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례음악자료실

제목 가톨릭 문화산책: 성음악 (3) 그레고리오 성가와 기보법의 발견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3-05-18 조회수7,559 추천수0
[가톨릭 문화산책] <12> 성음악 (3) 그레고리오 성가와 기보법의 발견

기보법의 출현, 음악 분화 · 발전은 ‘Presto'(매우 빠르게)


- 근대 악보가 고안되기 이전에 만들어진 초기 기호악보. 9세기 중엽부터 흔적이 보이기 시작한 이 기호악보는 스위스의 생갈 지방을 시작으로 해서 프랑스, 이탈리아 등지로 번져나갔다.<악보 예1>


전례음악은 그레고리오 성가가 확립되면서 눈부시게 발전했다. 모든 전례 기도문이 노래로 불렸다.

우선 두 가지 노래가 생겼다. 송영(誦詠, Accentus)과 영창(詠唱, Concentus)이다. 송영곡이란 시편을 일정한 낭송율에 따라 읊는 간단한 형태이고, 영창곡은 시편에 선율을 붙여서 노래하는 형태다.

전례에서 사제가 바치는 기도문은 대부분 송영으로 부렸고, 별 변화가 없다. 반면에 신자들이나 성가대가 바치던 기도문은 영창으로 불렸고, 자연히 풍부한 선율이 발달했다.

초기 영창 형태 곡의 가사는 주로 시편이다. 이는 다시 시편을 주고받는 형태에 따라 세 가지로 나뉜다. 교창(交唱, Antiphona)과 답창(答唱, Responsorium), 연송(連誦, Tractus)이다.

교창은 신자들이 두 무리로 나뉘어 시편을 한 절 한 절 교대로 송영하던 방식이다. 한국 교회에서 신자들이 연도를 바칠 때 시편을 부르는 지금의 현태가 바로 이 방식을 따른 것이다. 이렇게 하면 힘이 덜 든다는 장점이 있고, 분위기가 소란한 시간에 유효적절하다. 그래서 전례 중에도 행렬성가로 많이 사용됐으니 특히 미사의 3대 형렬성가인 입당성가와 봉헌성가, 영성체성가는 교창 형태로 노래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교창에도 변화가 생겼다. 시편을 외는 신자들이 줄어듦에 따라 시편 각 절을 교대로 노래하는 대신 그 시편의 상징적인 절 하나를 후렴으로 정하고, 선창을 맡은 성가대는 시편을 송영하고 중간 중간에 신자들은 같은 후렴을 반복하여 영창으로 불렀다. 이렇게 되면서 답창과 큰 차이가 없게 됐다.

답창은 두 가지 뜻을 지닌다. 형태적으로는 시편을 선창자와 신자들이 교대로 주고받는 형태다. 선창자는 시편을 한 절 한 절 끊어가며 영창으로 부르고, 신자들은 그 끊어지는 곳마다 한 후렴구를 영창으로 응답하는 방식이다. 시편을 외우지 못하는 신자들이 늘어나 시편 노래에 참여하기가 어려워지면서 답창이 유효적절해졌다. 차분하게 앉아 부르는 묵상성가로 많이 사용됐다.

두 번째로는 하느님의 말씀을 봉독한 뒤 신자들이 화답하는 기능을 갖고 있다. 그래서 주로 독서 뒤 부르는 노래들이 답창 형태를 갖고 있고, 현재 화답송이나 복음 환호송(알렐루야와 복음 전 노래)이 답창 형태다.

연송은 연달아 부르는 노래다. 시편이 후렴구로 인해 중단되지 않고 계속 불려지는 방식이다. 주로 ‘알렐루야’를 부를 수 없는 사순시기 미사에서 복음 전 노래가 연송으로 불렸는데,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전례개혁에 따라 자국어 미사에서는 사라졌다. 하지만 라틴어 그레고리오 성가미사에서는 그대로 사용된다.

전례음악들이 이처럼 발달하면서 심각한 문제가 빚어졌다. 노래를 기록해 둘 방법이 없다는 것이었다. 당시만 해도 모든 노래를 다 외워 부르고 전수해야 했다. 그러자니 선율과 선율이 뒤바뀌고 뒤섞였다. 그래서 차차 선율을 기억하는 방법이 고안됐는데, 이 초기 기보법(記譜法)을 기호학(Semeiology)이라고 부른다. 오늘날 이 기호학을 연구하는 학문을 고문서학(Palaeo graphy)이라 한다.

9세기 중엽부터 흔적이 보이는 기호악보는 스위스 생갈(Saint Gall)을 시작으로 프랑스 라옹과 브르타뉴, 디종, 아키텐, 이탈리아 베네벤토 등지에서 두루 발달했다. 기호악보는 아마도 성가대를 앞에서 이끄는 지도자 손짓에서 유래한 듯 ‘네우마(Neuma) 악보’라고도 불린다. 네우마란 그리스어로 ‘몸짓’이라는 뜻이다.

- 근대 악보의 초기 형태를 고안한 폼포사의 베네딕도수도원 귀도 다레초 수사(왼쪽)와 그를 후원한 아레초의 테오달도 주교.


