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무엇이 문제인가?
우선 무엇보다도 그동안 교회에서 전례음악를 조금 소홀히
다루지 않았나 생각해본다. 그간의 성음악보고에 대해 앞으로
도 유효하겠지라는 막연한 기대가 오늘날 교회음악의 피폐를
나았는지 모르겠다. 이것은 전례음악에서, 그리고 생활성가의
양자에 모두 적용되는 일일 것이다.
오늘날의 세계가 자본주의이다보니 소위 '돈'이란 것이 많
은 부분을 좌우하는데 그러다보니 교회에서도 음악을 하려면
어느정도 돈이 필요하다. 악기를 구입하고 악보를 정비하고
또 전공자들에게 사례를 하고... 하지만 정말로 서울의 큰 성
당 한두개 아니고는 이렇게 하는 곳이 드물다. 그래서 전공자
중에는 지원을 하는 개신교로 임시 전향(?)을 하는 사람도 있
다는데... 전례음악에 대한 투자가 이러하니 생활성가에 대한
투자도 역시 기대하기가 어렵다.
내 생각에 전례음악과 생활성가에 대해 투자를 지금보다 더
신경써서 한다면 무언가 달라지는 모습이 교회에서 나타나리라
본다. 전례음악도 잘되고 생활성가도 잘되고.
2. 전례음악과 생활성가는 어떻게 다른가?
한마디로 전례음악은 미사제사를 위한것이고 생활성가는 생활
에서의 기독교정신을 고취하기 위한 음악이다. 알다시피 현재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외부 환경은 상당히 험악하다. CCM이 맨
처음 나온 미국의 경우 훨씬 더 험악했다(당시의 메틀 연주자
들은 지금보다도 훨씬 격렬한 연주를 하였다). 그러다 보니 믿
는 이들 가운데 평소의 음악도 이렇듯 경건할 필요가 있지 않
겠는가라는 공감에서 가스펠이 나오게 된 것이다. 특히나 개신
교에서는 전례라 할 수 있는 예배시간 이외에 친교의 시간들이
많은 관계로 이러한 음악들이 자연스러이 자리 잡을 수 있었다.
천주교의 경우 미사외에 청년들이 어울리는 시간이 상대적으로
부족하기 때문에 굳이 미사시간에 이런 음악들을 쓰고자 하게
되는데 원칙은 전례에는 전례음악을 쓰고 생활과 친교의 시간
에는 생활성가를 쓰는 것이다(그러므로 문제가 있다면 CCM을
부를 친교시간이 부족하다는 것이고 이를 더 늘일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현재 성가집의 우려사항은 주지하는바와 같이 청년
성가집이 공인되게 되면 그것만 성당에 비치하게 되고 결국
전체 전례가 그것으로 채워지는 것이다(80년대 초반에 (구)
가톨릭 성가집과 공동체 성가책이 번갈아 사용된 시기가 있
었는데 여간 번거러운 것이 아니었다).
알다시피 우리나라의 민족성은 무언가 하나가 유행하게 되면
삽시간에 퍼지지 않는가(여성들의 화장처럼). 그러다 보면 전
통이고 뭐고 삽시간에 대치될 것이다. 하지만 공인은 받지 않
았지만 각 교회대로 특성을 살려 성가집을 만들고 이를 이용하
게 된다면 아무런 이상이 없을 것이다.
3. 나는 피가 끓는 젊은이다. 젊음은 자유요 무엇이든 가능하게
한다. 우리가 우리에 맞는 음악을 선택하는 것이 무엇이 잘못
인가?
한국교회는 밝다. 미래가 있기떄문이다. 이렇듯 피가 끓는 젊
은이들이 많은 교회는 세계적으로도 드물다. 그래서 한국교회는
희망적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세계적으로 유래가 없는 '청년성
가집'에 대해 왈가왈부하게 되는 것이 어쩌면 기쁜일이라 할 수
있다. 그만큼 청년들이 교회에 모여있다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한가지 생각할 것이 있다. 우리가 지금 누구를 믿고 있
는가? 하느님과 예수님. 하느님은 처음과 끝이 없는 분이라 언제
태어나셨는지 또 언제 돌아가실지 모르겠다^^ 하지만 예수님은
2000년전에 태어나셨다가 30여년을 사시고 돌아가신후 부활 승천
하셨다. 이 믿음을 누구나 신자 청년이라면 가지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가 이천년전 사람이라는 것이다. 지금부터 까마득한
이천년전. 그럼에도 우리는 하등의 문제제기 없이 그를 믿고 있다.
