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례음악자료실

제목 성가 이야기: 대구대교구와 지역사회의 음악문화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2-03-23 조회수2,597 추천수0
[성가 이야기] 대구대교구와 지역사회의 음악문화


들어가는 말

지난 호에는 대구교구에서 발행한 성가집들을 살펴봄으로써, 우리 교구의 교회음악활동이 한국교회에 끼친 영향들을 살펴보았다. 초기의 대구 성가집들은 지금도 우리가 부르고 있는 프랑스의 많은 찬미가들을 한국교회에 소개해 주었으며, 한국교회 최초의 작곡가인 서정도 신부와 새로운 미사가 필요로 하는 ‘시편성가’를 만들어 한국교회에 널리 보급시킨 손상오 신부의 업적에 대해 언급하였다.

이제 우리는 대구교구의 음악활동이 대구 지역사회의 음악예술문화에 미친 영향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하지만 지면 관계로 일일이 살펴 볼 수는 없겠고, 중요한 교회음악 단체를 중심으로 엮어나가려 한다. 교구의 여러 음악단체들이 한국교회에서 혹은 대구지역에서 처음으로 창설되어 선도적인 역할을 하였고, 계속해서 지역 음악예술계에도 상당한 공헌을 한 것을 밝힐 수 있을 것이다.


대구지역사회 음악문화에 미친 대구 가톨릭음악의 영향

(1) 대구 지역 최초의 관악단 : 대구(명도회) 취주악단

1912년 초대 대구교구장이셨던 드망즈(플로리아노, 한국명 : 안세화) 주교님께서는 계산동성당 명도회 회원들이 모은 회비로 30인조의 관악기를 프랑스로부터 도입하셨고, 연주 단체인 대구(명도회) 취주악단을 결성하여 그 책임을 무세(제르만, 한국명 : 문제만) 신부에게 맡겼다. 이 악대가 대구지역 관악의 효시가 되었다. 그러다가 1942년에는 ‘천주교 악단’으로 이어진다. 무세 신부의 지도로 연습하던 악단은 1942년 6월 23일 계산동성당 미사 때에 권유랑 신부의 지휘로 첫 연주를 하였다. 이렇게 대구 사회에 처음 등장한 취주악단은 각종 교회행사는 물론 사회행사에도 참가하여 그 위용을 뽐내면서 황무지나 다름없었던 대구 지역에 근대음악을 보급하는 견인차 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일제 치하에서 고통 받던 지역민들에게 음악을 통해 위로와 힘을 주었다.

해성악단은 계산동성당이 운영하던 해성학교 출신들이 모여 대구(명도회) 취주악단의 전통을 이어 나갔다. 이후 대구·경북지역의 관악활동은 주로 가톨릭계 고등학교 악대의 활동에 의해 이어졌다. 그 이유는 해성학교를 모태로 창단되었던 해성악대의 영향으로 보인다. 또한 대건고등학교, 왜관 순심고등학교, 김천 성의고등학교 그리고 대륜고등학교의 악대들이 두드러진 활동을 하였고, 이들 학교의 악대부 출신들이 훗날 대구 지역의 성인 관악단체의 탄생에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렇게 당시 대구 가톨릭교회의 음악활동은 지역 사회에 큰 공헌을 하였다.

(2) 성가대

1943년 9월 계산동성당 청년 20여 명은 성가대를 조직하고 계산동성당 미사 때 찬양을 담당하였다. 그러다 1949년 5월에 발전적으로 해체를 하고, 남녀 중고등학생을 주축으로 한 40여 명의 단원들로 가톨릭합창단을 결성하기에 이르렀다. 이 합창단은 주교좌성당의 주일미사 때 성가봉사는 물론이고 방송, 군인 위문, 부상 장병 위문음악회 나아가 각종 대회에 찬조 출연함으로써 대구 사회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러한 합창단의 활동은 개신교 합창단의 활동과 더불어 대구 지역 합창음악의 초석이 되었다.

대구가톨릭합창단의 경우, 그동안 여러 차례에 걸쳐 범 교구적인 음악단체로서의 위상을 갖추려고 시도했지만 실패하였고, 지금은 주교좌 계산성당의 성가대로서 본당에서만 활동하고 있다. 이렇게 우리 교구에는 대구가톨릭합창단과 같은 오랜 합창단 혹은 성가대의 역사를 가진 단체가 있고, 또 각 본당마다 성가대가 있지만 그 실력이 일천하고 더구나 교구를 대표하는 합창단이 없다는 것이 참으로 안타깝게 여겨진다.

