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조신철 카롤루스(Carolus, 또는 가롤로)는 강원도 회양에 살던 외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다섯 살 때에 모친을 잃고, 얼마 안 되는 재산마저 부친이 탕진하자 그는 하는 수 없이 집을 떠나 절에 들어가 몇 해를 지냈다. 그 후 절에서 내려와 이집 저집 다니며 머슴살이를 하다가, 나이 23세 때에 북경을 왕래하는 사신의 하인으로 들어갔다. 정직하고 용감했던 그는 사신의 종복 중에서 가장 훌륭하다는 칭찬을 듣게 되었고, 여러 번 북경을 왕래하는 동안 모은 돈으로 아버지와 형제들을 먹여 살렸다고 한다. 이 때 사신을 따라다니던 유진길과 정하상이 그의 착실함을 보고 장차 조선 교회의 큰 일꾼으로 만들고자 하는 생각에서 그를 입교시켰다. 얼마 후 그는 유진길과 함께 북경으로 가서 신부들을 만나보고 성세와 견진과 성체성사를 받는 즐거움을 맛보았다. 조선에 돌아온 그는 기쁨 중에 겸손과 인내와 주님께 대한 사랑으로 생활하였고, 애긍시사로 새 신자들을 도왔으며, 아내를 권유하여 입교시켰으나 불행히도 아내가 세상을 떠났다. 조 카롤루스는 열심한 신자와 재혼하여 살았는데 그 부인이 곧 최영이 바르바라(Barbara)이다. 비록 그는 비천한 지위에 있으면서도 조선 천주교회를 위해 많은 공헌을 하였다. 그의 도움으로 성직자들이 입국하여 복음을 전파할 수 있게 되었고, 특히 조선말을 잘 모르던 모방(Manbant, 羅) 신부의 통역관이 되어 지방 전교 사업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1839년 봄 북경에서 귀국하던 어느 날 꿈에서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았는데, “금년에는 순교하는 은혜를 너에게 주노라”하시는 말씀을 두 번이나 하셨다고 한다. 서울에 돌아와 보니 과연 박해가 시작되었다. 그 해 7월 어느 날 조 카롤루스가 외출한 사이에 포교들이 가족들을 잡아가고 말았다. 마침 집으로 돌아온 카롤루스는 곧 그들의 뒤를 따라 포도청으로 달려가서 스스로 잡혀온 사람들의 가장이라고 말하여 고문을 받게 되었다. 포장이 그의 집에서 압수한 종교서적과 묵주, 성패의 유래를 물으니 카롤루스는 자신이 북경에서 구하여 온 것이라고 대답하였을 뿐 그 밖의 물음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었다. 이에 형리들은 그의 팔과 다리를 묶어서 대들보에 매달고 닥치는 대로 매질을 하였으나 역시 별다른 말을 듣지 못하였다. 앵베르(Imbert, 范世亨) 주교, 모방 신부와 샤스탕(Chastan, 鄭) 신부가 잡히자, 조 카롤루스는 이들과 함께 의금부로 보내져서 3일간의 고문과 매질을 받고 드디어 사형선고를 받게 되었다. 그는 형장으로 싣고 갈 수레를 타기 전에 옥리에게 말하기를, “나는 천국으로 먼저 가서 기다릴 터이니 모두 용기를 내서 따라오도록 하라고 나의 가족들에게 전하여 주시오” 하며 희색이 만면하여 출발하였고, 가는 도중에도 기도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서소문 밖에 이르러 수레 위의 십자가로부터 풀려 내려질 때, 그는 많은 구경꾼들 속에 끼어 있던 외인 친척들이 슬퍼하는 것을 보고 미소로 인사를 한 후 1839년 9월 26일 44세의 나이로 참수형을 받고 치명하였다. 그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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