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교회 성음악의 길을 연 이문근 요한 신부 제자들을 사랑하는 스승으로, 교회 음악을 위해 온 젊음을 바쳤던 음악가로, 사목자로서 신자들에게 자상함과 엄격함을 보여 주셨던 이문근 신부님의 10주기가 되는 이 시점에서 그분의 생애를 회상하고 소개하는 뜻은, 그분을 알고 있는 분들에게는 다시 한번 그분을 생각하게 하고, 그분을 모르는 후배들에게는 그분의 삶을 통해서 끊임없이 보여 준 교회 음악을 위한 노력의 정신을 심어 주고픈 마음에서이다. 이문근 신부님은 1919년 1월 8일 충북 단양에서 출생하였다. 순교자의 후손으로서, 철저한 천주교 신앙 분위기에서 성장한 그분은 어려서부터 돈독한 신앙심을 키울 수 있었다. 이러한 신앙의 힘은 신부님으로 하여금 뒤돌아봄 없이 성직을 희망하게 하여, 1933년 4월 소신학교인 동성상업학교(현재의 동성중고등학교)에 입학을 한다. 소신학교에 입학하면서 신부님은 처음으로 음악 공부를 하게 된다. 3학년이 되던 해, 당시 동성상업학교 이사장이던 변 신부(R. J. Bodin, 파리 외방 전교회 소속)에게서 오르간과 기초 화성학을 배우기 시작했다. 보댕 신부는 전문적인 음악가는 아니었지만 정선 가톨릭 성가집 125번 복자 찬미가를 작곡할 만큼 수준급의 작곡자이자 연주가였으며, 그의 오르간 반주법과 화성학은 정통성을 잃지 않은 순수 성음악적이고도 전례 음악적인 것으로 훗날 이문근 신부님의 로마 유학의 길을 터주었다. 다른 음악가들에 비해 퍽 늦게 시작한 음악 수업이었으나 타고난 재질과 꾸준한 노력으로 그 음악성이 날로 자라났다. 이때부터 신학교의 모든 전례의 반주자로 활동했으며, 학생 때부터 작곡에 손을 대어 교수 신부님들의 이취임식, 환영식, 본명 축일 때 작곡한 곡이 수 편에 달한다. 특히 ‘성녀 소화 데레사의 노래’는 유일한 3부 성가로 정선 가톨릭 성가집 124번에 수록되어 애창되었다. 신학교 과정을 마친 신부님은 용산 성심신학교와 덕원 신학교를 거쳐 1944년 10월 22일 명동대성당에서 사제로 서품된다. 이어 명동 보좌 신부로 재임하면서 신학교 때 쌓은 음악 실력을 발휘하여 이 시기에 지금의 가톨릭 합창단 전신인 명동 혼성 합창단의 반주자로서 활약하며, 1945년 봄 학기부터는 혜화동 대신학교에서 음악을 가르치는 한편, 1948년에는 기존의 성가에 자작곡 5곡을 포함해서 최초의 4부 합창 성가집인 가톨릭 성가집을 출판하여 우리 나라 성가 역사의 전환점을 이루었다. 1949년 10윌 교회 음악 발전을 위하여 신부님은 로마 교황청 음대에 유학한다. 교황청 음대는, 엄격한 규율의 화성학과 대위법의 기법, 전통을 자랑하는 오르간 연주법으로 정평이 나 있는 우리 교회의 대표적인 학교라고 할 수 있다. 당시만 해도 로마엔 별로 한국 사람이 많지 않았고 이탈리아와 수교도 이루어지지 않은 형편이어서, 오히려 이탈리아어를 철저히 배울 수 있었고 음악 공부에 전념할 수 있었다고 신부님은 말씀하셨다. 그곳에서 선부님은 페로시(L. Perosi)와 도메니코 바르툴루치 (Domenico Bartolucci)에게서 작곡을 배우고 화성학, 대위법, 푸가, 그레고리안, 음악사, 중세 다성 음악, 오르간 등 종교 음악에서 알아야 할 모든 것을 착실히 배웠다. 종교 음악의 본고장인 로마에서 이러한 과정을 거치며 성음악적 음악성을 기르기 시작했고, 사제 음악가로서 전통적 전례 음악의 기틀을 마련하게 되었다. 1952년 그레고리안 석사 학위를 받은 신부님은1955년 6윌 25일에는 작곡과 학위를 받고 귀국한다. 