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쉽게 듣는 교회 음악 산책] (20) 베르디의 ‘레퀴엠(Requiem)’
격렬한 슬픔으로 몰아넣는 ‘진혼곡’ 베르디(Giuseppe Verdi, 1813~1901)는 삶의 슬픔과 고통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작곡가였다. 음악공부를 하기 위해 일찍부터 가난한 부모 곁을 떠나 후원자의 집에서 살아야 했고, 그 후원자의 딸과 결혼했지만 따뜻한 가정의 행복도 잠시뿐, 젊은 시절에 아내와 두 어린 자녀를 연이어 저세상으로 보내는 불행을 겪어야 했다. 그의 초상화와 사진들은 진중하고 우울한 그의 내면을 그대로 드러낸다. 특히 50세 무렵에 찍은 사진은 금방이라도 눈물이 흘러내릴 듯한 얼굴이다. 그래서 베르디와 ‘레퀴엠’은 아주 잘 어울린다. 그는 언제나 죽음과 가까이 있는 예술가였고, 그가 작곡한 오페라들은 거의 다 처절한 비극이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베르디의 레퀴엠은 모차르트나 가브리엘 포레 같은 대표적인 레퀴엠 작곡가들의 작품과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진혼곡(鎭魂曲)’이라는 번역어가 뜻하듯 레퀴엠은 죽은 이의 영혼을 평온하게 하고 남은 사람들의 슬픔을 위로하는 음악이다. 세상을 떠난 이가 천국에서 기쁘고 영원한 삶을 누리기를 간절히 기도함으로써 말이다. 모차르트나 포레의 ‘레퀴엠’은 위령성월에 세상 떠난 사랑하는 이들을 생각하는 우리의 마음을 진정으로 위로해준다. 레퀴엠 본연의 사명을 다하는 음악이라는 의미다. 그러나 베르디의 ‘레퀴엠’은 우리를 다시금 격렬한 슬픔과 오열로 몰아넣는다. 심판날에 있을 하느님의 진노를 표현한 ‘진노의 날(디에스 이레Dies irae)’은 너무나 압도적이고 폭발적이어서 우리의 혼을 완전히 빼놓는다. 하느님의 구원을 갈망하는 기도 ‘저를 구원하소서(살바 메Salva me)’는 처절하도록 간절해 마음이 불편할 정도다. 마음의 평화는 이 감당하기 어려운 음악의 소용돌이 속에서 한바탕 펑펑 울고 탈진한 후에야 비로소 찾아온다. 베르디가 이처럼 격정적이고 강렬한 레퀴엠을 작곡한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한 가지는 그가 성악적인 기교보다 극적인 표현력을 중시한 오페라의 개혁가였다는 사실이다. ‘레퀴엠’이 아무리 교회음악이라 하더라도, 오페라의 거장인 베르디는 텍스트의 의미를 극적으로 표현하는 자신의 오페라 작곡 방식을 ‘레퀴엠’에 반영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 다른 하나의 이유는 베르디의 개인사와 관련된 것이다. 포레는 돌아가신 부모님을 위해 ‘레퀴엠’을 썼지만 베르디의 ‘레퀴엠’은 (1873년에 세상을 떠난 탁월한 작가 알레산드로 만초니에게 헌정되긴 했으나) 결국 죽은 아내와 아이들의 영혼에 바치는 곡이었다. 그러니 두 작곡가가 지닌 근본적인 작곡 성향의 차이를 떠나, 작곡에 임하는 두 사람의 심경이 어떻게 달랐을 것인가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같은 이탈리아 오페라 작곡가이면서도 베르디와는 전혀 다른 성격을 지녔던 ‘희극 오페라의 거장’ 로시니(Gioacchino Rossini, 1792~1868)가 세상을 떠났을 때, 선배작곡가로서 로시니를 존경했던 베르디는 그를 위한 ‘레퀴엠’ 작곡을 앞장서서 추진했다. 다른 작곡가들과의 이 공동작업에서 베르디가 작곡한 부분은 마지막 부분인 ‘리베라 메(Libera me: 저를 구하소서)’였다. 그러나 여러 작곡가가 작곡에 참여한 이 ‘로시니를 위한 레퀴엠’은 여러 가지 이유로 오래도록 사장되어 있다가 긴 세월이 지나서야 초연되었고, 그 이전에 베르디는 1868년에 작곡한 이 ‘리베라 메’를 토대로 자신만의 레퀴엠 전곡을 작곡해 1874년 밀라노에서 초연했다. 