 다소 잠잠해지자 그는 다시금 학교를 열고 교구를 재조직하며 개혁과 쇄신 작업을 진행했다.

   그러던 중 1678년 티투스 오츠(Titus Oates)가 조작한 ‘가톨릭 음모 사건’이 발생했다. 영국과 아일랜드의 갈등 속에서 영국 국교회 사제이자 배교자인 오츠는 가톨릭교회가 정권을 장악하기 위해 왕을 암살하고 가톨릭 신자인 왕을 세울 음모를 꾸민다고 주장하여 런던(London)을 공포정치에 빠뜨렸다. 추밀원은 이러한 고발이 모순으로 가득 찼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묵인함으로써 수많은 사람이 체포되어 고초를 겪고 교수형을 당했다. 끝까지 양 떼를 떠나지 않았던 성 올리버 플런킷 대주교는 1679년 12월 6일 더블린에서 반역죄로 체포되어 더블린성에 투옥되었다. 그는 1680년 7월 아마 교구의 던독(Dundalk) 법정으로 끌려가 2만 명의 프랑스 군인을 데려와 반역을 꾀하려 했다는 혐의로 재판을 받았다. 하지만 법정에서 그의 유죄를 입증할 수는 없었다. 부당한 고발이자 조작된 모함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영국에서 재판을 받기 위해 런던으로 이송되어 뉴게이트(Newgate) 감옥에 갇혔다.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아일랜드에서 그의 무죄를 입증할 증인과 증거를 가져올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다. 결국 1681년 6월 15일 재판에서 그는 반역죄로 사형 선고를 받았다.

   찰스 2세 왕은 그의 무죄를 알고 있었고, 자비를 호소하는 프랑스 대사 등의 편지에도 불구하고 그를 살려주는 것에 대한 정치적 부담감 때문에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성 올리버 플런킷은 1681년 7월 1일 런던의 타이번(Tyburn)으로 끌려가 교수형과 사지가 찢기는 극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그는 마지막까지 자기 죽음에 책임이 있는 모든 이들을 용서하며 평온하게 순교의 월계관을 받았다. 그는 런던의 대표적 처형장인 타이번에서 가톨릭 신앙을 고백하고 처형된 마지막 순교자였다. 그는 1920년 5월 23일 교황 베네딕토 15세(Benedictus XV)에 의해 아일랜드의 순교자로서는 처음으로 시복되었다. 그리고 1975년 10월 12일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성인품에 오름으로써 거의 700년 만에 탄생한 아일랜드 성인이 되었다. 1997년 성 올리버 플런킷은 아일랜드의 평화와 화해를 위한 수호성인으로 선포되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7월 1일 목록에서 아일랜드 아마의 주교인 성 올리버 플런킷이 음모를 꾸몄다는 혐의로 거짓 고발을 당해 찰스 2세 국왕 때 런던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지만, 단두대 앞에 모인 군중 앞에서 박해자를 용서하고 가톨릭 신앙을 확고히 고백하며 순교했다고 기록하였다. 성 올리버 플런킷은 성 올리베리우스/올리바리우스 플런킷(Oliverius/Olivarius Plunkett, 또는 올리베리오/올리바리오 플런킷)으로도 불린다.♣

사진/그림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