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례음악자료실

제목 [자료] 종교음악가 팔레스트리나
작성자성가정성가대 쪽지 캡슐 작성일2000-02-23 조회수3,040 추천수5

 

+ 주님의 평화

 

 

성가가족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가톨릭 종교음악의 아버지’라 불리는 팔레스트리나의 약력과 음악세계를 간략히 소개하는 글을 올립니다. 이 글은 <가톨릭대사전>과 인터넷 음악사이트들에 산재해있는 글들을 조합하여 만든 것입니다. 지금 흘러나오는 배경음악은 팔레스트리나의 "Sicut cervus(암사슴 같이)"를 우리말로 개사한 곡으로서 잠원동 "라우다떼성가대"의 성가발표회 연주실황입니다.

 

앞으로 바흐에 대해서도 소개하고 싶지만, 바흐에 관한 글은 바흐 사랑에 누구보다 앞서가는 김종우 빅토리노 형제님께서 올려주시기를 간절히 기대합니다.

 

목5동 성가정성가대 올림.

 


 

 

팔레스트리나 (Giovanni Pierluigi da Palestrina) (1525∼1594. 2. 2)

 

 

이탈리아의 가톨릭 교회음악 작곡가. 로마악파의 거두로서 ’가톨릭 전례음악의 아버지’라 불린다. 팔레스트리나 태생. 소년시절에는 고향 성당 성가대의 대원이었고 변성기 이후 고향에서 성가대장 겸 오르가니스트와 작곡가로서 점차 두각을 나타냈다. 1551년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당 내의 카펠라 율리아의 소년 성가대장으로 임명되었다. 1554년 교황 율리오 3세에게 미사곡집을 바친 것이 인연이 되어 이듬해 교황청 악부 성가대원으로 임명되었으나, 1555년 9월에 새로 부임한 교황 바오로 4세(재위:1555∼1559)가 그의 교회에서는 독신자만이 일할 수 있다는 규칙을 엄수할 것을 주장하였기 때문에 사퇴하게 되었다. 그러나 곧 라테란 성당 성가대장으로 취임, 1561년 산타마리아 마조레 성당의 성가대장이 되었다. 1571년 카펠라 율리아의 성가대장으로 다시 임명되는 동시에 ’교황청 악부 전속작곡가’라는 명예로운 칭호를 받았다. 1589년 상처를 하자, 이듬해 부유한 과부와 재혼, 그 재산으로 자기 작품을 속속 출판하였다. 1594년 그가 죽을 때까지 출판한 곡은 104개의 미사곡, 400개 이상의 모테트와 많은 봉헌송(Offiertorium), 마니피캇, 찬미가 등이 있다. 그가 늑막염으로 죽자 무덤이 성 베드로 대성당 내에 마련되었다. 그의 작품 스타일은, 초기의 것에는 네덜란드 악파적인 기교적 다성곡(多聲曲)이 많지만, 후기에 가까워지면서 그 기교는 간소화되고 동음음악적인 처리가 눈에 띄기 시작한다. 그러면서도 관능적인 반음계적 진행이나 자극적인 선율의 비약은 가급적 피하고, 불협화음마저 최소한도로 제한해서 종교적 청순성을 유지했으며, 곡보다도 가사에 생동감을 불어넣으려고 힘썼다. 이것은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에서 논의된 교회음악 본연의 자세에 합치되어 있고, 로마악파의 그의 후계자들에 의해서도 이 스타일은 계승되었다. <이상 ’가톨릭대사전’ 참조>

 

1577년 11월 교황 그레고리오 13세는 팔레스트리나와 쪼일로(Zoilo 1537-1592)에게 미사에 사용되는 음악을 모은 책인 [그라두알레]를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권고한 사항에 의거하여 다시 쓰는 임무를 부여하였다. 팔레스트리나는 이 작업에 착수하였으나 재정문제로 인하여 중단되었으므로 그의 사망할 때까지 완성하지는 못하였지만 이 작업은 다른 사람들에 의하여 계속되었다. 그 결과, 1614년에는 메디치 판 (Editio Medicaea) [그라두알레]가 출판되어 이 책에 수록된 음악이 1908년에 바티칸 판 (Editio Vaticana)이 나올 때까지 로마 가톨릭 미사음악으로 계속 사용되었다.

 

그의 작풍은 로마악파(Roman School)의 독자적인 색채감이 풍부한 음향효과를 융합시켰다. 따라서 가톨릭 정신에 적절한 작품을 썼고 민속음악에 이르기까지 명작을 남겼다. 104곡의 미사, 272곡의 모테트, 100곡의 찬미가, 35곡의 성모송, 67곡의 봉헌송 등 많은 작품을 작곡했다. 그의 작품 양식중의 하나는 아카펠라(a cappella)인 무반주의 합창곡이다. 그것은 종교적인 숭고함을 잘 나타냈으며 생생한 가락을 활용하여 힘과 열, 그리고 신앙에 충만한 음악을 창조해냈다. 그러나 당시 네델란드 악파의 대위법의 기교가 교회음악의 정신을 망각하고서 오히려 혼란하게 만들 우려가 있었으므로 1562년에 열릴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이를 없애려 했었다. 그 무렵, 그는 교황 비오4세의 추천으로 그가 작곡한 6성부 미사곡 ’교황 마르첼리 미사(Missa Papae Marcelli)’를 연주하여 큰 감동을 주기도 했다. 그리하여 대위법의 음악을 계속 교회에서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는 일화가 있다.

