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시몽 마리 앙트완 쥐스트 랑페르 드 브르트니에르(Simon Marie Antoine Just Ranfer de Bretenieres, 백 유스토 또는 랑페르 드 브르트니에르 유스토) 신부의 세례명은 유스토이고 한국 성은 백(白)이다. 그는 1838년 2월 28일 프랑스 중동부 디종(Dijon) 교구에 속한 샬롱쉬르손(Chalon-sur-Saone)에서 브르트니에르(Edmond de Bretenieres) 남작과 안나(Anna de Montcoy)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형이 이미 8년 반 전에 사망했기 때문에 그는 태어나자마자 장남이 되었다. 그의 집안은 부르고뉴(Bourgogne) 지방의 유명한 법관 가문이었지만, 그는 성장하면서 현세의 명성이나 재산, 가문을 이어받으려는 생각보다는 성직을 통해 고통받는 사람들을 도우려는 마음이 앞섰다. 그의 부모 또한 매우 신심 깊은 신자였기에 최선을 다해 자녀들의 신앙생활을 뒷바라지했다. 그는 21살이 되던 1859년에 파리(Paris) 근교에 있는 성 쉴피스(Sulpice) 신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러면서 점점 외방 선교에 관심을 두게 되어 1861년 7월 25일 파리 외방 전교회 신학교로 편입하였다. 그는 3년 뒤인 1864년 5월 21일 동료인 성 볼리외 루도비코(Beaulieu Ludovicus, 徐) · 성 도리 헨리코(Dorie Henricus, 金) 등과 함께 사제품을 받았다. 첫 미사를 봉헌하면서 순교의 특은을 기도했던 그는 수품 즉시 조선 선교사로 임명되자 “이 나라가 바로 내가 그토록 가고 싶었던 곳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는 함께 조선 선교사로 임명된 성 볼리외 루도비코 · 성 도리 헨리코 · 성 위앵 루카(Huin Lucas, 閔) 신부 등과 같이 1864년 7월 15일 파리를 떠나 마르세유(Marseille)에서 상선을 타고 극동으로 향해 9월 중순 무렵 홍콩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다시 상해(上海)를 거쳐 11월에 요동(遼東)의 차쿠에 도착해 한문 공부를 하며 제4대 조선 대목구장인 성 베르뇌 시메온(Berneux Simeon, 張) 주교의 연락을 기다렸다. 이윽고 1865년 4월 17일 차쿠를 출발한 성 랑페르 드 브르트니에르 유스토 신부와 동료들은 백령도 인근에서 주교가 보낸 배로 갈아타고 5월 27일 충청도 내포(內浦) 지방에 상륙하여 마침내 조선 땅을 밟았다. 그들은 서울에 있는 성 베르뇌 시메온 주교와 연락할 방도를 찾던 중, 마침 집에 화재가 발생해 내포 지방에 피신해 있던 성 다블뤼 안토니오(Daveluy Antonius, 安) 주교를 만나 그의 지시를 받고 상경하였다. 성 랑페르 드 브르트니에르 유스토 신부는 태평동(太平洞)에 있는 성 베르뇌 시메온 주교댁에 머무르다가 7월에 동료들과 헤어져 남대문 밖에 있는 성 정의배 마르코(丁義培, Marcus) 회장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곳에서 조선말과 풍속을 배운 그는 다른 동료들보다 조선말 공부가 빨라 1866년 1월과 2월에 성 베르뇌 시메온 주교의 전교 활동을 도우며 80명의 신자로부터 고해성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런데 1866년 초에 뜻하지 않은 병인박해(丙寅迫害)가 일어나 더는 성직을 수행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2월 23일에 성 베르뇌 시메온 주교가 체포되었다는 슬픈 소식을 들었다. 그는 즉시 성 다블뤼 안토니오 주교와 다른 동료들에게 인편을 통해 이 소식을 알리고, 다음날 체포될 각오를 하고 신발을 신은 채 마지막 미사를 올렸다. 마침내 2월 25일 아침에 포졸들이 들이닥쳐 먼저 성 정의배 마르코 회장이 체포되었다. 그리고 다음 날인 26일 성 베르뇌 시메온 주교의 하인이었던 이선이(李先伊)의 고발과 안내로 성 랑페르 드 브르트니에르 유스토 신부도 체포되고 말았다. 