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IE-신문으로 크는 신앙] 천상의 소리 그레고리오 성가 미사 때면 성당에서 오르간 소리가 울려 퍼집니다. 청소년 미사 때 생활 성가를 부를 때도 있지만, 가톨릭 성가의 기본은 ‘그레고리오 성가’입니다. ‘그레고리오 성가? 들어보긴 한 것 같은데’ 하는 분들 있으시죠?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미사를 비롯한 일곱 성사와 모든 경신 행위에 사용하는 고유 성가인 그레고리오 성가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왜 ‘그레고리오’라는 이름이 붙었나요? 그레고리오 성가는 64대 교황인 성 그레고리오 (Gregorius Magnus, 540?~604)의 업적에 따라 그의 이름에서 유래했습니다. 초기 그리스도교 성가에는 지역별로 로마 성가를 비롯해 갈리아(프랑스와 라인강 서부) 성가, 모자라빅(스페인) 성가, 고대 베네벤토(이탈리아 남부) 성가, 켈트(북서부 유럽) 성가 등이 산재해 있었습니다. 그레고리오 대교황은 이러한 성가들 가운데 ‘로마 성가’와 ‘갈리아 성가’를 중심으로 나머지를 합하고 전례력에 따라 정리해 「안티포나리움」(응답송, 후렴을 모은 성가라는 뜻)을 편찬했습니다. 가톨릭 교회 초기 성가집인 셈입니다. 그레고리오 대교황은 이뿐만 아니라 체계적인 전례음악 교육을 위한 노래 학교인 ‘스콜라 칸토룸’도 세웠습니다. 성가를 체계적으로 정리했을 뿐 아니라 전례 음악의 정착에 힘을 기울인 것입니다. 이러한 공로로 성가에 ‘그레고리오’라는 교황 이름이 붙게 된 것이지요. 그레고리오 성가 덕분에 로마 교황의 주도로 서방 교회의 전례적 통일이 이루어지게 됐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전 세계 어느 지역의 성당에 가도 그레고리오 성가를 노래하고 들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흥미로운 이야기도 전해옵니다. 베드로라는 부제가 그레고리오 교황의 말씀을 받아 적을 때, 교황의 어깨 위에 앉아 있던 비둘기 모습의 성령이 교황의 귀에 성가 멜로디를 들려줬다고 합니다. 한편 학계에서는 서기 750~810년께 센 강과 라인 강 사이 지역에서 그레고리오 성가 목록이 집대성됐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전신이 ‘고대 로마 성가’라는 점에는 이견이 없습니다. 그레고리오 성가의 특징은 무엇인가요? 첫째, 단선율의 성악곡(Vocal music)이라는 점입니다. 둘째, 로마 가톨릭 교회의 전례 성가로서 미사와 시간 전례(성무일도)에서 사용됐습니다. 셋째, 가사는 대부분 성경의 내용, 특히 ‘시편’을 주로 사용하고 있으며, 라틴어로 돼 있습니다. 넷째, 리듬이 자유롭고 가사와 밀접한 관계를 갖습니다. 그레고리오 성가는 음정과 리듬보다는 가사 전달에 목적이 있습니다. 교회 예절을 돕는 가사를 더 강하게 잘 표현하기 위한 것이죠. 다섯째, 8개의 교회 선법(그레고리오 성가를 부르는 8가지 방법)을 따르고 있으며, 여섯째로, 성가를 통해 하느님 말씀을 선포하는 ‘기도하는 노래’라는 점입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전례헌장」 116항에는 “성교회는 그레고리오 성가를 로마식 전례의 고유한 성가로 인정한다. 따라서 같은 조건이라면 이 성가가 전례 행위(의식)에서 첫 자리를 차지한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가톨릭 교회 안에서 그레고리오 성가의 위치를 가늠할 수 있는 구절입니다. 그레고리오 성가의 흥망 그레고리오 성가는 이미 9세기에 서유럽에서 권위를 인정받았습니다. 서기 800~1050년에 ‘선 없는 악보’로 기록됐습니다. 오선지에 음표를 그리고 밑에 가사를 쓰는 오늘날의 악보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선 없는 악보는 가사만 있었고, 노래 음정이나 리듬은 부르는 이들이 암기해야 했다고 합니다. 