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마리 니콜라 앙토안 다블뤼(Marie Nicolas Antoine Daveluy, 안 안토니오 또는 다블뤼 안토니오) 주교의 세례명은 안토니오(Antonius)이고, 한국명은 안돈이(安敦伊)이다. 그는 1818년 3월 16일 프랑스 북부 아미앵(Amiens)의 상류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형제 둘도 성직의 길을 걸을 만큼 신앙적으로도 모범적인 가정이었다. 성 다블뤼 안토니오 또한 어려서부터 사제직에 뜻을 두어 소신학교를 졸업한 뒤, 1834년 10월 파리(Paris) 교외의 이시(Issy) 신학교에서 입학하여 2년 동안 철학을 공부하였다. 이어 1836년 10월 파리의 생 쉴피스(Saint Sulpice) 신학교에 진학하여 5년 동안 신학을 배운 다음 1841년 12월 18일 사제품을 받았다. 사제 수품 후 아미앵 교외에 있는 르와(Roye) 본당의 보좌신부로 20개월 동안 사목하다가 신학생 때부터 마음속에 품고 있던 전교 신부로서의 뜻을 펼치기 위해 1843년 10월 4일 파리 외방 전교회에 입회하였다. 그리고 이듬해인 1844년에 극동 선교사로 임명되어, 2월 20일 브레스트(Brest) 항구를 출발해 8월 24일 파리 외방 전교회의 마카오 대표부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1845년 7월에 마침 마카오 대표부를 방문한 페레올(Ferreol, 高) 주교를 만났다. 페레올 주교는 제3대 조선 교구장으로 임명되어 조선으로의 입국을 시도하고 있었는데, 성 다블뤼 안토니오 신부는 그의 간청을 받아들여 조선 선교를 지원하게 되었다. 성 다블뤼 안토니오 신부는 페레올 주교와 함께 조선에 입국하기 위해 1845년 8월 초에 상해로 갔고, 8월 17일에 금가항(金家巷) 성당에서 거행된 성 김대건 안드레아(金大建, Andreas) 부제의 사제 서품식에 참석하였다. 그리고 8월 24일 상해에서 30리 떨어진 횡당(橫塘) 소신학교에서 첫 미사를 집전하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를 보좌했다. 그는 이렇게 해서 자기가 갈 선교지인 조선의 첫 사제인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와의 감동적인 만남을 가졌다. 그러고 나서 8월 31일 성 다블뤼 안토니오 신부는 페레올 주교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등과 함께 ‘라파엘호’로 명명된 작은 목선을 타고 상해에서 출발해 풍랑을 만나 제주도 용수리 포구에 표착하는 등 어려운 항해 끝에 10월 12일 저녁 8시경 충청남도 논산시 강경읍 부근 황산포(黃山浦) 또는 인접한 전라북도 익산시 망성면 화산리 나바위의 후미진 장소에 상륙하였다. 이때부터 성 다블뤼 안토니오는 1866년 3월 30일 순교할 때까지 21년 동안 당시 조선에서 가장 오랫동안 활동한 선교사가 되었고, 아울러 조선의 언어와 풍습에도 능통하게 되었다. 조선에 입국한 이튿날 그는 페레올 주교의 명에 따라 교우촌 공동으로 가서 조선말을 배우는 한편 1846년 1월부터 공동 주변 신자들에게 성사를 주며 전교 활동을 시작했고, 점점 더 먼 곳에 있는 신자들을 방문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1846년 9월 16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새남터에서 순교하자 박해를 피해 이곳저곳으로 피신하며 큰 고초를 겪었다. 이때 여러 곳을 옮겨가며 습기 차고 불결한 방에 숨어 살면서 오른쪽 무릎 인대가 늘어나 평생 걷는 데 불편을 감내해야 했고 건강도 많이 나빠졌다. 수리치골(현 충청남도 공주시 신풍면 봉갑리) 교우촌에 도착한 뒤에는 몇몇 신자들을 모아 신심 단체인 ‘성모 성심회’를 조직하기도 했다. 1848년 박해가 좀 잠잠해지자 건강은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전교 활동을 시작했고, 1850년 1월에는 병이 너무 위중해져 사제품을 받고 갓 입국한 최양업 토마스(崔良業, Thomas) 신부에게 병자성사를 받기도 했다. 그러자 페레올 주교는 성 다블뤼 안토니오 신부에게 건강을 회복될 때까지 전교 활동을 금하고, 그동안 신학생들을 지도하도록 했다. 그러던 중 그는 1857년 3월 25일 서울에서 제4대 조선 교구장이 된 성 베르뇌 시메온(Berneux Simeon) 주교로부터 승계권을 가진 보좌주교로 서품되었다. 한편 그는 신학생들을 지도하면서도 틈틈이 교우들이 손쉽게 볼 수 있는 신심 서적 및 교리서를 번역 저술하기도 했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성교 요리 문답”(聖敎要理問答), “천주 성교 예규”(天主聖敎禮規), “천당직로”(天堂直路) 등의 번역서라든가, “신명초행”(神命初行), “회죄직지”(悔罪直指), “영세대의”(領洗大義), “성찰기략”(省察記略) 등의 저서들은 모두 그의 노력에 의한 것들이다. 1856년부터 그는 조선 교회사와 조선 순교사 사료를 본격적으로 수집하기 시작했고, 푸르티에(Pourthie, 申) 신부 등이 해오던 사전 편찬 작업도 이어받았다. 이 사전은 1866년 병인박해(丙寅迫害) 이후 보완 작업을 거쳐 1891년 홍콩에서 “나선소사전”(羅鮮小辭典)이란 이름으로 간행되었다. 