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녀 정정혜 엘리사벳(Elisabeth)은 학문으로도 유명하고 또 한국 천주교회 설립자 중 한 명으로 1801년의 신유박해 때 순교한 복자 정약종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의 딸이다. 성녀의 어머니는 유 체칠리아이며 최초의 신학생인 정하상 바오로(Paulus)가 그녀의 오빠이다. 이들은 모두 1839년 기해박해 때 순교하여 성인품에 올랐다. 집안 전체가 열심한 신앙인이었기 때문에 그녀는 일찍부터 성교회의 진리를 몸에 익히며 성장하였다. 이미 1801년 박해 때 아버지 정약종 아우구스티누스와 큰오빠인 복자 정철상 카롤루스(Carolus)가 순교하였다. 이때 정 엘리사벳도 어머니 유 체칠리아와 자기 오라버니들과 같이 붙잡혀 들어갔으나 조정에서 그들의 재산을 몰수한 후 부인과 어린 아이들은 놓아주었다. 그러나 살 길이 막연했던 그녀의 어머니는 마재에 살던 시동생 정약용 요한의 집으로 갔지만 그곳에서 친척들의 냉대와 구박을 받으며 몹시 궁핍하게 지냈다. 그래서 정 엘리사벳은 어머니가 당하는 수많은 슬픔을 함께 나누며 살았다. 그녀는 이러한 시련 속에서도 신앙을 지켜 나갔고, 가난과 추위와 굶주림을 이겨나가는 데 익숙할 정도였다. 또한 바느질과 길쌈으로 어머니와 장차 신자들의 일꾼이 될 오빠 정하상 바오로의 뒷바라지를 하였다. 처음에는 천주교가 집안을 망쳐 놓았다 하여 적대시하던 몇몇 친척들도 그녀의 아름다운 모범과 덕에 감화되어 천주교에 입교하였다. 어려서부터 주님께 동정을 허원하였던 그녀는 언제나 단정하게 지냈지만, 30세쯤에 이르러서는 마음이 약해져 5년 이상이나 강한 유혹을 당하였다. 그녀는 이 유혹을 이기기 위해 기도와 단식과 편태를 사용하였는데, 마침내 그녀의 눈물은 완전한 승리를 얻을 수 있었다. 또한 선교사 신부들이 조선에 오기를 절실히 원하여 전심으로 그 뜻을 주님께 청하였다. 그리하여 앵베르(Imbert, 范世亨) 주교와 두 명의 신부가 입국하자 그들을 자기 집에 모시고 주밀하게 보살펴 드림으로써 하느님께 감사의 뜻을 표하였다. 앵베르 범 주교는 “엘리사벳은 참으로 여회장의 일을 볼만하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신앙과 신심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박해가 일어남을 보고 무서움을 감추지 못하였으니, “내게는 과연 짐이 될까봐 무섭다”고 했던 것이다. 박해의 조짐을 알고 주교가 서울을 떠나 시골로 피신해 있는 동안 정 엘리사벳과 어머니 그리고 정 바오로는 옥에 갇힌 이들을 보살펴 주다가 결국 그녀도 관헌에게 붙잡혔다. 그녀는 7회의 혹독한 고문과 곤장을 320대나 맞았다. 그러나 엘리사벳은 잠시도 평온을 잃지 않았고 관원은 그를 이길 희망을 버리고 10월 2일 형조로 보냈다. 형조에서 다시 6회의 심문과 고문을 당한 후 사형선고를 받았다. 엘리사벳은 형장으로 떠나면서도 신자들에게 “무엇보다 가난한 사람들과 고통 받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 많이 해 주세요.”라는 말밖에 하지 않았다. 그녀는 마침내 1839년 12월 29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43세를 일기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여 동정 순교자의 월계관을 얻었다. 그녀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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