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가 게시판

제목 라틴어와 모든 번역에 대한 소고(小考)
작성자이인호 쪽지 캡슐 작성일2007-01-17 조회수601 추천수1 반대(0) 신고

잠시 미국에 기거 할 때 기억으로 매주 수요일 아침이면
개신교와 가톨릭 신자들이 모인 커뮤니티 성경공부를 나가는데
이 프로그램은 특정한 교회주관으로 하는게 아니라
모두 동일한 한가지 프로그램을 갖고  
지역마다 어느 집으로 각각 장소를 정해놓고 모여서 성경공부를 하는,
역사가 꽤 오래된 성경공부 프로그램입니다.


요즘은 이곳에서 요한복음을 공부한다고 하는데
작년 여행에서 떠나오기 전날 성경중에 이해가 잘 되질 않는 부분이 있다고
아내가 저에게 물어온 구절이 있었습니다.


마태오복음 26장 25절,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님과 유다가 대화하는 부분인데
개신교회의 번역내용은 이렇습니다.


저희가 먹을 때에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 하시니

저희가 심히 근심하여 각각 여짜오되 주여 내니이까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그가 나를 팔리라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 하였더면 제게 좋을뻔 하였느니라

예수를 파는 유다가 대답하여 가로되 랍비여 내니이까 대답하시되 (네가 말하였도다) 하시니라.

(개신교의 고문학적 성경은 대학시절까지도 친근했었지요. 지금은 어렵게 느껴지는군요. 그러나 개신교회 목사님들이 중요한 부분은 달달 외우시는 형국이라 천주교와 공동으로 번역한 성경으로 절대 바꿀 수 없다 했읍니다. 물론 겉으로 드러난 문제는 하느님이신지 아니면 하나님이신지라고 하지만요... 그걸 다시 외우자면 보통일은 아닐듯 싶습니다.)  


이부분의 마지막 부분인 예수님의 대답을
요즘 많은 개신교인들이 보는 NIV 영어성경으로 보면
"Yes, it is you."로 되어있습니다.

Yes, it is you.
이게 어찌 된거냐고 묻습니다.


유다의 질문인 (선생님을 팔아넘길 사람이 접니까?)에
그래, 바로 너다 ("Yes, it is you.")라고 예수님이 대답을 하셨다면
그 자리에 있던 다른 제자들이 그냥 있었을리가 없을테고
제가 알기로도 다른 제자들이 몰랐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참 이상도 하구나 싶어
서제에서 그 옛날 제 성경참고서와 같은 아주 늙고 아주 커다란
Old King James Version HOLY BIBLE 을 보니
아주 정확하게 다음과 같이 써 있습니다.

Then Judas, which betrayed him, answered and said,
Master, is it I?
He said unto him, Thou hast said.


아무리 그래도 그렇치
(Thou hast said)  (Yes, it is you)
이건 너무 다른데…



그래서............
손가방에서 가톨릭이 사용하는 번역성경을 꺼내 들었습니다.  

24절 사람의 아들은 자기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된 대로 떠나간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기는 그 사람!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자신에게 더 좋았을 것이다.”


25절 예수님을 팔아넘길 유다가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 하고 묻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네가 그렇게 말하였다.” 하고 대답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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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도래 200주년 기념 번역성서입니다.

24절 인자는 자신에 관해서 기록된 대로 떠나갑니다. 그러나 불행하구나, 인자를 넘겨 주는 그 사람!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그 자신을 위해서 좋았을 것입니다."

25절 그러자 그분을 넘겨 주기로 한 유다가 대답하여 "저는 아니겠지요, 랍비?" 하였다. 예수께서 그에게 "그대가 (그렇게) 말했습니다" 하고 말씀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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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홈에 인용된 영어성경 입니다.

Then Judas, his betrayer, said in reply, " " Surely it is not I, Rabbi?" " He answered, " " You have said so." " "



보는김에 다른 여러가지 Version의 성경들도 찾아보았더니
Don`t play game with Me 같은
어처구니 없는 말로 번역 되어있는 것도 있어서
어쩌다가 개신교 성경들이 이렇게 되었는지 궁굼하기도 하고
걱정도 되는군요.


가톨릭 보다는 사고나 체제에 있어 젊고 개방적이라는 개신교가
급기야 성경 번역에 있어서도 파격을 시도하는 모양입니다.


젊을수록 사람이나 집단이나  타협이 어려우며
그런 예민하고 날카로운 감수성에 의해 아름답기도 하지만
또 모날 수 밖에 없다는 생각도 해 봅니다.


