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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음악칼럼: 시각 너머의 세계를 그린 작곡가, 로드리고의 어느 귀인을 위한 환상곡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22-04-25 조회수2,152 추천수0

[음악칼럼] 시각 너머의 세계를 그린 작곡가, 로드리고


‘어느 귀인(貴人)을 위한 환상곡’

 

 

음악 방송 프로그램에서 선곡을 할 때는 먼저 방송 시간대, 계절, 날씨, 신청곡, 사회적 분위기를 고려합니다. 그리곤 ‘○○날’에는 그날의 뜻에 맞는 음악을 고르죠. 예를 들어 ‘어린이날’이라면, 어린이들이 들으면 좋아할 음악, 어린이와 연관된 음악을 선곡하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해마다 4월 20일 ‘장애인의 날’에 빠지지 않고 선곡되는 작곡가가 있습니다. 20세기 스페인의 대표적인 작곡가 호아킨 로드리고(Joaquín Rodrigo, 1901~1999, 스페인)입니다. 그는 세 살 때 디프테리아를 심하게 앓아 시력을 잃고 평생을 시각장애인으로 살았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에게 앞을 볼 수 없는 장애는, 음악을 천직으로 살아가라는 뜻이었던 것 같다고 말했죠. 여덟 살부터 피아노, 바이올린을 배웠고, 스물두 살에 첫 작품으로 피아노곡을 썼습니다. 이후 피아노곡, 바이올린곡, 첼로곡, 성악곡들을 썼지만 그를 유명하게 만든 것은 기타곡들입니다. 혹 그의 이름은 몰라도 그의 대표작인 ‘아랑후에스 협주곡’이라는 곡은 들어보셨을 겁니다. 기타와 오케스트라가 환상의 조화를 이루는 이 멋진 곡은 경음악으로도 많이 편곡되어서 아주 친숙한 음악이 됐죠. 또, 유명 기타리스트 세고비아(Andrés Segovia, 1893~1987, 스페인)의 요청으로 작곡된 ‘어느 귀인을 위한 환상곡’, 기타리스트 집안인 로메로가(家)(Romeros)가 위촉한 4대의 기타를 위한 작품 ‘안달루시아 협주곡’도 모두 기타 협주곡입니다.

 

로드리고에게 음악적 영감을 준 것은 옛 스페인 작곡가의 작품에서부터 동시대 시인의 작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스페인의 정신과 문화였습니다. 대체로 멜로디가 뚜렷한 그의 음악은 밝고 낙관적인 스페인의 정서를 세련되게 표현하고 있어 20세기 유럽의 다른 작곡가들과는 확연히 구별되는데, 이런 독창성이 잘 드러나는 작품이 바로 ‘어느 귀인을 위한 환상곡’입니다. 네 악장으로 구성된 이 곡은 17세기 기타 명인이자 작곡가인 가스파르 산스(G. Sanz, 1640경~1710경, 스페인)가 출판한 <스페인 기타 교본>에 수록된 6개의 춤곡에서 영감을 받아 작곡했고, 각 악장마다 산스의 원곡에서 그대로 옮겨온 제목을 붙였습니다. 1악장 ‘비야노와 리체르카레(Villano y Ricercare)’는 전원을 뜻하는 춤곡에서 유래한 것으로, 평화롭고 우아하며, 2악장 ‘에스파뇰레타와 나폴리 기병대의 팡파르(Españoleta y Fanfare de la Caballería de Nápoles)’는 서정적인 스페인의 옛 춤곡 에스파뇰레타의 애수 어린 연주가 우리 마음을 끕니다. 힘차고 경쾌한 3악장 ‘아차의 춤(Danza de las hachas)’은 흔히 ‘도끼의 춤’이라고 번역되지만, 스페인어 사전에 ‘hacha’가 ‘옛 스페인의 춤’이라는 뜻도 있는 것으로 보아 ‘도끼’보다는 ‘아차’라고 하는 스페인의 옛 춤곡으로 보는 것이 더 맞을 듯합니다. 마지막 4악장 ‘카나리오(Canario)’는 대서양에 있는 스페인 자치주 카나리아 제도에서 온 춤곡의 멜로디를 차용하고 있습니다. 곡 제목의 ‘귀인(貴人, gentilhombre)’은 곡 의뢰자인 ‘세고비아’이거나 곡의 원형 작곡가인 ‘산스’라는 해설이 있지만, 저는 장애로 인한 불편과 편견에 좌절하지 않고 불굴의 의지와 남다른 노력으로 20세기 거장의 반열에 든 ‘로드리고’ 자신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2022년 4월 24일 부활 제2주일(하느님의 자비 주일) 서울주보 6면, 임주빈 모니카(KBS프로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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