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례음악자료실

제목 성가대 역할에 관한 교회의 가르침(1)
작성자김종헌 쪽지 캡슐 작성일1999-03-26 조회수4,523 추천수4

                                  머리말

 

전례음악의 목적은 "하느님의 영광과 신자들의 聖化를 지향"(전례헌장 112항)하는 것이다. 따라서 "전례음악은 그 선율의 움직임과 음악 고유의 힘을 통해서 신자 일동의 기도를 보다 생생하고 열정적인 것으로 만들어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 신자들이 보다 힘있게, 보다 열심히 또 보다 효과적으로 찬미와 기도를 바칠 수 있게"(비오 12세의 성음악의 원리, 28-29조, 1955. 12.25 발표)함으로써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신자들의 성화를 꾀하게 한다. 이렇게 전례음악을 포함한 전례 式典은 거룩한 천상 예루살렘 도읍에서의 전례를 신자들에게 미리 맛보게 한다. 이런 전례를 위하여 전례 봉사자들이(주례자, 조례자, 독서자, 해설자, 성가대, 성체 분배자, 안내자 등등) 자신들의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고, 하느님의  백성인 신자들 역시 전례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성가를 부르며 전례에 참여하게 된다면 전례의식은 더욱 숭고한 형태를 갖추게 되는 것이다. 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의 성가대는 전례 안에서 음악을 통해 신자 모두를 결합시키는 임무를 가지고 있는 만큼 성가대 역시 전례 안에서 맡은 소임을 다하기 위해 최대한으로 노력하여야 함은 물론이다.

 

그러나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한국 교회 곳곳에서 성가대의 해산이라는 기현상이 일어났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가르침인 '신자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잘 못 이해한 우리는 성가대 없이 전 신자가 개창하는 것만이 이를 실현시키는 것이라 생각하여 한국 교회 200년 역사 안에서 한번도 제대로 꽃 피워보지 못했던, 한국 가톨릭 교회 음악의 명맥을 그나마 간신이 이어오던 성가대를 해체시키기에 이르렀다. 이는 근본적으로 교회의 가르침과 반대되는 것이다. 전례 헌장 114항이나 1967년 3월 5일에 발표된 성음악에 관한 훈령 19항은 "성가대의 역할은 보다 중요하게 되었고 그 책임이 무거워졌다." 고 가르치고 있다.  공의회는 성가대의 역할이 공의회 이전보다 더욱 중요하다고 가르치고 있는데 반해  공의회에서 발표된 전례 헌장이나 훈령을 받은 한국 교회는 많은 성가대를 해체시켜 버렸으니 이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물론 훈령이 나오기 전의 외국 교회 모습도 한 때는 이와 비슷하였었다.

 

진실로 전례가 "교회 활동이 지향하는 정점이며 모든 힘이 흘러나오는 원천"(전례헌장, 10항)이 되기 위해서는 "전례의 필요 불가결한 구성 요소인"(전례헌장, 112항) 음악을 제외시킬 수 없다. 그렇다면 신자들에게 음악을 지도하고 그들의 노래를 도와줌으로써, 신자들로 하여금 전례 중에 보다 쉽게 기도하고, 보다 의식적으로 참여하도록 돕는 성가대 역시 제외시킬 수 없음은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이 글에서는 로마 교회 안에서 성가대가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를 간단히 살펴보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성가대에 대해 가르치는 바를 전례헌장과 1967년의 성음악 훈령을 통해 살펴봄으로써 "성교회의 귀중한 음악적 유산"을 보존, 발전시키는 성가대의 역할과 자리 매김을 시도하고자 한다.

 

 

                            간략한 성가대 변천사

 

성가대의 기원은 교회음악의 기원과 같으며, 그 기원은 구약성서 안에서 발견된다.(집회 17, 6-10; 레위 23, 23-25 참조) 유대인들의 생활에서 음악은 특별한 중요성을 가지고 있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안식일을 지키는 것과 마찬가지로 전례 안에서 음악을 사용하도록 그들에게 요구하셨기 때문이었다.(레위 23, 23-25 참조)

 

다윗 시대에 이르면, 그의 지도로 전례음악이 나름대로 완성되고 전례 안에서 성가의 위치가 매우 향상된다. 다윗은 전례를 위해 4천명으로 구성된 성가대를 조직하였으며(1 역대 23, 3-5; 6, 16 참조), 그들에게 특별한 대우를 해주었다.(1 역대 15, 27-29 참조)

 

교회음악이 구약시대에 이미 하느님의 명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면 그것은 율법의 일부가 된다. 따라서 "율법을 폐하러 오지 않고 오직 완성하러 오신"(마태 5, 17) 예수의 뜻대로 교회 음악 역시 율법 전체의 완성과 함께 완성되어야 할 대상인 것이다. 실상 예수께서도 당신 생애의 극적인 순간마다 율법에 정해진 시편을 충실히 노래하셨다. (루가 2, 41-42, 4, 17;   마태 11, 29; 마르 14, 36 참조)

 

초대 교회에서는 유대교의 회당 음악을 그대로 사용하였다.(사도 5, 12; 5,20, 5, 24 참조) 신약에서 음악의 위치는 구약의 그것만큼 중요하게 여겨지지는 않았지만 엄연히 존재했으며, 사도들은 예수께서 기도에 대해서 특히 성가에 대하여 가르쳐주신 것을 그대로 따랐으며 (사도 2, 46-47), 전례의식 안에서 성가에 중점을 두는 데에 크게 공헌하였다.