이 악보는 몇 개 단음기호와 두 개의 두 음 연결기호, 여러 개의 세 음 연음기호, 그리고 이들의 조합기호로 구성돼 있다. 물론 지방에 따라 조금씩 모양을 달리 했다. 기호악보는 선율 모양을 전하기는 하지만, 음 높이나 음정 차이, 음 길이를 정확히 전달하지는 못했다. <악보 예1 : 생갈 수도원 도서관 359호 문서. 923년도 필사본으로 가사 위에 많은 기호악보들이 그려져 있다.>

그래서 네우마 악보의 약점을 보완한 근대 악보의 초기 형태가 고안됐다. 귀도 다레초(995-1050?)의 기보법이 그것이다. 지금의 5선보와 달리 4선 위에 음 높이와 비록 단순하긴 하지만 음 길이를 표시한 귀도 기보법은 당시 단순한 선율을 기록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이 기보법은 후대에 5선보로 개량돼 복잡한 악상을 표현할 수 있게 했다.

문학에서 문자의 역할처럼, 귀도 기보법은 음악이 분화하고 발달하는 초석이 됐다. 이제 단선율로 이루어진 평성가 혹은 그레고리오 성가 시대에서 드디어 여러 선율이 어울리고 여러 음이 어울려 소리를 내는 ‘다성(多聲)음악’ 시대가 열렸다.

기보법이 없던 시절에 가사를 쓴 작가는 간혹 전해졌지만 선율을 만든 작가는 전해지지 않았다. 누가 언제 시작했는지 모르는 성가들은 그래서 주로 수도원 안에서 불리고 전해졌다. 하지만 기보법 탄생은 작곡가를 탄생시켰다. 이어지는 시대에선 성녀 힐데가르트(1098-1179), 레오냉(1150-1201?), 페로탱(?-1238) 같은 작곡가들이 출현했다.


귀도 다레초(Guido d’Arezzo)

음에 ‘도레미파솔’ 이름 붙여, 기보법 · 계명창법 창안하고 외줄 현악기도 제작


귀도 다레초라는 이름은 이탈리아어로 ‘아레초의 귀도’라는 뜻이다. 특별히 유명한 가문 출신이 아닌 경우에 출생지나 주된 활동 지방의 지명을 이름에 붙여 쓰곤 하던 관습이 담겨 있다.

그(995-1050?)는 이탈리아 중부 토스카나주 동쪽 도시 아레초에서 출생한 듯하다. 폼포사 베네딕도수도원에 입회, 수도자로 산 그는 아레초의 주교 테오달도 보호 아래 활동했다. 기보법을 창안한 뒤 테오달도 주교 추천으로 교황 요한 17세를 알현하고 자신의 기보법을 설명했다. 잠시 기보법에 대한 교육을 받은 교황은 친히 자신이 ‘모르던 성가’를 악보에 따라 부를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뒤 교황의 권위로 그의 기보법을 널리 전하게 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이로써 같은 성가를 여기저기서 서로 조금씩 달리 부르던 혼돈의 시대는 일단 정된다.

그의 가장 큰 업적은 음에다 이름을 붙인 것이다. 당시 이탈리아인들은 요한 세례자를 무척 좋아했는데, 요한 세례자 축일에 부르는 찬미가는 각 구절이 한 음씩 높게 돼 있었다. 여기서 각 구절의 첫 음절들을 따면 ‘Ut. Re, Mi, Fa, Sol, La’가 된다. 나중에 Ut는 주님(Dominus)이라는 단어의 첫 음절인 Do(도)로 바뀌어 지금까지 쓰여지고 있다. 프랑스에선 아직도 Ut를 쓴다. <악보 예2>

- 귀도 다레초 수사의 가장 큰 업적은 ‘Ut, Re, Mi, Fa, Sol, La’와 같이 음에 이름을 붙인 것으로, 이같은 업적은 찬미가에 잘 나타나 있다. <악보 예2>


귀도는 또한 계명창법(Solmisation)을 창안했는데, 이 창법은 오늘날에도 음악교육에 쓰인다. 선율을 노래할 때는 반음의 위치가 매우 중요해 이에 따라 장조 혹은 단조가 결정된다. 당시엔 조성(調聲)이 없었고 선법이 유행했지만 선법의 결정적 요소도 역시 반음의 위치다. 그는 ‘미, 파, 솔’ 흐름 중에 ‘미’와 ‘파’ 사이가 반음이라는 점을 감안, 반음이 있는 부분은 ‘미, 파, 솔’로 계명을 바꿔 부르게 했다. 이로써 어려운 선율도 시창(視唱)할 수 있게 됐다.

귀도는 일현금(Monochord)도 제작했다. 일현금이란 외줄 현악기로, 현 아래 줄 받침을 움직여 음정을 조절하도록 한 기원전 6세기 그리스 악기였다. 귀도는 이 악리를 본 따 악기를 만들었는데, 이는 연주용이라기보다는 정확한 음정을 연습시키기 위한 악기였다. 그 악기 지판(指板)에는 두 옥타브의 음 이름이 쓰여 있었다고 한다. 여기에 시(si)는 h로, 반음 내린 시는 b로 표시했고, 지금도 독일에서 그대로 쓴다.

귀도는 나중에 수도원으로 돌아가 수도원장으로 일생을 마쳤는데, 그의 음악적 공헌은 오늘날 음악 발전에 결정적 초석이 됐다.

[평화신문, 2013년 4월 14일, 백남용 신부(서울대교구, 교회음악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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