그래서 이 ‘레퀴엠’에서는 합창과 팀파니와 금관악기의 맹공(猛攻)으로 청중의 혼을 뒤흔드는 ‘리베라 메’의 주제가 ‘진노의 날’과 ‘악인들이 불 속에 떨어질 때(Confutatis)’ 부분에서도 되풀이된다. 레퀴엠에서는 일반 미사통상문에 포함되는 키리에(하느님, 자비를 베푸소서)-글로리아(대영광송)-크레도(사도신경)-상투스(거룩하시다)-베네딕투스(찬미받으소서)-아뉴스 데이(하느님의 어린 양) 가운데 글로리아와 크레도가 생략되고 그 대신 장례미사의 고유문에 해당하는 ‘디에스 이레(진노의 날)’를 노래하는데, 하나의 세퀀티아(부속가)로 묶여 있는 이 ‘진노의 날’은 다시 ‘놀라운 나팔 소리’, ‘무서운 대왕’, ‘악인들이 불 속에 떨어질 때’, ‘눈물의 날’ 등 여러 개의 곡으로 세분화된다. 그 뒤에 이어지는 봉헌송 ‘도미네 예수(Domine Jesu:주님이신 예수)’의 서정적인 아름다움과 ‘상투스’의 기쁨이 넘치는 화려하고 밝은 색채를 보면, 오페라의 거장인 베르디가 아니고는 결코 이처럼 기쁨과 슬픔의 대비가 뚜렷한 레퀴엠을 탄생시킬 수 없었으리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극작가 버나드 쇼는 “베르디의 ‘레퀴엠’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오페라”라고 말했다. 오페라 같은 세속음악이 아닌데도, 열정과 환희, 분노와 고통, 그리고 구원에 대한 절절한 갈망 같은 가장 인간적인 감정들이 전혀 걸러지지 않은 채 음악 속에 날것으로 살아있기 때문이다. 고통으로 고통을 위로하는 음악, 그것이 베르디의 ‘레퀴엠’이다. [음악평론가 이용숙(안젤라)씨] Tip 위령성월, 신자들은 ‘죽은 이를 위한 미사곡’이 보다 마음 깊이 다가오는 시기다. 레퀴엠을 소개할 때 흔히 일반인들의 귀에 가장 익숙한 레퀴엠으로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미완성곡을 꼽는다. 그 외에도 가브리엘 어번 포레, 샤를르 구노 등의 곡이 유명하다. 베르디의 레퀴엠 또한 여느 곡 못지않게 전 세계적으로 연주되며 많은 이들의 감성을 울려왔다. 베르디의 레퀴엠은 오페라 외에 그가 작곡한 가장 대표적인 곡이다. 특히 이 레퀴엠은 다른 작곡가들의 곡과 비교해 극적 요소가 매우 풍부한 곡으로 평가받는다. 초연 당시 연주를 감상한 이들은 레퀴엠이 아닌 오페라라고 일컬을 정도였다고. 이곡은 1874년 5월, 베르디의 지휘로 이탈리아 밀라노 산마르코 성당에서 초연됐다. 이후 이탈리아 라스칼라 극장에서 일반 연주회 형태로 공연되는 등, 베르디 본인이 직접 지휘한 작품 중 가장 자주 선보이는 곡으로 기록되고 있다.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 지휘,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 합창단 연주로 녹음된 EMI의 음반이 들어볼만 하다. 또 BBC가 줄리니의 90세 생일을 기념해 줄리니 육성 인터뷰를 함께 담아 펴낸 음반도 애호가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수석지휘자였던 클라우디오 아바도가 지휘하고 스웨덴 라이도 합창단, 에릭 에릭슨 실내합창단 연주 등으로 2001년 출시된 DVD(EMI)에서는 소리는 물론 연주가들의 표정을 통해 더욱 강렬한 선율을 감상할 수 있다. Domovideo가 출시한 DVD에서는 지난 1990년 루치아노 파바로티를 비롯해 3000여명에 이르는 월드 페스티벌 합창단이 펼친 대규모 공연을 만날 수 있어 눈길을 끈다. ‘진노의 날’의 웅장한 선율이 압권이다. [가톨릭신문, 2008년 11월 30일, 주정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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