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피에르 앙리 도리(Pierre Henri Dorie, 김 헨리코 또는 도리 헨리코) 신부의 세례명은 베드로(Petrus)이고, 한국 성은 김(金)이다. 그는 1839년 9월 23일 프랑스 중서부 뤼송(Lucon) 교구 내에 있는 생틸레르드탈몽(Saint-Hilaire-de-Talmont)이라는 작은 바닷가 마을에서 8남매 중 여섯째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염전과 농사일을 하며 생계를 이어가는 가난한 부부였다. 이 부부는 가난했지만 순박하면서도 신심이 깊었고 또 평화스럽게 가정을 꾸려갔기에 성 도리 헨리코(Dorie Henricus)는 건전하고 행복한 가정에서 성장할 수 있었다. 그곳 본당의 보좌신부가 그에게 관심을 두어 부모의 승낙을 얻은 뒤 신학교 입학을 추천하였다. 그래서 그는 1852년 10월 소신학교에 들어가 8년간 수학한 후 1860년 뤼송의 대신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리고 1862년 8월 23일 파리 외방 전교회 신학교에 다시 입학하였다. 그 과정에서 그의 건강 상태를 잘 알고 있던 부모나 본당신부는 극구 말렸었다. 하지만 그는 “어머님! 외국 선교를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은 저에게 있어 진실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저는 8년 동안이나 이 소명에 대하여 제 마음속에서 생각해 왔었습니다. 하느님이 저의 마음속에 말씀하셨으니, 저는 그분께 순명해야 합니다.”라고 말해 겨우 부모의 승낙을 받고, 1864년 5월 21일 동료인 성 랑페르 드 브르트니에르 유스토(Ranfer de Bretenieres Justus, 白) · 성 볼리외 루도비코(Beaulieu Ludovicus, 徐) 등과 함께 사제품을 받았다. 수품 후 즉시 조선 선교사로 임명된 성 도리 헨리코 신부는 함께 임명된 성 랑페르 드 브르트니에르 유스토 · 성 볼리외 루도비코 · 성 위앵 루카(Huin Lucas, 閔) 신부 등과 함께 1864년 7월 15일 파리(Paris)를 출발해 마르세유(Marseille)에서 상선을 타고 극동으로 향해 9월 중순 무렵 홍콩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다시 상해(上海)를 거쳐 11월에 요동(遼東)의 차쿠에 도착해 한문 공부를 하며 제4대 조선 대목구장인 성 베르뇌 시메온(Berneux Simeon, 張) 주교의 연락을 기다렸다. 이윽고 1865년 4월 17일 차쿠를 출발한 성 도리 헨리코 신부와 동료들은 백령도 인근에서 주교가 보낸 배로 갈아타고 5월 27일 충청도 내포(內浦) 지방에 상륙하여 마침내 조선 땅을 밟았다. 조선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경기도 용인(龍仁)의 손골[孫谷里]에서 조선말을 배우면서 그곳 교우들과 함께 지내며 서서히 전교 활동을 펼쳐나갔다. 그런데 1866년 초 병인박해(丙寅迫害)가 시작되었다는 소식과 함께 성 베르뇌 시메온 주교가 체포되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리고 며칠 뒤인 2월 27일 성 베르뇌 시메온 주교의 하인이었던 이선이(李先伊)의 밀고로 관헌들에게 체포되었다. 포졸들은 먼저 ‘하우고개’에 있던 성 볼리외 루도비코 신부를 체포한 후 산등성이 하나 너머에 있던 성 도리 헨리코 신부를 체포해서 서울로 압송하였다. 이렇게 해서 성 도리 헨리코 신부는 의금부 옥에서 성 베르뇌 시메온 주교와 동료 선교사인 성 랑페르 드 브르트니에르 유스토와 성 볼리외 루도비코를 신부를 만났다. 성 도리 헨리코 신부는 여러 날 문초와 심문을 받았다. 3월 5일 문초에서 관리들이 본국에 송환해 주겠다고 하자 그는 “이 나라에 머무는 동안 말을 배웠으니, 죽었으면 죽었지, 돌아가지 않겠다.”라고 강력한 의지를 표명하였다. 결국 군문효수(軍門梟首)의 사형선고를 받은 성 도리 헨리코 신부는 사형 집행일인 3월 7일 성 베르뇌 시메온 주교와 동료 신부들과 함께 새남터 형장으로 끌려갔다. 이 광경을 목격했던 한 교우는 “도리 신부는 눈을 내리뜨고 참된 기도를 드리는 모습이 순교자로서의 당당함을 보여 주었다”라고 증언하였다. 이날 성 도리 헨리코 신부는 맨 마지막으로 처형되었는데, 두 번째 내리치는 칼날 아래 순교의 영광을 천상 제단에 바쳤다. 이때 그의 나이 27세로 조선에 입국한 지 10개월도 되지 않았다. 이날 순교한 성 도리 헨리코 신부와 주교와 동료 신부들의 시신은 다른 순교자의 시신과 함께 형장에 방치되었다가 2개월 후인 5월 12일 박순지 요한(朴順之, Joannes) 등에 의해 발굴되어 새남터 인근에 잠시 묻혔다가 5월 27일 와서(瓦署, 왜고개, 서울 용산구 한강로3가)로 옮겨 안장되었다. 용감한 신자들이 순교자들의 시신을 정성껏 장례 지내고 와서에 모신 것이다. 그 뒤 이들 순교자의 유해는 1899년 10월 30일 용산 예수성심신학교로 이장되었고, 1900년 9월 5일 명동 성당 지하실로 옮겨졌다가 시복식을 앞둔 1967년 절두산 순교성지 내의 병인박해 100주년 기념성당 지하에 마련된 성인 유해실에 안치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성 도리 헨리코 신부는 1968년 10월 6일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병인박해 순교자 24위’의 한 명으로 시복되었다. 그리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을 기념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103위 한국 순교성인’ 중 한 명으로 성인품에 올랐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3월 7일 목록에서 한국의 새남터에서 파리 외방 전교회의 성 도리 헨리코 신부와 동료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한국에 왔다가 참수형을 당해 순교했다고 기록하였다. 그의 축일은 9월 20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에 함께 경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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