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녀 손소벽 막달레나(Magdalena)는 1839년 12월 29일에 순교한 최창흡 베드로(Petrus)의 아내요, 최영이 바르바라(Barbara)의 어머니이며, 조신철 카롤루스(Carolus)의 장모이다. 그녀는 신앙 때문에 먼 곳으로 귀양을 간 어느 열심한 신자의 딸로, 서울에서 태어났으나 일찍이 어머니를 여의고 할머니 슬하에서 자랐다. 그러나 그녀는 오랫동안 신자가 없는 지방에서 살았고 또 견디기 힘든 박해를 당했기 때문에 감히 교우들과 상종하지 못하다가, 늦게야 성교회의 참 진리를 깨닫게 되었다. 그녀는 17세 때에 당시 유명한 교우이던 최창흡 베드로에게 시집을 갔다. 그 후 막달레나는 자녀 11명을 낳았으나, 대부분이 어려서 죽고 맏딸 바르바라와 두 살짜리 작은 딸만 남았다. 손 막달레나 가족은 콜레라가 창궐하던 1821년경에 세례를 받았고, 선교사들이 입국한 후부터는 더욱 신앙생활에 열심하여 성사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러던 중 기해년 7월에 박해가 극에 달하여 많은 교우들이 체포될 때, 그녀는 포교의 손을 피하기 위하여 여러 친척들과 같이 숨어 있었으나 결국 남편과 딸과 함께 잡혔다. 그런데 사위인 조 카롤루스가 중국에서 가져온 교회 물건들이 그녀의 집에서 압수되었기 때문에 포장은 7회에 걸쳐 엄한 심문과 형벌을 가하였다. 포장은 태장 260대를 때리고, 여러 번 주리를 틀어보았으나 그녀의 마음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또다시 포장이 배교를 강요하자 그녀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제 목숨은 제 것이 아니고 그것을 제게 주신 천주의 것이니 그분만이 아무 때라도 그것을 도로 가져가실 수 있습니다. 삶과 죽음을 주재하시는 천주를 위해서 죽어야 한다면 죽겠습니다. 그러나 그분을 배반할 수는 없습니다.” 이때 막달레나는 두 살짜리 젖먹이 막내딸을 옥에까지 데리고 갔었는데, 그 가엾은 어린 것이 공기도 부족하고 햇볕도 먹을 것도 없는 곳에 있는 것이 어머니 된 마음에 언짢고 또 용기가 꺾일지 몰라 어린 딸을 품에서 떼어내어 읍내에 있는 친척집에 보냈다고 한다. 막달레나는 형조로 이송되어 또다시 심문과 고문을 받았으나, 그 전과 같이 변함없는 용기를 보여 바로 그날 사형이 언도되었다. 이리하여 그녀는 남편이 순교한 지 1개월 정도 후인 1840년 1월 31일에 당고개에서 참수형을 당하여 순교하였다. 이때 그녀의 나이는 40세였다. 그녀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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