귀국 후 1955년 가을 학기부터 1964년 8월까지 9년간 가톨릭 신학 대학 교수로 봉직하면서 신학생들에게 오르간, 그레고리안, 화성학 등 음악을 지도하였다. 그 외에 전례의 역사와 유래, 전례 용어를 내용으로 하는 전례학을 가르쳤고 부제들의 미사에 이르기까지 세심한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1964년 8월부터 1967년 4월까지 가톨릭 신학대학 학장으로 신학생들의 영성 문제, 학력 문제, 유학 문제 등의 난제들을 묵묵히 수행하기도 하였다. 친절을 드러나게 나타내는 일은 드물었으나 놀랄 만큼 한 사람 한 사람을 정확히 파악하고 이해하고 계셨다. 또한 이 시기에 신부님은 서울대와 한양대, 경희대 음대에서 음악 발전을 위해 후진 양성에 힘쓰셨다. 이때의 제자들 중에는 현재 우리 나라 음악계의 중견 인물로 활약하고 있는 분들이 여럿 있다. 1956년 3월 주교회의 결정에 따라 결성된 통일 성가집 발간위원회의 대표로 1957년 1월 7일 최초로 전국 주교회의의 인준을 받고 전신자가 부를 정선 가톨릭 성가집을 출판한다. 신부님이 “가톨릭 청년”에 25회에 걸쳐 게재한 ‘교회 음악사’는 교회 음악 연구에 큰 도움을 주는 희귀한 자료가 되고 있다. 또한 “가톨릭 청년”에 게재한 두 편의 글에는 전례 음악의 토착화에 대한 신부님의 노력과 견해가 잘 나타난다. 1967년 6월호에 “과연 재즈 음악이 교회에 들어올 것인가?”라는 글에서, 바그너의 반음계론을 시작으로 19세기경부터 무수히 쏟아져 나온 현대의 서양 음악들을 열거하면서, 대중 음악으로서의 서양 음악에서도 여러 형태의 음악이 생겨나고 있음을 지적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현대의 온갖 형태의 음악 특히 팝송이나 재즈 음악 등을 교회에서 불려질 수 있는 것으로 인정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데 대하여 신부님은, 서양 대중 음악이 정화되지 않고 우리의 전례에 들어오는 것을 원치 않았으며, 우리들이 우리의 얼이 담긴 음악을 어떻게 교회 전례에 적용시켜야 할 것인가를 연구해야 할 것이라는 토착화의 과제를 제시하였다. 또 그해 8월호의 “내가 걷고 있는 한국 성음악의 길”에서 서양 음악과 향토악의 차이점을 분석하면서, 양자의 교량 역할을 할 수 있는 그레고리안 선법에 의한 전례 음악 토착화 방안을 제시한다. 즉 그레고리안 선법에 의한 화성법은 서양 음악의 교회 선법이지만 작곡자의 의도에 따라 얼마든지 리듬이나 멜로디에 우리의 정서를 담을 수 있고, 우리 귀에 과히 거북스럽지 않은 음악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신부님의 이러한 전례 음악에 대한 토착화의 노력은 3편의 미사곡에서 드러나며, 특히 2번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에서는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러나 전례 음악의 토착화는 이루어져야 하지만, 조심스럽게 깊은 연구와 시간을 바탕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 그분의 견해의 요지임을 알 필요가 있다. 작품집으로는 1977년 한강본당 주임 당시 회갑을 기념한 회갑 기념 작곡이 있다. 이 책에는 신부님이 평소에 아끼던 성가 즉 성녀 소화 데레사, 복자 찬가, 병인 순교 복자, 복자 안드레아 김대건 신부 노래와 4곡의 미사곡 그리고 종교 가곡인 두메꽃, 2개의 라틴어 가사에 의한 소품(Motetus) 떼 데움 등이 실려 있다. 신부님은 사목자로서도 자신의 직무에 충실하였다. 