특별히 조선 교회사와 순교사의 정리는 그의 두드러진 업적에 속한다. 그는 조선 교회사 편찬을 위한 비망기와 조선 순교사에 대한 비망기를 저술하여 모두 1862년 파리 외방 전교회 교장 신부에게 보냄으로써 후대에 귀중한 사료를 남겼다. 나중에 달레(Dallet) 신부는 이 “다블뤼 비망기”를 바탕으로 해서 1874년 “한국 천주교회사”를 편찬 · 간행하였다. 1863년 내포 지방에 있는 주교 댁이 이웃집 화재로 소실되면서 비망기 관련 모든 자료 또한 불타버렸기 때문에 파리로 보낸 비망기는 더욱 소중한 사료가 되었다. 성 다블뤼 안토니오 주교는 1861년 6월 15일, 조선의 두 번째 사제로 12년 동안 헌신적으로 전교 활동을 펼치던 최양업 토마스 신부가 선종하자 그가 활동하던 경상도 남부 지역을 맡아 사목하게 되었다. 1865년부터는 내포 지방에서 전교 활동을 시작했는데, 1866년 초 시작된 병인박해가 더욱 심해지고 급기야는 2월 23일에 성 베르뇌 시메온 교구장 주교가 붙잡혀 3월 7일 새남터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는 일이 일어났다. 그래서 승계권을 가진 보좌주교였던 성 다블뤼 안토니오는 교구장직을 계승하여 제5대 조선 교구장이 되었다. 하지만 그의 교구장 재임 기간은 겨우 23일에 불과했다. 성 베르뇌 시메온 주교가 순교하고 4일 뒤인 3월 11일, 그는 거더리(현 충청남도 예산군 고덕면 상궁리)에서 체포되었고, 이튿날 당시 조선에서 전교 활동 중이던 성 위앵 루카(Huin Lucas) 신부와 성 오매트르 베드로(Aumaitre Petrus) 신부가 신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자수하여 그들과 함께 서울로 압송되었다. 서울 의금부에 갇힌 성 다블뤼 안토니오 주교는 신문과 심한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오히려 천주교에 대한 훌륭한 호교론을 펴기도 했다. 결국 그는 군문효수의 사형선고를 받고 함께 체포된 두 신부와 성 황석두 루카(黃錫斗, Lucas)와 성 장주기 요셉(張周基, Josephus)과 함께 처형을 위해 충청남도 보령 수영(保寧水營)으로 이송되었다. 그들은 죄수복을 입고 고문으로 상한 다리를 질질 끌면서 죽음의 행진을 하던 도중, 처형 예정 날짜인 3월 30일(그해의 주님 수난 성금요일)에서 처형일이 다소 연기될 기미가 있음을 알고 주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신 “성금요일에 죽게 해 달라”고 간곡히 부탁하였다. 결국 성 다블뤼 안토니오 주교의 소원대로 1866년 3월 30일, 주님 수난 성금요일에 갈매못(현 충청남도 보령시 오천면 영보리)에서 사형이 집행되었다. 처형이 시작되자 맨 먼저 성 다블뤼 안토니오 주교가 칼을 받았다. 이때 희광이들이 성 다블뤼 안토니오 주교의 목을 칼로 한 번 내리친 다음 그대로 버려둔 채 처형의 품삯을 흥정하기 위해 한참 동안 꾸물거리다가 흥정이 결정되자 다시 두 번째 칼을 내리쳤다고 한다. 당시 그의 나이는 48세였다. 성 다블뤼 안토니오 주교를 포함해 갈매못에서 순교한 5위의 순교자 중에서 성 황석두 루카의 시신은 가족들이 거두어 홍산 삽티(현 충청남도 부여군 홍산면 상천리)를 거쳐 고향인 연풍 병방골(충청북도 괴산군 장연면 방곡리)에 이장했고, 1982년 연풍 순교성지로 천묘(遷墓)하였다. 나머지 4위 순교자들의 시신은 사흘 뒤에 신자들에 의해 거두어져 형장 부근에 묻혔다가 6월 초 몇몇 신자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모셔와 서짓골(충남 보령시 미산면 평라리)에 매장하였다. 그 후 1882년 3월 제7대 조선 교구장인 블랑(Blanc, 白) 주교의 지시로 발굴되어 일본 나가사키(長崎) 대교구의 오우라 성당으로 옮겨졌다가 12년 만인 1894년 5월 다시 조선으로 돌아와 1900년부터 명동 성당에 안치되었다. 그리고 시복식을 앞둔 1967년 절두산 순교성지 내의 병인박해 100주년 기념성당 지하에 마련된 성인 유해실에 안치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성 다블뤼 안토니오 주교는 1968년 10월 6일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병인박해 순교자 24위’의 한 명으로 시복되었다. 그리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을 기념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103위 한국 순교성인’ 중 한 명으로 성인품에 올랐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3월 30일 목록에서 한국의 갈매못에서 성 다블뤼 안토니오 주교와 동료들이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때문에 참수형을 당해 순교했다고 기록하였다. 그의 축일은 9월 20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에 함께 경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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