그는 포도청으로 압송되어 세 차례, 그리고 의금부로 이송되어 두 차례의 문초와 형벌을 받았다. 그는 동료 사제들의 거처나 신자들을 밀고하지 않고 “나는 조선 사람인 여러분의 영혼을 구해주려고 왔으므로 주님을 위해 기꺼이 죽겠소.”라고 고백하였다. 대원군은 말이 잘 통하지 않아 성 랑페르 드 브르트니에르 유스토 신부에게 별다른 문초나 심문을 하지 않은 채 그냥 형벌을 가하게 하였다. 3월 5일 문초에서 관리들은 그에게 “차마 죽일 수 없어 본국에 돌려보내 주려는데 어떠한가?”라고 하자 그는 “이 나라에 와서 해를 넘겼습니다. 이 나라 풍습에 익어 이곳에서 여생을 즐기려 하는데 어찌 돌아갈 마음이 있겠습니까? 생사에 구애를 받아 변심하지 않으렵니다.”라고 당당하게 대답하였다. 결국 그는 성 베르뇌 시메온 주교와 같은 날인 1866년 3월 6일 사형 선고를 받고, 이튿날인 3월 7일 성 베르뇌 시메온 주교와 성 볼리외 루도비코 · 성 도리 헨리코 신부 등과 함께 사형 집행 장소인 새남터로 향했다. 기쁨이 가득한 얼굴로 처형장인 새남터에 도착한 그들은 귀에 화살을 꽂고 조리돌리는 등의 형벌을 받으며 사형 절차를 기다렸다. 성 랑페르 드 브르트니에르 유스토 신부가 심한 갈증에 물을 청하자 동정심 많은 한 포졸이 물을 주려고 했다. 그러나 다른 포졸 하나가 “곧 죽여야 할 죄인에게 물을 주어서 무엇 하겠는가?” 하며 그 물을 땅바닥에 쏟아버렸다. 마지막으로 그는 성 베르뇌 시메온 주교와 프랑스어로 마지막 대화를 나눈 다음 주교의 참수 광경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그 후 자기 차례가 되어 네다섯 번 내리친 칼날에 참수되어 신부가 되면서부터 갈망해오던 순교의 특은을 입었다. 이때가 1866년 3월 7일이고, 그의 나이는 28세였다. 성 랑페르 드 브르트니에르 유스토 신부와 함께 순교한 주교와 신부들 그리고 3월 11일 같은 장소에서 순교한 성 우세영 알렉시오(禹世英, Alexius) 등의 시신은 형장에 방치되었다가 2개월 후인 5월 12일 박순지 요한(朴順之, Joannes) 등에 의해 발굴되어 새남터 인근에 잠시 묻혔다가 5월 27일 와서(瓦署, 왜고개, 서울 용산구 한강로3가)로 옮겨 안장되었다. 용감한 신자들이 순교자들의 시신을 정성껏 장례 지내고 와서에 모신 것이다. 그 뒤 이들 순교자의 유해는 1899년 10월 30일 용산 예수성심신학교로 이장되었고, 1900년 9월 명동 성당 지하실로 옮겨졌다. 그런데 성 랑페르 드 브르트니에르 유스토 신부의 유해 일부는 가족들의 요청으로 1911년 프랑스로 옮겨져 그해 11월 9일 가족묘에 안장되었다. 그 뒤 명동에 모셨던 성 랑페르 드 브르트니에르 유스토 신부와 순교성인들의 유해는 시복식을 앞둔 1967년 절두산 순교성지 내의 병인박해 100주년 기념성당 지하에 마련된 성인 유해실에 안치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성 랑페르 드 브르트니에르 유스토 신부는 1968년 10월 6일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병인박해 순교자 24위’의 한 명으로 시복되었다. 그리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을 기념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103위 한국 순교성인’ 중 한 명으로 성인품에 올랐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3월 7일 목록에서 한국의 새남터에서 파리 외방 전교회의 성 랑페르 드 브르트니에르 유스토 신부와 동료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한국에 왔다가 참수형을 당해 순교했다고 기록하였다. 그의 축일은 9월 20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에 함께 경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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