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스탄티노플 태생인 성 프로클루스(또는 프로클로)는 성 요한 크리소스토무스(Joannes Chrisostomus, 9월 13일)의 제자로서 독서직을 받았으나 이상하게도 성 요한 크리소스토무스의 반대자인 아티쿠스(Patriarch Atticus)로부터 부제품과 사제품을 받고 그의 비서가 되었다고 한다. 그 후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이던 아티쿠스가 죽은 뒤 그는 아티쿠스의 후임인 시신니우스(Sisinnius)로부터 키지쿠스(Cyzicus)의 주교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이미 수도자인 달마티우스(Dalmatius)를 주교로 선출한 그 도시 성직자와 주민들의 반대로 실제 부임하지는 못하고 콘스탄티노플에 머물면서 설교로 명성을 얻었다. 그 후 434년에 그는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가 되었다. 그 당시에는 네스토리우스(Nestorius) 이단과 기타 군소 이단들이 소용돌이치는 매우 혼란스런 시대였다. 그래서 그는 성 대 바실리우스(Basilius, 1월 2일)와 나지안주스(Nazianzus)의 성 그레고리우스(Gregorius, 1월 2일)의 교리를 따르도록 권함으로써 정통교리를 지켰다. 알렉산드리아(Alexandria)의 성 키릴루스(Cyrillus, 6월 27일)는 그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그는 신심이 충만하고, 정통교리의 세심한 옹호자이다." 훌륭한 설교가였던 성 프로클루스는 446년 7월 12일경에 숨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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