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승에 따르면 성 비길리우스(또는 비질리오)는 로마의 귀족 출신으로 로마(Roma)와 아테네(Athenae)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 후 그는 가족과 함께 이탈리아 북부 트렌토 지역에 정착하였다. 그는 385년에 트렌토의 세 번째 주교로 선출되었고, 밀라노(Milano)의 대주교인 성 암브로시오(Ambrosius, 12월 7일)에게 문장과 사목적 지침을 받았다. 성 비질리오는 당시 이교도 지역이었던 트렌토 주변 복음화를 위해 여러 곳을 여행하며 우상을 파괴하고 수많은 성당을 지었다. 하지만 함께할 성직자의 부족으로 큰 어려움을 겪던 중 성 암브로시오 주교로부터 믿을만한 선교사 세 명을 추천받았다. 그들은 소아시아 지방 카파도키아(Cappadocia) 출신의 성 시시니오(Sisinius) 부제와 성 마르티리오(Martyrius) 독서자와 성 알렉산데르(Alexander, 이상 5월 29일) 문지기였다. 그는 그들을 따뜻하게 환영하며 당시 이교도 지역이었던 트렌토 북부 남티롤(South Tyrol, 오늘날 이탈리아 가장 북쪽에 있는 볼차노[Bolzano] 자치주)의 발 디 논(Val di Non, 논 계곡)에서 복음을 전하도록 위임하였다. 이교도들의 복음화에 헌신하며 많은 이들의 개종을 이끌었던 세 명의 선교사들은 397년 5월 29일 농사의 풍요를 기원하는 암바르발리아(Ambarvalia) 축제가 열렸을 때 분노한 이교도들에 의해 잔혹하게 죽임을 당해 순교하였다. 성 비질리오는 트렌토의 첫 순교자들로 공경받는 그들의 선교 활동과 순교에 대해서 성 암브로시오에게 편지를 써서 보냈다. 그리고 순교자들의 유해를 수습해 트렌토로 모신 다음 그 일부를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의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Joannes Chrisostomus, 9월 13일)와 성 암브로시오를 계승해 밀라노의 주교가 된 성 심플리치아노(Simplicianus, 8월 15일)에게 보냈다. 그리고 그들이 순교한 장소로 알려진 논 계곡의 산제노(Sanzeno)에 그들을 추모하는 대성당을 건립하였다. 히포(Hippo)의 성 아우구스티노(Augustinus, 8월 28일)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세 선교사의 순교에 책임 있는 이들의 사형 선고를 반대하며 황제에게 선처를 호소했다고 한다. 성 비질리오의 죽음에 대해서 확실히 알 수는 없으나 일찍부터 순교자로서 또 트렌토 교구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았다. 전승에 따르면 그는 트렌토 남서쪽에 있는 가르다호수(Lago di Garda) 주변을 여행하며 복음을 전해 많은 이들의 개종을 이끌었다. 405년 6월 26일 그는 다른 선교사들과 함께 가르다호수 북쪽의 렌데나 계곡(Val Rendena)에서 미사를 봉헌한 후 사투르누스 신상을 파괴했는데, 이에 분노한 이교도들에 의해 몽둥이와 나무 신발에 맞아 순교했다고 한다. 그의 유해는 트렌토의 성당으로 옮겨 안치했고, 나중에 그의 후임자에 의해 성당이 확장되면서 그의 이름으로 봉헌한 트렌토 대성당(Basilica Cattedrale Metropolitana di San Vigilio)이 되었다. 그는 아마도 교황 성 인노첸시오 1세(Innocentius I, 3월 12일)에 의해 공식적으로 시성된 것으로 보이는데, 교황 베네딕토 14세는 성 비질리오를 교황에 의해 시성된 최초의 순교자라고 불렀다. 옛 “로마 순교록”은 6월 26일 목록에서 트렌토에서 성 비질리오 주교가 우상 숭배의 잔재를 근절하고자 노력했지만, 잔인하고 야만적인 사람들이 던지는 돌에 맞아 순교했다고 전해주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같은 날 목록에서 밀라노의 성 암브로시오 주교에게 문장과 사목적 가르침을 받은 트렌토의 성 비질리오 주교가 자신의 관할 지역에서 복음화 사업을 강화하고 우상 숭배의 잔재를 철저히 근절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적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전하다가 난폭한 이교도들에게 맞아 순교했다 전해진다고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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