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베르나르 루이 볼리외(Bernard-Louis Beaulieu, 서 루도비코 또는 볼리외 루도비코) 신부의 세례명은 베르나르도(Bernardus)이고, 한국 이름은 서몰례(徐沒禮)이다. 그는 1840년 10월 8일 프랑스 남서부 보르도(Bordeaux) 교구의 랑공(Langon)에서 베르나르와 마리 데지레(Marie-Desiree)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결혼 5개월 만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어머니는 유복자인 아들을 낳자마자 성모님께 봉헌하였다. 신심 깊은 어머니의 영향을 받고 성장한 성 볼리외 루도비코(Beaulieu Ludovicus)는 여섯 살 되던 해에 공민학교에 들어갔고, 일곱 살에 복사를 시작했고, 아홉 살이 되던 1849년 10월에 고향에 있는 소신학교에 입학하였다. 그해에 성 볼리외 루도비코는 중국 사천성(四川省)에서 전교한 경험이 있는 한 선교사 신부로부터 중국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동양 전교에 대한 열망을 품기 시작했다. 그는 1857년 보르도 대신학교에 입학해서 사제직을 준비하던 중 이듬해에 어머니를 여의는 아픔을 겪었다. 대신학교에서 5년간 수학하여 부제품을 받은 그는 계속해서 동양 전교에 대한 열정을 품고 있었으나 보르도 교구장의 허락을 받기가 쉽지 않았다. 어렵게 허락을 받은 그는 1863년 8월 28일에 파리 외방 전교회 신학교에 들어가 이듬해 5월 21일 동료인 성 랑페르 드 브르트니에르 유스토(Ranfer de Bretenieres Justus, 白) · 성 도리 헨리코(Dorie Henricus, 金) 등과 함께 사제품을 받았다. 수품 후 즉시 조선 선교사로 임명된 성 볼리외 루도비코 신부는 함께 임명된 성 랑페르 드 브르트니에르 유스토 · 성 도리 헨리코 · 성 위앵 루카(Huin Lucas, 閔) 신부 등과 함께 1864년 7월 15일 파리(Paris)를 출발해 마르세유(Marseille)에서 상선을 타고 극동으로 향해 9월 중순 무렵 홍콩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다시 상해(上海)를 거쳐 11월에 요동(遼東)의 차쿠에 도착해 한문 공부를 하며 제4대 조선 대목구장인 성 베르뇌 시메온(Berneux Simeon, 張) 주교의 연락을 기다렸다. 이윽고 1865년 4월 17일 차쿠를 출발한 성 볼리외 루도비코 신부와 동료들은 백령도 인근에서 주교가 보낸 배로 갈아타고 5월 27일 충청도 내포(內浦) 지방에 상륙하여 마침내 조선 땅을 밟았다. 그들은 마침 내포 지방에 와 있던 성 다블뤼 안토니오(Daveluy Antonius, 安) 주교를 만나 그의 지시를 받고 상경하였다. 서울로 올라온 성 볼리외 루도비코 신부는 태평동(太平洞)에 있는 성 베르뇌 시메온 주교 댁에서 잠시 머무른 후 주교의 명에 따라 6월에 뫼논리(현 경기도 성남시 운중동의 山畓里) 교우촌으로 가서 그곳 신자들에게 성사를 주면서 조선말을 배웠다. 본격적인 사목 활동을 준비하던 그는 입교한 지 얼마 안 된 장제철이라는 교우 집에서 조선말을 열심히 공부했다. 이때 그의 동료인 성 도리 헨리코 신부가 이웃인 손골(현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蓀谷) 교우촌에서 조선말을 배우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자주 연락을 취하며 서로 의지하였다. 한편 성 볼리외 루도비코 신부는 어려운 환경에도 불구하고 “이토록 잘 전교할 수 있는 지방에 오게 된 것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라고 행복하게 말했으며, 고해성사를 들을 정도로 조선말에도 능숙해졌다. 어느 정도 조선말 공부를 마친 성 볼리외 루도비코 신부는 1866년 2월 12일 상경하여 성 베르뇌 시메온 주교로부터 새 임지로 충청도 지방을 부여받았는데, 출발 직전에 병인박해(丙寅迫害)가 일어나 주교가 체포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박해 소식을 들은 신자들로부터 피신을 권유받은 성 볼리외 루도비코 신부는 처음에 머물던 장제철의 집을 나와 이 요셉의 집으로 피신하였다. 그러나 이미 성 베르뇌 시메온 주교의 하인으로 있던 배교자 이선이(李先伊)가 그와 성 도리 헨리코 신부의 거처를 밀고한 뒤였다. 결국 2월 27일 아침에 장체철을 앞세우고 찾아온 포졸들은 먼저 성 볼리외 루도비코 신부를 체포하고, 이어서 손골에 있는 성 도리 헨리코 신부도 체포하여 서울로 압송하였다. 성 볼리외 루도비코 신부는 서울로 압송된 후 포도청과 의금부에서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관헌들이 원하는 교우들 이름이나 정보는 하나도 말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자신은 조선에 천주교의 진리를 전하기 위해 왔으며, 죽는 한이 있더라도 본국으로 송환되기를 원하지 않는다며 순교의 뜻을 강력히 피력하였다. 결국 그는 군문효수(軍門梟首)의 사형선고를 받고 3월 7일 성 베르뇌 시메온 주교와 동료 선교사인 성 랑페르 드 브르트니에르 유스토와 성 도리 헨리코 신부 등과 함께 새남터 형장으로 끌려가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 26세였다. 이날 순교한 성 볼리외 루도비코 신부와 주교와 동료 신부들의 시신은 다른 순교자의 시신과 함께 형장에 방치되었다가 2개월 후인 5월 12일 박순지 요한(朴順之, Joannes) 등에 의해 발굴되어 새남터 인근에 잠시 묻혔다가 5월 27일 와서(瓦署, 왜고개, 서울 용산구 한강로3가)로 옮겨 안장되었다. 용감한 신자들이 순교자들의 시신을 정성껏 장례 지내고 와서에 모신 것이다. 그 뒤 이들 순교자의 유해는 1899년 10월 30일 용산 예수성심신학교로 이장되었고, 1900년 9월 5일 명동 성당 지하실로 옮겨졌다가 시복식을 앞둔 1967년 절두산 순교성지 내의 병인박해 100주년 기념성당 지하에 마련된 성인 유해실에 안치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성 볼리외 루도비코 신부는 1968년 10월 6일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병인박해 순교자 24위’의 한 명으로 시복되었다. 그리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을 기념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103위 한국 순교성인’ 중 한 명으로 성인품에 올랐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3월 7일 목록에서 한국의 새남터에서 파리 외방 전교회의 성 볼리외 루도비코 신부와 동료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한국에 왔다가 참수형을 당해 순교했다고 기록하였다. 그의 축일은 9월 20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에 함께 경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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