그러다 1050~1200년께 접어들면서 ‘선 있는 악보’로 기록됩니다. 이러한 악보들을 그레고리오 성가의 ‘고대수사본’(Paleographia)이라고 부릅니다. 그레고리오 성가는 선 없는 악보, 곧 가사만 적혀 있는 악보가 가장 큰 권위가 있다고 합니다. 선 없는 악보를 통해서는 가사만 볼 수 있고 멜로디와 창법은 스승에게서 전수받음으로써 악보로 규격화되지 않은 멜로디와 리듬을 생생하게 이해할 수 있었거든요. 선 있는 악보를 통해선 멜로디의 음높이를 올바로 파악할 수는 있게 됐습니다. 하지만 그레고리오 성가의 원천적인 표현력은 상실되기도 했습니다. 1200년 이후 사각 악보가 서서히 등장하면서 그레고리오 성가는 매우 거칠고 메마르게 기록되죠. 그러면서 1500년 후반에 와서는 그레고리오 성가가 ‘죽음의 시대’를 맞게 됩니다. 스승에게 창법의 감칠맛까지 전수받아 익혔던 성가를 음표로 기록하면서 표현력을 상실해 쇠퇴하게 된 것이죠. 그러다 1800년대에 와서 프랑스 솔렘(Solemes) 수도원을 중심으로 다시 그레고리오 성가를 부흥하려는 노력이 이뤄져 마침내 부활의 시대를 맞게 됩니다. 특히 고대수사본을 중심으로 그레고리오 성가가 복원됐습니다. 그레고리오 성가를 위해 현재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악보(집)는 「그라두알레 로마눔(Graduale Romanum)」(1975)과 다른 두 수사본의 악보를 첨가한 「그라두알레 트리플렉스(Graduale Triplex)」(1979)가 주로 사용됩니다. 늘 겸손했던 대교황, 그레고리오 이 그림은 대교황이라 불리는 그레고리오 교황의 모습입니다. 기사 본문에서도 읽으셨겠지만, 비둘기 모양의 성령이 그의 귀에 대고 리듬을 말해 주는 모습이 그려져 있네요. 교회 학자인 그레고리오 대교황은 이탈리아 로마의 부유한 원로원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이미 두 명의 교황(펠릭스 3세, 아가페토 1세)을 배출한 귀족 가문 출신이었습니다. 한마디로 ‘금수저’였던 것이지요. 그는 법학을 포함해 귀족 계층의 고등 교육을 받았고 573년에는 로마시장이 됐습니다. 하지만 이듬해 아버지 구르디아누스가 세상을 떠나자 로마 첼리오 언덕에 있는 부모님 저택을 베네딕토 성인의 규율을 따르는 성 안드레아 수도원으로 만들어 이 수도원에 입회합니다. 오래전부터 갈망해온 수도생활을 시작한 것입니다. 578년 교황 베네딕토 1세에 의해 부제로 서품됐고, 그다음 해엔 교황 펠라지오 2세에 의해 콘스탄티노플의 동로마 궁정에 교황 사절로 파견됩니다. 586년 로마로 돌아온 그는 다시 수도원으로 돌아와 수도생활을 이어가면서 펠라지오 2세의 신임을 받게 됩니다. 590년 펠리지오 2세 선종으로 수도자로서는 최초로 만장일치에 의해 교황에 선출됩니다. 그는 로마 교회의 주교를 뜻하는 ‘모든 교회의 교황’이라는 호칭 대신 ‘하느님의 종들의 종’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을 정도로 교황권을 지배가 아닌, 봉사의 특권으로 여긴 교황입니다. 솔렘(Solesmes) 수도원은 ...어디에 있나요? 프랑스의 수도 파리에서 서쪽으로 250㎞가량 떨어진 ‘페이 드 라 루아르’(Pays de la Loire) 주의 솔렘이라는 마을에 있습니다. 성 베네딕도회 수도원으로 10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지요. 수도원 건물들은 대부분 프랑스 혁명 이후 재건돼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수도원이 있는 솔렘 마을은 깨끗하고 조용해서 수도생활을 하기 적합하다고 합니다. 솔렘 수도원은 19세기 그레고리오 성가의 부활을 이끈 ‘그레고리오 성가의 본산지’라 할 수 있습니다. 요즘도 수도원을 방문하는 이들은 수사님들이 부르는 거룩하고 아름다운 그레고리오 성가를 들을 수 있습니다. [평화신문, 2016년 10월 30일, 이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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