(3) 대구지역 최초의 음악전문 교육 : 효성여자대학(대구가톨릭대학교의 전신)

이 대학은 대구·경북지역의 대학들 가운데에서는 처음으로(1952년) 음악과를 신설하여 오랫동안 지역사회의 음악계를 이끈 전문음악인들을 배출하였고, 교수들과 학생들의 정기 혹은 비정기적인 연주회를 통하여 영남지역의 음악발전에 큰 공헌을 하였다. 또한 동 대학의 출신들이 대구 지역의 다른 대학교 음악과에서 교수로서 활동하며 초기 대구지역 음악계를 선도하였다. 하지만 여자대학이라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탓인지 갈수록 그 영향력이 줄어들었다고 볼 수 있다. 현재는 남녀 공학으로 새로운 인재 배출을 시도하고 있는 만큼 옛날의 명성을 되찾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가톨릭 교회음악을 위한 직접적인 기여는 1988년에 신설된 ‘종교음악과’로 시작되었다. 한국의 가톨릭계 대학들 중 유일하게 개설된 이 대학의 종교음악과에 거는 기대는 엄청난 것이었지만, 25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 이 과는 없어지고 말았다. 많은 어려움이 있었겠지만 한국교회를 위해서도 정책적으로 존속시켰어야 할 값어치가 있는 학과라는 것을 생각할 때마다 참으로 아쉬운 조치였다는 마음이 든다. 지금 한국의 대학 학부 중에 가톨릭음악을 전문으로 가르치는 곳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4) 신자 음악가들의 활동

많은 신자 음악인들이 대구 지역에서 성악, 기악계에서 활동하였음은 앞에서 언급한 바 있지만, 작곡계에서도 신자 작곡가인 김진균 바오로와 하대응 즈카르야 교수를 조명하지 않을 수 없다.

계산동성당에서 합창지휘와 음악강좌를 맡아오던 김진균(바오로, 1925~1986)은 1951년 대구 지역 작곡가로서는 처음으로 작곡발표회를 가졌다. 그는 계명대, 경북대 예술대학 학장을 역임하면서 음악이론과 가곡작곡, 후진양성을 통하여 대구 음악계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 1970년에는 미사곡을 작곡해 계산동성당에서 발표하기도 했는데, 그가 작곡한 성가곡 중 두 곡(66번 ‘주의 백성 모여오라’와 239번 ‘거룩한 어머니’)이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가톨릭 성가」에 실려 있다. 다분히 한국적인 음악을 만들려는 그의 의식을 엿볼 수 있는 곡들이다.

또 작곡가 하대응(즈카르야, 1914~1983)은 원래 성악가 출신으로 많은 독창 발표회와 오페라에서 그 미성을 자랑하였지만, 1954년 효성여자대학에 부임하면서 작곡가로 변신하였다. 그는 많은 성악곡들을 작곡하였는데 그의 가곡들은 선율의 아름다움을 잘 살린 곡들로, 마음 깊이 스며드는 호소력과 부드러움을 지니고 있다. 김소월의 시를 특별히 좋아하여 김소월의 시를 사용하여 여러 가곡을 만들었는데 대표곡으로 ‘못잊어’가 있다. 교회음악에 상당히 열심이었던 이 작곡가는 명동성당 성가대 지휘, 서울가톨릭합창단 지휘를 하기도 했다. 경북예술가협회를 결성해 이끌기도 한 그는 음악과 관련된 여러 중책을 맡아 대구 음악계에 큰 공헌을 하였기에 경북문화상, 국민훈장목련장 등을 받기도 하였다. 성가곡도 30여 곡을 작곡한 것으로 기록에 나타나고 있지만, 우리가 거의 접할 수가 없다는 것이 큰 아쉬움으로 자리하고 있다.

(5) 대구교향악협회와 대구가톨릭교회

1957년 12월 창립총회를 가지고 출발한 이 협회는 회장에 천주교 신자인 이효상과 기술위원으로 하대응, 김진균, 안종배 그리고 강영기 등이 선출되어 큰 역할을 하였다. 이렇게 시작한 대구교향악협회는 대구교향악단 창단의 밑거름이 되었다. 1962년에는 대구관현악단으로, 1964년에는 대구시립교향악단으로 거듭나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의 대구시립교향악단의 모태는 대구의 가톨릭신자 음악가들에 의한 공이 컸음이 명백한데, 창단연주회 때의 작곡과 편곡은 김진균(바오로) 박사가 담당하였다.

