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페트루스(Petrus, 또는 베드로)는 1050년경 프랑스 남서부 아키텐(Aquitaine)의 푸아티에에서 귀족 가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신학과 철학을 공부하고 푸아티에 대성당의 사제가 되었고, 1087년 대성당 회의에서 푸아티에의 주교로 선출되었다. 그는 주교로서 신자들의 영적 유익과 성직자들의 생활을 개혁하는 데 힘썼다. 그는 1095년에 클레르몽(Clermont) 공의회에 참석하고 1100년에 푸아티에 공의회를 주재했는데, 이때 순회 설교가로서 여러 곳을 여행하며 회개와 개종을 강조하던 아브리셀(Arbrissel)의 복자 로베르토(Robertus, 2월 25일)를 만났다. 그의 열정에 깊은 인상을 받은 성 베드로는 그를 보호하고 지원하여 퐁트브르(Fontevraud)에 남녀 수도원을 함께 설립한 후 교구 내에서 수도원 생활을 보호하고 장려하였다. 그는 또한 세속 군주의 권력으로부터 교회의 자유를 보장받고 교회를 개혁하고자 노력했다. 그러면서 그는 샤텔로(Chatellerault) 자작의 아내와 불륜 관계를 맺은 아키텐의 공작을 파문하였다. 그로 인해 그는 1112년에 부당하게 성직매매 혐의로 고소당해 교구에서 쫓겨나 쇼비니(Chauvigny) 성으로 유배되었다. 그는 교황 파스칼 2세(Paschalis II)에게 호소하여 무죄 선고와 복귀를 명령받았으나 공작의 방해로 푸아티에로 돌아오지 못한 채 쇼비니에서 1115년에 선종하였다. 그는 1861년 교황 비오 9세(Pius IX)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4월 4일 목록에 푸아티에의 성 베드로 주교의 이름을 추가하면서 그가 퐁트브르 기사단의 탄생을 지지했다가 부당하게 자리에서 물러나 쇼비니에서 유배 생활을 하다가 숨을 거두었다고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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