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로마 순교록”과 전승에 따르면 성 하드리아노(Hadrianus, 9월 8일)는 소아시아 지방 니코메디아의 근위대 군인 또는 궁중 관리였다. 그는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막시미아누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 때 잡혀 온 23명의 그리스도인이 모진 고문을 당하면서도 하느님을 찬미하며 행복한 모습으로 이겨내는 용기와 인내 그리고 열렬한 믿음에 크게 감동하였다. 그래서 그는 세례를 받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공개적으로 자신도 그리스도인이라고 선언했고, 그 즉시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다. 그의 아내인 성녀 나탈리아는 옥중의 남편을 방문한 후 회심하고 함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다. 성 하드리아노가 사형을 선고받고 가족의 방문마저도 금지되자, 성녀 나탈리아는 머리카락을 자르고 소년 복장으로 갈아입은 후 관리들에게 돈을 건네고 감옥에 들어가 남편의 고통을 위로하고 신심을 굳게 해 주었다. 성 하드리아노가 모루 위에 다리를 올리고 망치로 으스러뜨리는 등 모진 고문을 당하고, 다른 23명의 동료 그리스도인들 또한 처참하게 처형되는 순간에도 성녀 나탈리아는 현장에서 남편과 동료들을 위로하고 그들의 마지막을 목격했다. 전설적 이야기에 따르면, 박해자가 그리스도인들의 사지를 자르고 으스러뜨린 후 불태워버리려 했을 때 거센 비가 내려 불을 꺼버리고 번개가 사형집행인에게 내리쳤다고 한다. 성녀 나탈리아는 어렵게 도끼에 잘려 나간 남편의 손을 찾을 수 있었다. 그들은 모두 3월 4일에 순교했는데, 나중에 다른 그리스도인들이 순교자들의 시신을 수습해 비잔티움(Byzantium)으로 옮겨 안장하였다. 옛 “로마 순교록”은 3월 4일 목록에서 성 하드리아노와 23명의 동료 순교자들의 순교 사실을 기록하였다. 그리고 성 하드리아노의 유해가 나중에 비잔티움에서 이탈리아의 로마(Roma)로 이장된 9월 8일에 그의 축일을 기념한다고 덧붙였다. 9월 8일 목록에서도 이 같은 사실을 확인해주었다. 한편 그의 아내인 성녀 나탈리아에 대해서는 12월 1일 목록에서 성 하드리아노 순교자의 아내로 니코메디아 감옥에 갇힌 거룩한 순교자들을 돌보고, 그들이 순교한 뒤에 비잔티움으로 돌아가 그곳에서 주님 안에 평안한 안식을 얻었다고 했다. 전설적 이야기에 따르면,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남편이 순교한 후 성녀 나탈리아는 자신과 강제로 결혼하려는 니코메디아의 어느 관리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비잔티움으로 피신하여 여생을 보낸 후 남편과 동료 순교자들 곁에 묻혔다고 한다. 옛 “로마 순교록”의 전통에 따라 가톨릭교회는 3월 4일에 성 하드리아노와 23명의 동료 순교자들의 순교를 기념하고, 9월 8일에 특별히 성 하드리아노 유해의 로마 이장을 기념해 그의 축일을 기념했다. 그리고 12월 1일에 성녀 나탈리아의 죽음을 기억해왔다. 동방 정교회는 보통 8월 26일이나 9월 8일에 성 하드리아노와 성녀 나탈리아의 축일을 함께 기념한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9월 8일 목록에서 소아시아 북서부 비티니아(Bithynia) 지역의 니코메디아에서 순교한 성 하드리아노를 로마에서 기념한다고 간단히 언급하였다. 성녀 나탈리아에 대해서 더는 언급하지 않았다. 교회 미술에서 성 하드리아노는 보통 고문과 처형 도구였던 모루를 들거나 옆에 둔 무장한 군인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래서 그는 군인들과 푸주한(정육점)의 수호성인으로 플랑드르(Flandre) 지방과 독일 및 프랑스 북부에서 큰 공경을 받는 대표적 군인 성인이었다. 그런데 교회 미술에서 그와 함께 등장하는 사자는 “로마 순교록” 3월 5일 목록에서 기념하는, 팔레스티나(Palestina) 지방 카이사레아(Caesarea)에서 사자에게 던져진 후 참수형으로 순교한 성 하드리아노와 혼동하며 생긴 표현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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