(6) 한국교회 최초의 음악인 모임 : 대구가톨릭음악인협회

이 협회 역시 한국교회에서 가장 먼저 설립된 가톨릭신자 음악인 단체이다. 1967년 10월에 장병보(베드로) 신부, 평신도 작곡가 김진균과 하대응, 피아니스트 이경희, 성악가 장안나, 이보향 그리고 박채옥 등 대구 지역의 가톨릭신자 음악인 10명이 모여 시작하였다.

지금도 회원의 자격은 음악을 전공한 신자라야 가능하다. 회원들은 신앙인으로서의 사명을 충실히 하는 한편, 회원 개인의 음악회는 물론 협회 차원의 각종 음악회(요한 바오로 2세 교황 내한 및 선교 200주년 대음악회, 서정길 요한 대주교 교구장 착좌 30주년 기념 대음악회, 대구대교구합창제, 가톨릭음악인의 밤, 가톨릭성가곡 창작발표회, 교구 100주년맞이 음악회, 영호남사랑나눔음악회 등)를 지속적으로 개최하고 있으며, 신자들의 전례음악 교육(1990년대의 성음악연수)과 성가대가 없는 본당을 순회하며 꾸준히 음악봉사를 해왔다.

한국 교회에서 최초로 구성된 대구가톨릭음악인협회는 타 교구에도 음악인협회를 구성하게끔 자극을 준 것이 사실이지만, 최근에는 음악인협회의 정체성을 잃은 감이 없지 않다. 협회에서 주관하던 그 많던 음악회들이 자취를 감추었고 갈수록 개인적인 활동에만 치중하고 있는 형편이다. 그런 중에 2012년 1월 새로운 임원진(회장 : 김민아)이 선출된 만큼 새로운 도약을 기대해 본다.

(7) 대구가톨릭음악원

1987년 대구가톨릭대학 신학과 교수였던 김종헌 신부가 동 대학의 부설로 종교음악연구소를 설립했다. 서울에 이어 한국교회에서 두 번째로 설립된 음악원은 올해 25주년을 맞게 되는데 그동안 500명의 연구생들을 배출하였고 현재 이들은 여러 본당에서 지휘자로, 반주자로 혹은 성가대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또한 동 음악원을 설립한 두 해째부터 시작한 ‘성음악 발표회’ 또한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지금까지 개최하면서 가톨릭의 전통적인 교회음악과 실험적인 교회음악을 소개하고 있다. 산하 단체로는 ‘노래하는 천사들(Pueri Cantores, 김정선 카타리나 수녀 지도)’이란 청소년 합창단이 있으며, 이 합창단은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까지 연주 여행을 하며 그 이름을 떨치고 있다.

현재 대구가톨릭음악원은 지망생의 부족으로 매주 이틀에 걸쳐 실시하던 수업을 매주 한 번 토요일 오전과 오후에 걸쳐 전체 수업을 하고 있으며, 어느 때나 개인 수업이 가능한 합창지휘, 오르간, 성악 등의 개인 전공반 교실도 운영하고 있다. 교육은 원장 신부와 지도 수녀, 3명의 오르간 교수와 2명의 성악교수들이 담당하고 있다.


나가는 말

대구대교구의 음악단체들을 모두 소개할 수는 없지만, 이렇게 간략하게나마 살펴본 대구대교구의 음악활동은 대구 지역사회의 음악문화 탄생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하였고, 그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실로 대구가톨릭교회의 자랑이고 앞서 간 교회 음악가들이 이룬 큰 업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대구 지역 음악계를 선도하던 대구대교구 음악의 위상은 현재에 이르러서 부끄러울 만큼 낮아졌다는 사실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다.

제대로 된 성가대나 합창단이 하나도 없는 대구가톨릭교회, 교회음악의 발전을 위해 전혀 투자가 없는 교구와 본당들,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음악적인 재능을 오직 자신만을 위해 사용하는 많은 신자 음악가들 등 모두의 반성이 필요한 때라고 생각된다. 우리보다 먼저 교구에서 활동하다가 세상을 떠난 음악관계자들이 가졌던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교회음악에 대한 열정을 본받아야겠다.

[월간빛, 2012년 3월호, 김종헌 발다살 신부(한티순교성지 전담, 가톨릭음악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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