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명 ‘치장’으로도 불리던 성 최형 베드로(崔炯, Petrus)는 1814년 충청도 공주(公州)에서 스무 살에 천주교에 입교한 최인호 야고보(崔仁浩, Jacobus)와 황 안나(Anna)의 3남 1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4살(또는 8살) 때부터 형제들과 함께 부모에게 천주교 교리를 배웠다. 그의 형제 중 동생인 최방제 프란치스코 하비에르(崔方濟, Franciscus Xavier)는 1836년 성 김대건 안드레아(金大建, Andreas)와 최양업 토마스(崔良業, Thomas)와 함께 사제직을 준비하러 마카오 유학길에 올랐다가 이듬해 병으로 사망한 신학생이었다. 그의 누이는 결혼을 거부하고 평생 동정녀로 살다가 1856년경 선종하였다. 그리고 그의 형 최수 베드로(崔燧, Petrus)는 옥중에서 신앙을 증거하다가 1866년 병인박해(丙寅迫害) 때 절두산(양화진)에서 참수되어 순교하였다. 이렇듯 신심 깊은 가정에서 태어나 성장한 그는 어려서부터 한문을 배웠으나 집안 형편이 넉넉하지 못해 부모를 도와 농사일이나 수공업 등의 손일을 하며 가계를 도왔다. 1836년 1월에 입국한 성 모방 베드로(Maubant Petrus, 羅) 신부는 최방제를 신학생으로 선발했을 뿐 아니라 그의 형인 성 최형 베드로의 신심과 재능을 높이 평가해 복사(服事)로 선발하였다. 그때부터 그는 1839년 기해박해(己亥迫害)로 성 모방 베드로 신부가 순교할 때까지 2~3년간 그의 복사로 생활하며 전교에 힘썼다. 그리고 그 무렵인 1838년경(또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순교한 1946년경)에 여 데레사(혹은 김 데레사)와 혼인하였다. 기해박해의 여파가 이어지던 1840년 성 최형 베드로는 아버지와 여러 신자와 함께 체포되었다. 다행히 관청까지 끌려가지는 않고 중간에 돈만 갈취당한 채 풀려났다. 1845년 1월 유학길을 떠났던 성 김대건 안드레아 부제가 어렵게 입국하여 서울에 도착하자 그를 도와 조선 입국을 애타게 기다리던 페레올(Ferreol, 高) 주교와 성 다블뤼 안토니오(Daveluy Antonius, 安) 신부를 모셔오기 위해 배를 준비해 상해(上海)로 건너갔다. 그리고 그해 8월 17일 상해의 김가항(金家港) 성당에서 페레올 주교의 집전으로 조선교회의 첫 사제가 된 성 김대건 안드레아의 사제 서품식에 참석하였다. 그리고 제대로 된 사공 하나 없는 작은 목선 ‘라파엘호’를 타고 8월 31일 상해에서 출발해 풍랑을 만나 제주도 용수리 포구에 표착했다가 다시 배를 수리하여 10월 12일 밤 오늘날 전라북도 익산시 망성면 화산리 나바위의 후미진 장소 또는 충청남도 강경읍 황산마을 인근 포구에 무사히 도착하였다. 1846년 9월 16일 병오박해(丙午迫害)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순교한 뒤에 성 최형 베드로는 서울로 상경하여 순청동(巡廳洞, 오늘날 서울시 중구 순화동과 봉래동1가에 걸쳐 있던 마을)에 거주하며 생활하였다. 얼마간 성 다블뤼 안토니오 신부의 복사로 활동한 그는 남대문 밖에서 조그마한 가게를 경영하며(또는 목수 일을 하며) 어느 정도 부유하게 살았는데, 틈틈이 종교 서적을 베끼거나 묵주를 만들면서 외교인과 예비 교우들을 친절하게 맞아들였다. 1856년 3월 성 베르뇌 시메온(Berneux Simeon, 張) 주교가 입국한 뒤에는 여러 차례 주교를 방문해 교회 일을 도왔다. 성 베르뇌 시메온 주교는 교회 서적을 체계적으로 간행하기 위해 1861년(또는 1862년) 서울에 인쇄소를 세우고 그 책임자로 성 최형 베드로를 임명하였다. 