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시메온 프랑수아 베르뇌(Simeon Francois Berneux, 장 시메온 또는 베르뇌 시메온) 주교의 한국명은 장경일(張敬一)이다. 그는 1814년 5월 14일 프랑스 르망(Le Mans) 교구의 샤토뒤루아(Chaeau-du-Loir)에서 평범한 부모의 아들로 태어났다. 대장간 일을 하던 그의 아버지는 프랑스 혁명 이후 신앙생활을 멀리하였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는 신앙심이 깊은 부인으로서 모든 사랑을 쏟아 아들을 가르쳤다. 성 베르뇌 시메온은 어려서부터 총명했고 신심이 깊었기 때문에 가난한 집안 형편에도 불구하고 본당신부와 몇몇 사람의 후원으로 그 도시의 중학교에서 공부하고 프레시네(Precigne) 소신학교를 거쳐 1831년에 르망 교구의 대신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리고 1837년 5월 20일 사제품을 받았다. 사제 수품 후 곧바로 대신학교 교수로 임명되어 철학을 가르치던 그는 이방인 선교에 헌신하려는 일념으로 1839년 7월 15일에 파리 외방전교회에 입회하였다. 1840년 1월 15일 통킹(Tonkin, 현 베트남 북부)의 선교사로 임명된 성 베르뇌 시메온 신부는 그해 2월 마카오를 향해 출발해 9월 21일 파리 외방전교회 극동 대표부에 도착하였다. 그곳에서 통킹으로 갈 기회를 기다리는 동안, 조선에서 유학 온 성 김대건 안드레아(金大建, Andreas)와 최양업 토마스(崔良業, Thomas) 신학생에게 철학을 가르치기도 했다. 1841년 1월 마침내 마카오를 떠나 목적지인 통킹에 도착한 그는 곧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고 2년 동안 감옥에 갇혀 있었다. 다행히도 프랑스 군함이 들어오면서 1843년 3월 12일 함대 사령관의 도움으로 선교사 5명과 함께 석방되었다. 다른 선교사들은 프랑스로 돌아갔으나 성 베르뇌 시메온 신부는 마카오로 되돌아와 만주 대목구 선교사로 임명되었다. 1844년 3월 15일 만주 요동(遼東)에 도착한 성 베르뇌 시메온 신부는 중국어 공부를 하며 열성적으로 선교 임무를 수행했다. 그는 만주 대목구장인 베롤(J. Verrolles) 주교의 신임을 얻어 1849년에 대목구장 직무 대행(Provicarius)이 되었고, 1854년 3월 11일에는 계승권을 가진 부주교(Coadjutor)가 되었다. 제3대 조선 대목구장인 페레올(J. Ferreol) 주교는 일찍이(1845년 7월 15일) 성 베르뇌 시메온 신부를 그의 부주교로 지명했으나 성 베르뇌 시메온 신부는 그것을 거절했었다. 그러나 로마 교황청에서는 이미 그를 베롤 주교의 부주교로 발령하였고, 페레올 주교가 선종하자 갑사 명의 주교이자 제4대 조선 대목구장으로 임명하였다. 성 베르뇌 시메온 신부를 조선 대목구장으로 임명한 1854년 8월 5일 자 교황 비오 9세(Pius IX)의 소칙서가 12월 24일에 도착하자 베롤 주교는 12월 27일 그의 주교 서품식을 거행하였다. 주교품을 받은 성 베르뇌 시메온 주교는 조선에 입국하기 위해 1855년 9월 상해로 갔다. 그곳에서 새로 조선에 부임하는 프티니콜라(M. A. Petitnicolas) 신부와 푸르티에(J. Pourthie) 신부와 합류한 뒤, 그들과 함께 주교 일행을 영입하기 위해 조선에서 건너온 홍봉주 토마스(洪鳳周, Thomas)의 안내를 받아 이듬해 1월 17일 상해를 떠났다. 그들은 2개월간의 길고도 어려운 항해 끝에 1856년 3월 27일 서울로 몰래 들어오는 데 성공하였다. 그는 입국한 후 어느 정도 조선말을 익히자 상복을 입고 경기도 지방의 공소들을 사목 방문하며 교우들을 찾아 나섰다. 성 베르뇌 시메온 주교는 1857년 3월 25일 오랜 선교활동으로 조선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성 안(安) 안토니오(다블뤼 안토니오) 신부를 조선 대목구의 부주교로 서품하고, 이튿날부터 3일 동안 조선교회 역사상 처음으로 성직자 회의를 개최하였다. 이 회의를 통해 조선 천주교회 지도서의 기초를 마련하는 동시에 회의 결과를 정리해 1857년 8월 2일에 “장 주교 윤시 제우서”(張主敎輪示諸友書)라는 공식 사목 지침서를 반포하였다. 이를 통해 당시 조선교회가 직면했던 여러 가지 법규와 제도 등의 문제들을 규명하면서 조선교회의 발전을 위한 방안을 심의하였다. 그는 선교활동을 위해 파리 외방전교회 본부에 선교사 파견을 수시로 요청했고, 현지인 신학생 양성을 위해 배론에 성 요셉 신학교를 세웠다. 교회 서적과 출판물을 통한 간접 선교와 신자 교육을 위해 각종 기도서와 교리서를 번역 출판하는 일에도 힘썼다. 