 

팔레스트리나 양식

 

팔레스트리나는 평생을 로마에서 카톨릭교회와 관련을 맺으며 살았다. 따라서 그의 음악에서도 그레고리오 성가처럼 로마 카톨릭교회의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배어 나온다. 특히 그의 종교음악은 보수적이고 객관적이며 심각하여 미사 통상문 가사에 아주 잘 맞아서 종교음악 양식의 최고 완성품이라고 일컬어진다. 그는 누구보다도 카톨릭 교회의 근엄하고 보수적인 정신을 잘 파악한 작곡가여서 다성 종교음악의 표본으로 <팔레스트리나 양식>을 꼽게 되었고 푹스(Johann Joseph Fux 1660-1741)를 비롯하여 최근까지 많은 이론가들은 대위법책에서 팔레스트리나 양식을 다루어 왔다. 사실 바흐 이전의 작곡가로는 팔레스트리나만큼 많이 알려지고 그 기법이 연구된 작곡가는 없을 것이다.

 

팔레스트리나의 음악양식은 그의 미사에서 잘 나타나는데 이들은 네덜란드의 모방대위법적인 양식에 기초를 둔 것으로 어떤 악장에서는 가사의 각 구절마다 새로운 동기가 도입되고 다른 성부에서 차례로 모방되는 <모방기점>이 사용되고 또 다른 악장에서는 모방적인 부분과 수직화성적인 부분이 교차되며 변화를 주기도 한다. 그는 도한 가사의 정확한 전달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다성적인 짜임새가 가사의 전달을 방해하지 않도록 하였다. 그는 당시 유행하던 반음계주의를 철저하게 회피하여 무지카 픽타 이외에는 반음계를 사용하지 않았으므로 그의 음악은 다른 작곡가의 음악보다 부드럽고 투명한 음향을 가지고 있다. 그의 선율선 또한 자주 3화음적인 진행을 보이고 베이스도 4도 도는 5도 도약이 많아서 조성적인 경향이 강하지만 그의 음악은 선법에 기초한 곡으로 조성적으로는 분석될 수는 없다.

 

팔레스트리나의 모테트

 

팔레스트리나의 모테트에서는 미사에서만큼 그의 탁월한 기량이 돋보이지 못한다고 말하는 학자들도 있으나 그의 모테트들도 음악적으로 아주 훌륭하며 폭넓은 기법과 감정의 변화를 잘 보여준다. 팔레스트리나의 400여개의 모테트중 2/3정도가 4-5성부이고 나머지 곡들은 8-12성부이다. 가사는 대부분 안티폰 또는 응답성가(Responsorium) 가사에 기초하였으나 선율은 거의 그가 작곡한 것이며 카논과 같은 어떤 구조적 방법에 의하여 곡을 구성하지도 않았다. 그는 순수한 음악적 설계에 의하거나 가사의 내용에 따라 자유롭게 작곡하였기 때문에 대부분 모방대위적인 기법으로 작곡되었다는 것 이상의 공통성은 찾아볼 수 없을 만큼 그의 모테트들은 각양각색이다. 비교적 초기에 속하는 그의 4성 모테트는 전통적인 성부진행과 음정구조, 서로 잘 융합되는 성부들, 그리고 세심하게 억제된 불협화음등 르네쌍스 다성음악의 표본이다.

 

팔레스트리나의 미사

 

팔레스트리나는 보수적이고 종교적인 작곡가여서 그의 미사의 80%를 그레고리오 성가 선율을 사용하여 작곡하였지만 그는 또한 그 당시에 사용되던 작곡기법을 모두 사용하여 여러 가지 유형의 미사를 작곡하였다. 현존하는 그의 미사 중 모테트를 인용하여 작곡한 모방미사(imitation Mass)가 53개인데 이 모테트들은 대부분 성가에 기초한 것들이다. 또한 성가나 세속선율을 변형하여 사용한 변용미사(paraphrased Mass)도 35개 있는데 그중 11개는 그레고리오 성가가 아닌 다른 평성가를 변용한 것이다.

 

팔레스트리나 양식

 

팔레스트리나의 양식은 네덜란드 다성음악 전통을 더욱 세련되게 만든 것으로 그와 그의 제자들의 음악은 17세기부터 19세기까지 유럽 곳곳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성스러운’ 음악으로 느껴지는 구양식(stile antico)의 표본으로 많은 종교음악 작곡가들의 모방대상이 되었다. 몬테베르디까지도 팔레스트리나의 음악은 순수 대위법적인 <제1작법>(prima prattica)으로 작곡되어 자신의 음악보다 교회에 더 잘 맞는다고 하였다. 그의 음악은 19세기와 20세기 초에 특히 강조된 가톨릭적 음악의 이상을 구현한 것으로 간주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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