그는 주교의 명대로 기꺼이 그 일을 맡아 여러 가지 어려움과 장애를 이겨 나가며 4년 동안 “성교일과”(聖敎日課)와 “성찰기략”(省察記略) 등의 교회 서적을 많이 간행하였다. 1863년 거처를 석정동(石井洞)으로 옮긴 그는 비록 회장은 아니었지만, 성 베르뇌 시메온 주교로부터 대세를 주는 권한을 받을 정도로 큰 신임을 받고 있었다. 1866년 2월 23일 성 베르뇌 시메온 주교가 체포되면서 많은 교회 서적이 적발되자 그는 사태가 위태롭게 전개됨을 알고 일단 몸을 피하였다. 하지만 이선이(李先伊)라는 밀고자가 포졸들에게 그의 집을 알려주었고, 포졸들이 그의 집에 들이닥쳤을 때 미처 피신하지 못한 그의 아내가 혹독한 문초를 받아 피와 살이 범벅이 되면서도 끝까지 남편의 피신처를 말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의 집에 살던 14살 된 하녀가 밤중에 몰래 집을 빠져나가는 것을 본 포졸들이 그녀를 붙잡아 다그치며 곤장을 쳐서 그가 숨어 있는 곳을 알아냈다. 마침내 포졸들은 3월 1일 성 최형 베드로를 체포하여 온몸에 석회를 뿌리고 주먹으로 마구 때린 다음 포도청으로 끌고 갔다. 그는 천주교를 신봉했다는 죄와 사악한 책을 출판했다는 죄 그리고 다른 신자들을 선동했다는 죄 등으로 사형선고를 받았다. 사형 선고문에는 “혹심한 곤장에도 굴하지 않고 쇠나 돌같이 고집이 세어 사교를 단념하지 않을 것을 맹세하였다. 또 진리를 고백하면서 사형 선고문에 직접 서명까지 하였다. 이에 국법을 따라 마땅히 사형에 처하노라.”라고 기록되어 있었다. 결국 그는 자신의 성실한 벗이자 함께 교회 서적을 출판하는 직무를 맡았던 성 전장운 요한(全長雲, Joannes)과 함께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이때가 1866년 3월 9일로 그의 나이는 53세였다. 얼마 후 교우들이 그의 시신을 장사지낼 수 있게 되었을 때 그의 어깨와 다리에 깊은 상처가 여럿 있었고 많은 뼈가 부서져 있는 것을 확인했다. 교우들은 이구동성으로 “모든 신앙 증거자 중에서 최형이 가장 혹독한 고문을 당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순교 후 성 최형 베드로의 시신은 왜고개(현 서울 용산구 한강로3가)에 매장되었다가 1909년 5월 28일 성 남종삼 요한(南鍾三, Joannes)의 유해와 함께 발굴되어 명동 주교관으로 옮겨졌다가 6월 17일 명동 성당 지하 묘소에 안치되었다. 그리고 1968년 시복식을 계기로 다시 절두산 순교성지 내의 병인박해 100주년 기념성당 지하에 마련된 성해실로 옮겨 안치하였다. 성 최형 베드로는 1968년 10월 6일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병인박해 순교자 24위’의 한 명으로 시복되었다. 그리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을 기념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103위 한국 순교성인’ 중 한 명으로 성인품에 올랐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3월 9일 목록에서 한국의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성 최형 베드로와 성 전장운 요한이 가족에게 세례를 베풀고 그리스도교 서적을 인쇄하다가 붙잡혀 혹독한 고문을 당하면서도 박해자들마저 감탄할 만큼 변함없는 믿음을 보여주었다고 기록하였다. 그의 축일은 9월 20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에 함께 경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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