이렇게 초대 교회에서는 모든 신자들이 다 함께 성가를 부르는 것이 일치의 특별한 표시로 간주되었었다. 아침, 저녁에 -특별히 주일에- 모든 신자들이 함께 모여서 찬미와 환호로써 그들 공통의 신앙을 '한 소리'(Una Voce)로 노래했던 것이다. 참석한 모든 신자를 하나로 일치시키는 힘을 지닌 전체 회중의 노래에 대한 깊은 애착에도 불구하고, 4세기말에 여성 성가대와 소년 성가대가 등장하게 된다. 많은 개종자들을 확보하려는 몇몇 이단자들의 야심으로 태어난 여성 성가대는 겨우 명맥을 유지한 정도에 불과했던 데 반해, 소년 성가대는 계속 성장해 갔다. 동, 서방 교회의 증언에서 미사 때 Kyrie eleison을 노래한 소년 합창단의 활동을 많이 엿볼 수 있다.

 

신앙의 자유를 허락 받은(313년) 교회는 전례적으로나 음악적으로 큰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화려하고 장엄한 예식을 집전하기 위해서는 특별한 음악교육을 받은 성가대가 필요하게 되었고  성가 대원들의 교육은 로마의 성가학교(Schola Cantorum)에서 이루어졌다. 이 성가학교를 그레고리오 1세(Gregorio I) 교황(재위 590-604) 혹은 비탈리아노(Vitaliano) 교황(재위 657-672)이 설립하였다는 두 가지 설이 있으나, 그 최종 구성은 7세기 말에 이루어졌다고 음악가들은 본다. 이 성가학교에는 4명의 차부제가 있었는데, 네 번째 위치의 차부제, 즉 제 4 Precentor는 Archicantor(수석 가수)이라 하여 성직자들, 복사들, 성가학교 학생들에게 음악을 가르치는 교사의 역할을 맡았었다.  또 그들은 로마 교회 음악의 사도로서 성가보급을 위해 해외로 파견되기도 했었다.

 

성가학교 학생들은 교황의 미사 중에 시편 등을 노래하였는데 그들은  전문적인 음악교육을 받았던 만큼, 그들의 노래는 상당히 예술적이었다. 그러나 교황 미사에서 그들만이 따로 노래를 부르기는 했으나 그때까지도 미사의 통상부분(Ordinarium Missae) 만큼은 신자 모두에 의해 제창되었다는 증거가 많이 남아 있다. 이곳 출신 교사들은 서유럽으로 나가     Metz나 Chartres 그리고 Soisson 같은 도시에 새로운 성가학교를 세웠다.

 

이러한 성가학교에서 교육을 많이 받은 젊은이들이 나중에 성직자나 수도자가 되어 교회음악에 이바지하게 된다. 그러나 이때부터 음악 기보법이 나타나 차츰 사용되었기 때문에 그때까지 口頭傳承으로 내려오던 성가에 대한 애착심과 열정이 서서히 식어지게 되고 결과적으로는 성가학교의 쇠퇴를 가져오는 큰 원인이 되고 만다.

 

이미 7세기 후반에, 모든 신자들에 의해 불려지던 Sanctus가 성가학교의 차부제에 의해 독창으로 불리어지게 되고, 중세기에는 주교가 부르던 여러 가지 노래도 옆에서 조례하던 다른 성직자들이 부르게 되었다.

 

15세기부터는 미사통상문의 노래, 즉 Kyrie, Gloria, Credo, Sanctus, Agnus Dei가

한 벌로 묶여 다성 음악으로 작곡되기 시작하였다. 원래 회중의 노래였던 미사통상문의 노래마저 점점 성가대에 의해 불려지기에 이르렀다. 여기에는 전례를 보다 아름답게 꾸미고자 하는 욕구와 처음으로 등장한 다악장의 미사곡 형식을 모든 음악가들이 작곡하고자 하였던 노력의 결과라고 볼 수 있겠다. 일반 신자들은 라틴어를 몰랐고 곡의 예술성만을 추구한 나머지 전문 음악인이 아닌 신자들은 노래부를 능력이 없어 침묵을 지키기에 이르면서 모든 노래를 성가대에게 빼앗겨 버렸다.

 

이렇게 발전한 성가대는 20세기 초까지 자신들의 기능 내지는 일차적인 역할을 좋은 음악을 연주하여 전례를 더 풍요롭고 또 품위있게 만드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이상 간단히 살펴 본 성가대의 기원과 변천에 관한 역사에서 보아, 전례와 음악은 그 성질상 상호 보충하면서 원칙적으로 일치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20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서로 별개의 것으로 독립을 이루고 있었다. 전례나 성가, 두 가지 모두가 훌륭한 전통을 가지고 있었지만 더 이상 하나가 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를 깨달은 비오 10세는 전례음악이 전례의 가장 중요한 요소중 하나임을 깨닫고 전례 부흥을 위한 결정적 개혁을 시작했다.  (1903, Motu proprio, Tra le sollecitudine, 목자의 역할을 다 함에 있어서).

 

그 이후 전례 부흥 운동은 다만 "과거에 있었던 전례를 그대로 답습하고자 하지 않고, 오히려 전례 그 자체를 전면적으로 쇄신"하고자 하였고 전례헌장, 21항 참조) 그 쇄신의 일환으로  바티칸 공의회는 전례헌장 114항을 할애하여 성가대의 모든 것을 새롭게 밝혔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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