1967년부터 1968년까지 천호동본당과 아현동본당에서 사목 생활을 하였으며 1968년부터 1971년까지는 명동대성당의 주임 신부이자 부주교(총대리로 활동을 하였다. 1974년부터 1978년까지는 한강본당에서 사목 활동을 하였다. 이곳에서는 특별히 신자들의 친목과 단결에 역점을 두고, 아파트 단지의 특수성 때문에 고립되고 이기적이 되기 쉬운 신자들의 일치를 위해 본당 수호 성인인 김대건 신부님의 이름을 따서 대건회라는 남자들의 모임을 만들었으며, 사목적으로 큰 효과를 거두기도 하였다. 특히 유치원 어린이들에게는 겉보기에는 무서우나 자상한 할아버지가 되어 주었고, 때때로 재치 있는 우스운 말씀을 근엄한 표정으로 하여 신자들을 즐겁게 해주시어 모든 신자들의 사랑을 받으셨다. 이렇듯 화기 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1977년 회갑 기념 작품집이 발행되었고 회갑 축하식을 가지셨다. 이어서 양재동본당에서 마지막 사목 활동을 하시면서 본당이 위치한 지역성에서 오는 신자들간의 이질감을 변화시키는 데 심혈을 기울이셨다. 1980년 영원한 도움의 성모수녀회 지도 신부로 임명된 신부님께 우리는, 수녀원에서 휴식하시면서 많은 작품 활동을 해주시기를 바랐으나, 부임하신 지 일개윌 만에 병환으로 입원하셨다. 음악가요 사제로 많은 활동을 하시던 신부님은 입원하신 지 하루 만인 1980년 9월 20일에 선종한다. 그분은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가톨릭의 본고장인 로마 교황청 음대에서 전통적 교회 전례 음악 전과정을 우수한 성적으로 이수하였으며, 신부님이 1948년 출판한 가톨릭 성가는 한국 교회 역사상 처음으로 출판된 본격적인 혼성 4성부 성가집이었다. 또한 그레고리안 선법의 화성을 이용하여 한국적 정서, 가락 등을 적절히 삽입함으로써 우리의 정취를 느낄 수 있도록 표현한 그분의 작품 등에서 보여준 토착화에 대한 노력들은 이 분야에 여러 가지 가능성들을 보여 주고 있다. 신부님은 인간적으로나 사제로서 훌륭한 삶을 사셨다. 혹자는 고집이 세고 술이 과했다는 말을 하기도 하지만, 과묵한 가운데 숨어 있는 깊은 인간성, 농도 짙은 유머, 불의를 그대로 넘기지 못하는 곧은 마음, 사목자로서 보여 준 인화 단결의 솜씨, 인내와 성실로 오랜 대신학교 교수와 학장 신부의 직책을 수행하였던 점, 서울대교구 부주교(총대리)로서 교구내 어려운 제반 문제들을 하나하나 해결해 나가던 의연한 태도들은 신부님을 알고 기억하는 모든 사람들 가슴에 남아 있다. 올해로 그분이 돌아가신 지 10년이 된다. 10년이 지난 지금 그분의 모습을 떠올리고 그분이 가꾸어 오신 성음악의 터전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우리의 끊임없는 관심과 노력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을 보존하고 새로운 가능성에 도전함으로써 그분이 우리에게 넘겨주신 한국 교회의 음악이라는 유산을 다음 세대에 넘겨줄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은 가톨릭대학보 제179호와 “최석우 신부 회갑 기념 한국 교회사 논총”에 실린 필자의 글을 편집부에서 재정리한 것입니다.) [경향잡지, 1990년 12월호, 차인현 알로이시오(종교 음악 연구소 소장,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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