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홍병주 베드로(Petrus)와 성 홍영주 바오로(Paulus)는 형제지간이고, 매우 유명한 가문의 자손들이다. 1801년의 신유박해 때에 순교한 홍낙민 루카(Lucas)는 그들의 조부이고, 1840년 전주에서 참수당한 홍재영 프로타시우스는 그들의 삼촌이다. 그리고 아버지 홍빈영은 1801년의 지긋지긋한 난을 치르고 나서 충청도 내포평야에 있는 서산 고을 여사울이란 곳에 살고 있었다. 이 형제가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유산은 신앙과 견실한 학식뿐이었는데, 이들은 그것을 잘 이용하여 후일 천주교의 명성을 크게 높였다. 그들의 학덕과 모범적인 신자생활을 익히 알던 전교 신부들은 그들 형제를 지방의 회장으로 임명하니, 그들은 남을 가르치는 일과 약한 자를 격려하는 일과 병자를 간호하는 일 그리고 자선 사업에서 자신의 직분을 성실히 수행했다. 그러므로 모방(Manbant, 羅) 신부와 샤스탕(Chastan, 鄭) 신부도 교회의 여러 가지 증대한 일을 처리하게 했고, 또 그들은 기대에 맞게 잘 처리하여 교회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1839년의 기해박해가 시작되어 성직자들에게 은신처를 제공하면 목숨을 잃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들 형제는 선교사들을 용감하게 집에 모시고 접대하였으니, 이미 그들은 순교를 각오하고 준비하고 있었음이 분명하였다. 한편 조정의 앞잡이 노릇을 하던 김여상은 체포자 명단에 그들의 이름도 올려놓고 있다가 그해 9월에 홍 베드로와 바오로를 붙잡았다. 그러나 형제는 똑같이 순교자의 자손답게 하느님을 증거하고 다른 신자들을 고발하는 것을 거부하였다. 포장은 이들 형제의 배교를 단념하고 형조로 이송하였는데, 당시 형조판서 홍명주는 이들의 친척이었다. 그는 이들 형제 때문에 자신에게 무슨 해가 미칠까 두려워한 나머지 부하들에게 모든 수단을 다 써서 그들을 배교시키되 사형언도는 내리지 말라고 명하였다. 이에 그 부하들은 상관에게 잘 보일 생각으로 그들을 배교시키지 위해 모든 방법을 다 사용하였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쓸데없는 일이었으니, 이 형제는 끝까지 마음을 굽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는 입장이 되자 마침내 그들에 대한 사형 선고가 내려졌다. 형인 홍 베드로는 박종원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와 같이 참수되었고, 동생인 홍 바오로는 그 이튿날에 형을 따라 당고개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이는 그 당시 법에서 형제를 같은 날 죽이지 못하게 되어 있었기 때문에 따로따로 형을 집행했기 때문이었다. 이때 형은 42세의 나이로 1840년 1월 31일에 순교하였으며, 동생은 39세의 나이로 그 이튿날에 참수당하여 영광스런 월계관을 함께 받았다. 그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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