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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천상의 소리 지상의 음악가: 바흐가 사랑한(?) 성가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9-04-02 조회수6,121 추천수5

[천상의 소리 지상의 음악가] 바흐가 사랑한(?) 성가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과 고통, 죽음을 기리며 은총의 시간을 보내는 사순 시기. 사순 성가  또한 신자들의 마음에 더욱 절실히 다가오는 듯하다.

 

사순 성가 중에는 서양 음악사에 한 획을 그은 작곡가의 곡도 있다. ‘서양 음악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독일의 작곡가 바흐(Johann Sebastian Bach, 1685-1750년)가 남긴 곡으로, 「가톨릭 성가」 116번 ‘주 예수 바라보라’가 그 곡이다.

 

‘주 예수 바라보라’는 엄밀히 따지자면 100% 바흐가 창조해 낸 결과물은 아니다. 왜 그런지를 밝히고자 바흐가 활동했던 전후 시기의 음악과 관련한 몇 가지 개념을 염두에 두고 살펴보려 한다.

 

이를 하나씩 풀어내다 보면, 이 짧은 16마디의 성가 속에 얼마나 풍부한 지난날의 유산이 응축되어 담겼는지를 알 수 있다.

 

 

유에서 새로운 유를 끌어내다

 

첫 번째 알아야 할 점은 이 곡이 속한 ‘코랄’(chorale)의 전통이다. 코랄은 16세기 종교 개혁에서 비롯한 개신교의 한 분파인 루터교의 예배에서 회중이 함께 부르는 성가를 일컫는 용어이다. 라틴어가 아닌 독일어 가사라는 점과, 성가대가 아닌 회중 전체의 노래이기에 쉽고 단순한 선율을 특징으로 한다.

 

코랄이 탄생한 뒤 약 200년 동안, 독일어권의 작곡가들은 코랄을 특별한 의미로 여겼다. 그들은 기존의 코랄 선율로 코랄 프렐류드, 코랄 칸타타, 코랄 모테트와 같은 다양한 장르의 교회 음악을 만들어 냈다. 이는 중세 르네상스 시기의 가톨릭계 작곡가들에게 그레고리오 성가가 작곡의 출발점이었던 것과 같았다.

 

이런 점에서 그 당시 ‘작곡’을 한다는 것은 오늘날의 작곡 개념과는 상당히 달랐다. 중세부터 18세기에 이르기까지 교회 음악을 쓰는 작곡가들은 ‘무에서 유를 만들어 내는’ 창작자가 아니라, ‘유에서 새로운 유를 끌어내는’ 수공예 장인이라 할 수 있다.

 

두 번째로, 「가톨릭 성가」 116번 ‘주 예수 바라보라’와 관련해서 주요 인물이라 할 수 있는 독일 작곡자 한스 레오 하슬러(Hans Leo Hassler, 1564-1612년)를 살펴보자.

 

이 곡의 ‘선율’은 바흐가 아니라, 그 이전에 하슬러가 작곡한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 놀라운 점은 하슬러의 원곡은 교회 음악이 아니라, 남녀 간의 사랑을 주제로 한 세속 노래라는 것이다. 이 노래의 원제는 ‘내 마음이 혼란스러워졌네’(Mein G’müt ist mir verwirret)이다.

 

 

바흐의 손으로 재창작되다

 

하슬러의 이 세속 노래가 어떻게 바흐의 손에서 교회 음악의 명작으로 변모하여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을까?

 

이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17세기 독일 개신교 성가집인 「경건한 노래집」(Praxis pietatis melica)이었다. 독일 작곡가 요한 크뤼거(Johann Crüger, 1598-1662년)가 만든 성가를 모은 이 책은 1647년부터 1737년까지 무려 45판이나 출판되면서 코랄 모음집으로서 큰 명성을 얻었다(115쪽 그림 참조). 바로 이 책에 성가 116번의 모태라 할 ‘오 피와 상처로 가득한 머리여’(O Haupt voll Blut und Wunden)가 수록되었다. 바흐가 참조했던 원본은 하슬러의 세속 노래가 아닌 크뤼거의 이 코랄이었다.

