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미사 전례(라칭거 추기경과의 대담) - 발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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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봉섭 | 작성일2002-05-11 | 조회수2,100 | 추천수4 | |
아래 글은 <사목> 지 4월호에 실린 요제프 라칭거 추기경(교황청 신앙교리성 장관이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과의 대담 내용의 일부입니다. 미사 전례에 대한 경외, 자체적인 조작의 문제, 그리고 라틴어 사용에 대한 언급이 담겨 있습니다. 라틴어에 대해서는 배격에 대한 우려와 함께, 한편으로 라틴어 미사 중에서도 말씀의 전례 부분은 자국어를 사용할 것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독서, 복음, 강론 등은 자국어로 하는 것이 자연스럽겠지요. 여기서도 라틴어 미사에 많이 참례할 수 있었는데, 역시 그 부분은 영어로 합니다.)
매달 이 대담 내용이 연재되고 있습니다. 아래 내용은 4월호 내용 중에서도 일부이므로, http://www.cbck.or.kr/publish/samok/s2002/04/god&world.htm 에서 전체를 보실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과 세상<14> -요제프 라칭거 추기경과의 대담-
페터 제발트/정 종 휴 옮김(전남대학교 교수/법학)
(전략)
오늘날의 전례에 대한 비판의 소리는 그냥 흘러들을 수 없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전례에 더 이상 거룩함이 충분할 만큼 깃들어 있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아주 많습니다. 이를 다시금 더욱더 거룩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개혁에 대한 또 하나의 개혁이 필요할까요?
적어도 미사 예식과 관련한 새로운 의식은 다시 필요할 것 같습니다. 그래야 이 조작적 정신이 사라질 듯싶습니다. 심지어는 주일 미사 진행자들이 나름대로 미사 전례를 주물럭거리게 될 정도에 이르기도 하였습니다. 여기서 제시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스스로 이런 저런 것들을 머리에서 짜낸 영리하고 능력 있는 몇몇 사람들의 생산품이지요. 그러니 내가 여기서 접하게 되는 것은 더 이상 내게 선물로 주어지는 전혀 다른 존재, 거룩한 존재가 아니라 몇몇 사람의 능력뿐입니다. 그러면 나는 그것이 내가 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게 되지요. 그것은 너무나도 보잘것없는 것이요 다른 어떤 것입니다. 오늘날 가장 중요한 일이라면 우리가 다시 미사 전례에 대한 그리고 조작될 수 없는 그 권위에 대한 외경심을 회복하는 일입니다. 미사 예식을 다시금 살아 성장하는 것, 하느님에게서 선물로 주어진 것으로 깨닫는 것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그 안에서 우리가 천국의 미사 의식에 참여하게 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리고 그 미사 의식 안에서 우리가 추구할 것이 자기의 실현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진 천분의 실현이라는 사실도 배워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내가 생각하기에 우선적인 일은 이러한 독자적인 재능이 있는 또는 자체적인 권세를 가진 조작이 다시 사라지고 거룩한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내적인 감각이 다시 일깨워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 두 번째 단계에 이르게 되면 어느 분야에서 이른바 너무 많은 부분이 잘려 나갔는지를 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서 전체 역사 속에서의 맥락이 다시금 뚜렷해지고 더욱더 생생해지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지요. 제가 개혁에 대한 또 다른 개혁을 언급했던 것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였습니다. 이야말로 사람이 멋대로 만들어 낸 것으로 미사 예식이 망가지는 것을 막는 교육 과정이 되어야만 한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미사 예식과 관련된 일에서 올바른 의식을 육성하는 데 중요한 것은 1970년까지 통용되어 오던 트리엔트 미사에 대한 공격을 그만두는 일입니다. 오늘날 트리엔트 미사 전례를 존속시키는 일에 열중하거나 그 일에 함께 참여하는 사람은 마치 나환자 같은 취급을 받고 있습니다. 거기서는 그 어떤 관용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역사를 통틀어 그와 같은 일은 결코 없었습니다. 그러한 경멸로 교회의 전체 과거까지 함께 멸시되는 것입니다. 일이 그렇다면 어떻게 그런 과거를 이은 현대를 믿을 수 있겠습니까? 솔직히 말해서 나로서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어째서 내 주변의 동료 주교들 가운데 이러한 불관용의 조류에 휩쓸려 들어간 이들이 그토록 많은지 말입니다. 이 조류야말로 어떤 뚜렷한 근거도 없이 교회 안에 꼭 필요한 내적 화해에 대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방금 말씀하신 그 두 번째 단계, 곧 개혁에 대한 또 다른 개혁이 언제쯤 현실로 나타날까요?
