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CCM동호회 대표시삽 최금활 이냐시오 형제님께 인사드립니다. 잠원동 라우다떼성가단의 이봉섭 바오로입니다. 지난번에 이어 계속 형제님 글을 읽으면서 대부분 공감하다가, 몇 가지 의문점이 있어서 이 글을 올립니다.
우선 해 주신 소개와 설명, 좋은 말씀들에 감사드립니다.
"대중음악을 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신앙을 표하고 노래에 그런 신앙의 모습을 담아 음반을 만들었다면 그 보다 더 아름다운 신앙인의 자세가 어디 있겠습니까. (1407번 글)"
정말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저도 세속에서 살아가는 저의 일을 통해서 또한 신앙을 담아 내고 나아가 주님을 증거할 수 있기를 가슴 깊이 바랍니다. 또한 자칫하면 주님을 잊기 쉬운 일상생활 안에서 주님을 찾고 생각할 수 있도록 이끌며 모든 삶의 성화로 나아가는 데 도움을 주는 것은, 좋은 생활성가가 해 줄 수 있는 참으로 복되고 고귀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한편으로는 글의 뒷부분에 가서 의문나는 점들도 있었습니다.
"솔직히 이곳에서 생활성가 심의제를 만들자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을 보고 쓴 웃음을 지을 수 밖에 없네요.....!! 혹시 그런 말씀을 하시는 분들중에 생활성가를 얼마나 알고 계시는지 묻고 싶습니다. (1407번)"
실제로 심의제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저도 포함되네요) 중 다수가 생활성가를 많이 알고 있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심의제를 제안 및 지지하시는 신부님들과 전문가들께서도 그분들이 전례음악에 대해 아시는 것만큼 생활성가에 대해 많이 아시지는 않으실 것 같습니다. 심의제를 제안하신(1338번글, 평화신문) 대구가톨릭음악원장 김종헌 신부님께서도 지난 겨울에 찾아뵈었을 때 보니 CCM과 가스펠 등에 관한 책들을 쌓아 놓고 공부하고 계시더군요. 여기에 대해서도 잘 알아야겠다고 하셨고요.
하지만 문제의 심의제란 실상 ’생활성가 심의제’가 아니고 ’전례성가 심의제’입니다. 정확히는 ’교회 음악 심의기구’의 설치 제안이라고 보도되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새롭게 선보이는 곡들이 ’전례에 적합하게 쓰일 수 있는지’를 심의하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연히 그 대상도 생활성가뿐 아니라 전통적 양식의 성가곡까지 포함하는(역시 1338번 기사 참조) 것입니다. 전례성가로 적합한지를 판단하는 데에는, 엄밀히 말해서 오직 전례와 전례음악에의 전문성이 필요한 것입니다. 물론 많이 알면 좋은 일이지만, 생활성가에 대해 많이 모른다고 해서 전례성가로서의 적합성 판단을 위한 심의제를 거론할 자격이 떨어지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혹시 전례 외에서의 생활성가 사용과 보급 자체에 대해 제어 또는 규제(?)하려는 움직임으로 생각하신 것은 아닌지 싶기도 했습니다. 실제의 내용은 기사에 나온 것처럼 심의를 통해 전례용과 묵상용 등등으로 그 ’용도 구분’을 해 주자는 것입니다.
* 사실 여기서 제 통찰력의 부족이 많이 드러납니다. 1375번 글에서 "이곳에서 생활성가의 미사전례 사용에 관한 부분이 토론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들어오셨다고 하셨으니 전례 적합성에 대한 문제임은 미리 아셨을 것 같고, 심의제는 마음에 들지 않으신 것 같고,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 문제라고 생각하시는지 정확히 모르겠고... 제가 형제님의 글에 담긴 진심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것인지 자신하지는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오해되고 있는 부분이 있으면 고쳐 주시면 좋겠습니다.