또한 우리사회에서 아직도 유교적 전통이 이어오고 있다. 그래서
명절때는 혈육을 보고 또 제사를 지낸다(현재 우리 사회에서 유교
가 문제되고 있지만 그것은 실제로 매너리즘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뿐인가? 예수님보다 먼저 살다간 플라톤의 '국가론'은 아직도
우리를 감동시킨다. 과연 그때나 지금이나 무엇이 바뀌었는가?
사람들의 생각, 내면의 본성은 바뀐것이 없다. 단지 물질을 다루
는 것이 세련되었을 따름이다. 오늘날은 그때에 비해 보다 세련되
게 창조의 업적을 더듬을 수 있다는 것이다.
가톨릭에서 소위 전통이라는 것을 존중하는 것도 이런 정신에 입
각하고 있다. 급진적인 젊은이들에게 전통이란 하나의 멍에요 굴레
요 속박이라 생각할 수 있겠다. 하지만 그것은 그렇지가 않다. 정
말로 문제는 그것에 대한 빌미로 새로운 것에 대한 제약일 것이다.
'온고'와 '지신'이 모두 중요한 이유가 이것이다. 온고만 있어도
안되고 지신만 있어도 안된다. 이 둘의 합리적인 부림이 중요하다.
내 생각에 현재 CCM과 기존 성음악간의 대립은 무언가 오해에서
비롯된다고 본다. CCM측은 아예 싹을 막는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은 정말로 오해다. 만약 실제로 그렇게 막는다면 평화방송에서
수많은 돈을 들여 CCM 창작성가제를 열지도 않을 것이요, 또한 청
년성가경연대회에서 CCM풍의 곡에 대상을 주지도 않을 것이다. 하
지만 현실은 어떤가? 상당히 지원이 있다. 하지만 그것은 급진적이
고 전위적인 것이 아닌 시나브로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만약 이
장르가 계속적으로 사람들의 인정을 받게 된다면 언젠가는 성가책
에 몇곡 소개될 날도 올것이다(실제로 개신교에서는 몇 곡이 소개
될 예정이란다).
덧붙여 전통성가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소수의 청년들에게도 배려
를 부탁한다. 누구나 자신만의 취향이 있듯이 폴리포니에 맛 길들
인 청년들은 오히려 전통을 상당히 옹호하게 된다. 그러나 특별히
배려된 길을 찾기가 힘들다. 현실적으로는 전통성가를 발굴, 보존,
육성 하는 측면의 지원이 더 결여되어 있다.
4. 새로운 성가책에서 문제는 무엇인가?
새로운 청년성가책이 공인을 받게 되면 그것은 전례용이라고 당
연히 받아들여지게 될텐데 그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다시 한번 미국의 예를 보자. 미국의 거의 모든 성당에는 두개의
성가대가 존재한다. 트레디셔널과 컨템포러리이다. 트레디셔널은
말그대로 전통적인 음악을 고수하는 측이고 컨템포러리는 미국 특
유의 CCM풍을 유지하는 측이다. 그런데 미국에서는 아무리 컨템포
러리라해도 전례문에 충실하다는 것이다. 화성이나 풍을 정식적으로
검증 받았음은 물론다. 만약 새로운 성가책이 기존의 전례문을 바탕
으로 작곡되어지고 그 화성진행이 어느정도 교회에 공감을 받는다면
공인에 대해 이렇게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또한 미국에는 각 성당마다 전례음악담당자가 있다. 이들은 음악을
전공했을뿐아니라 교회음악적인 교육도 받은 사람들이다. 그래서
우리나라와 같이 이러한 문제가 교회전체로 불거져 나오기 전에 우선
전례음악 담당자의 선에서 조율되는 것이다.
이상에서 무엇이 문제인지 대충 집어 보았다. 이상에서 알 수 있듯
이 한국 가톨릭 청년들의 노래활동을 막으려는 의지는 없다. 그들이
야말로 한국교회 미래의 희망이자 꿈나무다. 하지만 일단 교회라는
울타리 안에 있는 이상 좀 더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이번의
문제는 '하자', '하지말자'의 문제가 결코 아니고 '하되 가려하자'의
문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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