미사 의식과 관련된 움직임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까지 이어지면서 좀 늦게 자라는 것이었다가는 갑자기 급류를 타게 되었던 것처럼 여기서도 활발하게 믿는 사람들 그리고 미사 예식을 함께 하는 사람들에게서 어떤 자극이 발산되어 나오는 단계까지가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미사 예식이 정말로 올바로 치러지는 그런 모범적인 교회가 생겨나 사람들이 그러한 모범 사례를 있는 그대로 함께 체험할 수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 거기에서 어떤 운동이 그저 위에서 내려 보낸 것이 아니라 안에서부터 싹터 오르게 되면 그것이 바로 그때입니다. 그리고 새로운 세대들 사이에 이미 이 쪽 방향으로 움직이는 그런 기미가 감지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진정한 모습의 미사, 어떤 신적인 미사 전례, 신앙을 가진 백성과 교회의 미래를 위한 전례, 추기경님께서 생각하시기에 그런 전례는 어떤 모습일 수 있을까요?
근본적인 관점에서 보면 우리가 다시금 선물로 주어진 형식들을 받아들이고 내적으로 그 안에 들어가는 모습입니다. 미사 의식과 관련한 움직임이 있던 그 시대, 나 역시 함께 체험하기도 했던 그 시대들을 생각하면 사순 시기 미사가 어떻게 자라왔는지 배우고 사순 시기의 구조를 이해하는 것은 참으로 멋진 일이었습니다. 사순 시기의 구조는 미사 전례서의 전체 구조이며 그 이상의 무엇이죠. 우리에게 필요한 일이라면 한마디로, 성장하여 이루어진 이 풍요로움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요, 그와 더불어 그 안에 선물로 주어진 하느님의 거룩함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제 생각으로는 듣는 정신을 다시금 터득해 내는 것이 중요할 것 같습니다. “들어라, 내 아들이여.” 베네딕토 성인이 이렇게 말씀하셨죠. 그리고 또 중요한 일이라면 스스로 만들어 내는 조작자로서보다는 받아들이는 사람이고자 하는 것이겠습니다.
미사를 다시 라틴어로 봉송해야 할까요?
전반적으로 그것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은 일이고 또 어쩌면 그런 것을 바랄 일은 아닐 것 같습니다. 적어도 분명하게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말씀 전례는 참여하는 사람들의 모국어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라틴어에 대해 새로이 개방적인 태도를 갖는 것도 좋겠다는 것이 제 입장입니다. 미사에서 라틴어는 어느덧 마치 인류의 타락처럼 그렇게 여겨지게끔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라틴어 기피 때문에 민족과 언어가 뒤섞여 사는 지역에서는 필요한 의사 소통마저도 단절되고 말 것입니다. 이를테면 아비뇽의 어느 성당 주임 신부님이 저에게 들려준 이야기인데, 일요일에 갑자기 각기 다른 언어를 쓰는 세 그룹이 미사를 드리려고 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다 함께 라틴어로 된 경본을 가지고 기도하고 그런 다음에 다 함께 미사를 드리자고 제안을 했다는 거예요. 그러자 세 그룹 모두 퉁명스럽게 거절하면서, 각자 나름대로 고유한 것이 있어야 한다고 하더랍니다. 또는 어느 관광지를 생각해 보죠. 그런 곳에서 모든 사람들이 함께 모인 자리에서 스스로를 다시 찾아 깨닫는 것 역시 아름다운 일이라 생각됩니다. 말하자면 그런 아름다운 일들은 사라지는 일이 없도록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아무리 로마의 대 미사 전례라고 하더라도 아무도 더 이상 기리에나 상투스를 노래할 줄 모른다면, 글로리아가 뜻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무도 모른다면, 그것은 그대로 문화의 상실이요 서로를 묶어 주는 공통된 끈을 잃어버리는 일입니다. 그런 점에서 하느님 말씀의 전례는 어떤 경우라도 해당 모국어로 해야 하겠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우리를 서로 엮어 주는 라틴어의 기본적인 유산은 유지되어야 하겠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후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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