그래서 1861년부터 2곳의 교회 목판 인쇄소에서 다량의 교회 서적을 인쇄해 교우들에게 보급할 수 있었다. 그 외에도 조선 순교자들에 대한 증언과 자료 수집 및 편찬 작업을 성 다블뤼 안토니오 주교에게 위임하였다. 이러한 노력으로 교세는 날로 확장되었고 신자 수도 1857년 15,000명에서 1865년에는 23,000명까지 늘어나는 결과를 가져왔다. 1864년 국경 북쪽에 러시아 상선이 나타나서 통상을 요구하자 교회의 지도급 인사들이 종교의 자유를 얻게 될 좋은 기회라 생각해 1866년 초 대원군에게 방아책(防俄策)의 하나로 교회와의 협조를 건의했다. 대원군이 호의적으로 받아들이자 북방에서 선교 중이던 성 베르뇌 시메온 주교가 1월 29일 급히 서울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러는 와중에 러시아가 스스로 물러남으로써 문제가 해결되자 대원군은 박해자로 돌변해 쇄국 정책을 강행하였다. 대원군과의 면담 약속을 기다리던 성 베르뇌 시메온 주교는 1866년 2월 23일 배교자 이선이의 밀고로 거처에서 체포되어 서울 우포도청으로 끌려갔다. 서울과 인근에 있던 성 김(金) 헨리코(도리 헨리코) · 서(徐) 루도비코(볼리외 루도비코) · 백(白) 유스토(랑페르 드 브르트니에르 유스토) 신부도 체포되어 의금부에 갇히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조선 천주교회 역사상 가장 참혹했던 병인박해(丙寅迫害)가 시작되었다. 서울로 압송된 성 베르뇌 시메온 주교는 우포도청에서 문초를 받고, 3월 2일 의금부로 이송되어 세 차례의 추국을 받았다. 그는 앞무릎에 곤장 열 대를 맞는 고문을 당하면서도 신자들의 이름이나 선교사의 거처 등에 대해 일절 대답하지 않았다. 귀국 권고마저 물리친 그는 1866년 3월 6일 군문효수의 극형을 선고받고, 다음날인 3월 7일 세 명의 선교사 신부들과 함께 머리를 맞대고 묶인 채 감옥에서 끌려 나와 수레에 실려 형장으로 향했다. 이때 성 베르뇌 시메온 주교는 “우리가 조선에서 죽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고!” 하며 기뻐했다고 한다. 얼굴에 희색이 만연한 그들은 사형장인 한강 변 새남터에 도착했다. 미리 기다리고 있던 군졸들은 선교사들을 둘씩 무릎 꿇린 후 양쪽 귀를 화살로 꿴 다음, 그들 얼굴에 백회를 뿌림으로써 모든 처형 준비를 마쳤다. 사형 집행 선언문 낭독이 끝나자 여섯 명의 희광이가 날뛰고 소리를 지르며 돌다가 성 베르뇌 시메온 주교의 목을 칼로 내리쳤다. 그의 목이 두 번째로 내려친 칼날에 땅에 떨어지니, 한 병졸이 그 머리를 포도대장 앞에 갖다 보인 다음 군문에 매달았다. 이때 새남터에서 순교한 주교와 세 명의 신부들 그리고 3월 11일 순교한 성 우세영 알렉시오(禹世英, Alexius)의 시신은 형장에 방치되었다가 2개월 후인 5월 12일 박순지 요한 등에 의해 발굴되어 새남터 인근에 안장되었다가 5월 27일 와서(瓦署, 왜고개, 서울 용산구 한강로3가)로 옮겨졌다. 용감한 신자들이 순교자들의 시신을 정성껏 장례 지내고 와서에 모신 것이다. 그 뒤 이들 순교자의 유해는 1899년 10월 30일 용산 예수성심신학교로 이장되었고, 1900년 9월 5일 명동 성당 지하실로 옮겨졌다가 시복을 앞둔 1967년 절두산 순교성지 내의 병인박해 100주년 기념성당 지하에 마련된 성인 유해실에 안치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성 베르뇌 시메온 주교는 1968년 10월 6일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병인박해 순교자 24위’의 한 명으로 시복되었다. 그리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을 기념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103위 한국 순교성인’ 중 한 명으로 성인품에 올랐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3월 7일 목록에서 한국의 새남터에서 파리 외방 전교회의 성 베르뇌 시메온 주교와 동료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한국에 왔다가 참수형을 당해 순교했다고 기록하였다. 그의 축일은 9월 20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에 함께 경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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