제 생각에는, 그 다음에 쓰신 말씀으로 보아 생활성가의 전례도입 문제는 각 본당에서 알아서 할 일이지 여기서 토론하거나 심의제를 도입하는 등의 일을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본당에서 생활성가를 미사때 사용하는 것은 본당 차원에 문제이지 우리가 이야기할 부분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교회가 현재 생활성가를 미사에 사용하라는 법을 만든적도 없으니까요. 그렇다고 지금 강력한 교회법을 만들어 생활성가를 미사에 사용치 못하게 할 수 있을까요. 그럴수 있다고 보시나요.. !! (1407번)"
"생활성가를 쓰건 안쓰건 그건 어차피 본당내에 문제입니다. 전 교회가 생활성가 미사를 할 수도 없는것이고 그렇게 하지 말라는 법을 만드는것도 (지금은 중세시대가 아니잖아오) 문제가 될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본당마다 자정능력이 생겨 CCM적인 생활성가와 전례적인 생활성가로 나뉘게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1375번)"
말씀하신 대로 생활성가를 쓰라는 법도 없으며, 쓰지 말라는 법을 따로 만들 이유나 필요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성교회의 훌륭한 가르침을 우리는 가지고 있습니다. 전례의 헌법인 ’거룩한 전례에 관한 헌장(2차바티칸공의회)’과 그 중 성음악에 대한 시행령인 ’거룩한 전례 안에서의 성음악에 관한 훈령(1967)’ 등은 성교회의 오랜 경험과 통찰 끝에 얻어진 진리로서 우리가 반드시 지켜야 할 것들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런 원칙들이 우리의 각 본당 내에서 제대로 인식되거나 지켜지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게시판에서 수없이 제기된 것처럼 이 문제가 매우 심각한 수준에 이르러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쓰건 안 쓰건 본당 내 문제"라고 생각하여 놓아두면서 각각의 자정능력을 기대하는 것은 어려운 상황이라는 것이 많은 사람들의 생각입니다.
저도 말씀하신 것처럼 본당의 자정능력이 충분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박해 속에 가톨릭이 전파된 우리나라에서 제대로 전례음악이 자리잡았던 바탕도 없고, 그래서 공동체가 바른 전례음악의 토양 속에서 자라지 못했으며, 교육을 통해 그만큼 전례음악의 성질에 대해 알게 된 것도 아닙니다. 원칙을 모르고 자정능력을 발휘하기란 무리일 것입니다. 그리고 자연에서도 정화 능력에 한계가 있으며, 더욱이 지금같이 산업이 발달한 시대에는 사람의 각별한 보호 노력 없이 자정능력만을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자정능력을 기다리다가 시간이 지나면 더 어려워질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이라도 원칙을 세우고 이끌어 주는 역할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이 게시판에서 이루어지는 논의 역시 그런 자정을 위한 노력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또 심의제는 자정능력이 발휘될 수 있도록 하는 ’각별한 노력’의 한 방안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심의제 자체가 목적이거나 새로운 원칙인 것이 아니며, 그것은 올바른 전례를 위한 방법이고 원칙의 해석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너무 이론적으로만 말씀들을 하셔서 답답한 마음에 몇자 다시 적어 봅니다." 라는 말씀으로 안타까운 마음을 표현하셨습니다. 어떤 마음이신지 제가 정확하게 이해한다고 자신할 수는 없겠지요... 생각하기로 쓸데없는 말을 한다고 생각하시는 건가 싶기도 하고, 청년들 불러모을 생각보다 현실과 떨어져서 이론을 따진다고 생각하시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고요... 원칙을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신앙의 길로 들지 못하거나 맛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안타까움, 함께 하고자 하는 열망을 잊어서는 정말 안됩니다. 더군다나 젊은이들은 교회의 미래이기에 이들을 향한 열망은 뜨거워야 합니다.
그와 동시에, 원칙을 잃어서는 안됩니다. 애써서 사람들을 교회로 불러 모았는데 거기에서 "교회 활동이 지향하는 정점이며, 모든 힘이 흘러 나오는 원천(전례 헌장 10)"인 전례의 원칙이 깨어져 있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의 원칙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이냐시오 형제님을 비롯한 여러 형제 자매님의 열정과, 사람들을 향한 애정을 저도 느끼고 있습니다. 또 아직 척박한 상황에서 생활성가를 가꾸고 계시며, 형제님의 경우 동호회 시삽으로서 많은 수고를 하고 계심에 멀리서나마 박수를 보냅니다. 그것은 참 중요한 역할, 교회 공동체를 위해 귀한 일을 하실 수 있는 역할입니다. 힘드신 부분도 많겠지만, 진지한 고민 속에 바른 길, 좋은 방법을 찾고 행하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혹시 제가 형제님의 뜻을 잘못 이해하고 있거나 잘못 말한 부분이 있으면 언짢아 마시고 지적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봉섭 바오로 드림.
p.s. 처음 쓸 때 깜빡 했네요. 올려주신 곡 잘 들었습니다. 마침 저도 즐겨 부르던 곡인데, 새롭습니다. 원곡은 미국 노래, 많이 가물가물하지만 혹시 ’솔티와 함께’라는 뮤지컬에 나오는 게 아닌가 싶은데 맞나요? 멋있고 재기 있게 편곡되었네요.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