 

크뤼거는 하슬러의 아름다운 선율에 중세 라틴어 종교시, ‘세상의 구원이시여’(Salve mundi salutare)를 붙이고, 그것을 다시 4성부 코랄로 만들었다. 다만, 라틴어 원문이 아닌, 독일 신학자 파울 게르하르트(Paul Gerhardt)의 독일어 번역본을 사용했다.

 

본디 이 시는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의 몸을 아래서부터 한 부분씩, 총 일곱 부분에 걸쳐 묵상하는 긴 시였다. 예수님의 발과 무릎, 손, 창에 찔린 옆구리, 가슴, 심장을 차례대로 묵상한 뒤, 마지막 부분에서 가시관으로 상처 입어 피 흘리시는 예수님의 머리를 찬미한다.

 

크뤼거의 코랄 ‘오 피와 상처로 가득한 머리여’는 바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몸에 대한 묵상의 가장 마지막 부분이었고, 그렇게 자신의 성가집에 수록되었다.

 

 

새로운 코랄의 탄생

 

크뤼거의 이 성가집을 교회 음악가로 일하던 바흐가 모를 리 없었다. 그렇게 크뤼거의 성가가 바흐의 손에서 다시 새롭게 각색되었다. 소프라노를 비롯하여 알토, 테너, 베이스 성부의 짜임새는 더욱 조밀해졌고, 이 네 성부가 어우러지며 만들어 내는 음악적 색채는 더욱 다채로워졌다.

 

바흐는 그의 칸타타 159번과 161번, 그리고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 작품 등에서 ‘오 피와 상처로 가득한 머리여’ 선율을 사용했다. 또한 그는 오르간을 위한 코랄 프렐류드인 ‘진심으로 바라나니’(Herzlich tut mich verlangen)에서도 이 코랄의 선율을 그대로 인용했다. 바흐가 여러 작품에서 이 코랄을 사용한 것을 보면 이 곡에 무척이나 애착을 가진 것 같다.

 

바흐의 대작이라 손꼽히는 곡 가운데 하나인 ‘마태오 수난곡’도 이 코랄을 바탕으로 작곡되었다. 바흐는 ‘오 피와 상처로 가득한 머리여’의 선율을 가지고 총 네 개의 다른 코랄을 한 작품에 담아 탄생시켰다.

 

‘마태오 수난곡’은 연주 시간만도 세 시간이 넘는 장대한 서사곡이다. 마태오 복음 26장과 27장의 내용을 다루며 예수님의 수난과 이에 대한 묵상을 음악으로 펼쳐 낸다.

 

‘오 피와 상처로 가득한 머리여’의 선율을 바탕으로 하는 네 개의 코랄은 곡 중간중간에 반복적으로 등장하지만, 가사와 화성은 그때마다 다르게 표현된다.

 

 

함께 부르는 성가의 힘

 

‘마태오 수난곡’에서 이 코랄의 선율이 등장하는 순간, 우리는 자연스럽게 예수님께서 겪으신 수난의 고통에 참여하게 된다. 그 당시 그리스도인들이 크뤼거와 바흐의 음악을 통해서 예수님의 수난을 묵상했던 것처럼, 오늘날의 신자들도 사순 성가 ‘주 예수 바라보라’를 통해서 그 수난 묵상에 동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독일어로 작곡된 ‘마태오 수난곡’을 콘서트홀에서 한글 자막 없이 듣더라도 이 성가를 불러 본 사람은 이 코랄의 선율이 흐를 때 ‘주 예수 바라보라’의 가사가 떠오를 것이다. 이것이 바로 회중이 함께 부르는 성가의 힘이다. 신자들이 코랄을 이용한 다양한 예술 작품과 친밀해지는 방법이기도 하다. 또한 이것은 음악에 대한 특별한 현상학적 경험이고, 신자로서 누릴 수 있는 특별한 권리이기도 하다.

 

* 정이은 안드레아 - 음악학자. 서울대학교에서 음악학을 가르치고 있다. 영국 케임브리지대학교에서 석사 학위를, 홍콩대학교에서 음악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경향잡지, 2019년 3월호, 정이은 안드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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