젊을수록 개방적일 것 같지만
오히려 어느 면에서는
철저한 자기 기준에 의한 의기로
스스로 용납 안 되는 일을 더 많이 가려내는 때이기도 하기에
한편으로는 경직된 틀에 갇힐 수도 있는 위험을 내포하기도 하겠지요.


개인들의 독서의 태도에 있어서도
젊을 때는 그런 성향과 관련된 위험을 수반하는 것 같습니다.
그 위험성은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한가지는 자신의 사상과 다른 것을 아예 배제하는 편견이고
또 한가지는 번역에 대한 불신에서 기인하는 배타성입니다.
(물론 여기까지 쓴 모든 논리는 제 개인적 경험에 기초한 소견일 뿐입니다.)


오늘은 그 두 가지 독서 성향 중에서
번역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보려고 합니다.


그 동안 체계도 없이 많은 책을 읽어 왔지만
한동안은 원어가 아닌 책은 되도록이면 피하려 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니 제가 읽을 수 있는 책이란
원작이 한국어이거나 영어이거나 둘 중에 하나 일 수 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그렇지만 영어와 한국어가 아닌 저작들이 훨씬 많고
더 우위를 점하는 고전이나 훌륭한 저서로서의 가치를 지닌 경우가 많은 현실에서
읽을 수 있는 원어만으로 독서를 한다는 것은
바보스러운 짓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심지어 어떤 이들이 一字無誤說이라는 말로 악용하기도 하는
성경이라는 책을 넘어선 책도
히브리어나 코이네 그리스 원어로 볼 수 없음은 말할 것도 없고요.


개신교 일각에서는 이미 번역된 것을 일자무오라고 하니
그건 또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지 모르겠습니다만…


하여튼 번역이라는 것에 대한 절대적 의심에서 생겨난 편협적인 독서가
꼭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을 태운다는 짓처럼
결국은 독서라는 것 자체를 불균형하고 부족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뿐만 아니라
지식의 축적에도 점점 큰 공간이 비어간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몹시 흥미롭거나 입맛에 꼭 들어맞는 어떤 책은
원어로 볼 수 없는 경우에
두 가지 번역을 같이 읽어본 경우도 있습니다.


한 예로, 제가 도저히 읽을 방법이 없는 포루투칼어로 쓰여진
주제 사라마구(Jose Saramago)의 소설의 경우
한국어 번역본과 영어 번역본을 같이 놓고 번역을 비교하며 읽는데
그런 경우에 번역자의 문학성이나 문장이해력도 비교되고
잘못된 번역도 추측이 되고
매끄러운 문장력도 비교가 되고
그러면서 좀더 확실한 원작자의 의도를 이해해 보려는 노력을 해 보지만,
좀처럼 만나기 힘든 대가들을 알게 될 때에는
그 원어에 대한 그리움이나 선망이 어쩔 수 없이 강해짐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학문적 고찰이나
정확성에 대한 도덕적 성찰도 없이
기계적 번역을 통한 무책임한 번역을 통해 양산되는
수 많은 책들은 어찌 보면 쓰레기를 보태는 일 밖에 되지 않는다고 여깁니다.


뭐 글자 해독능력 정도를 가진 대학원생들을 시켜서
전문서적의 번역을 하고는
자기 이름 턱 하니 걸고 책이랍시고 내서
세상에 겁 없이 종이쓰레기를 더하는 교수나,
문학성은커녕 문장이해력도 없는 이들이
짧은 시간 낮은 번역고료를 받고 어색한 직역을 하는 문학작품들을 보면
원작에 대한 모독을 느끼게 됩니다.


어떤 경우에는
스페인어를 영어로 번역한 것을 원전으로 하여 다시 한역한 것을 본 적도 있고,
포루투칼어를 프랑스어로 번역한 것을 가지고 한역한 책도 본 적이 있습니다.


문장 한 줄  단어 하나 조사 한字로도
얼마나 달라질 수 있는 것을
한 다리 건너 다른 문화의 언어를 거쳐 또다시 번역을 한다면
그것이 바로 그 책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만 역사적으로
번역은 학문의 시작이었다고 하지요.
번역 자체가 학문이었고
번역으로 인해 학문이 가능해 졌다고 할 수도 있겠지요.
고전과 성서의 번역이 학문의 시작이었고
지금도 번역을 통해서만
문화의 질적 양적 확장을 꾀할 수 있음이 자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어떤 경우에도 원작이 훼손될 수 밖에 없는 번역이란
사실상 불가능하고 불완전할 수 밖에 없으며
그러기에 반역이라는 저의 생각은
고집불통 우물 안 개구리의 생각 정도 밖에는 되지 않음을
또한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제가 번역을 하위로 인정하던 불완전한 이해는
그 동안의 부실한 번역문화가 나쁜 역할을 한 것이 제일 크고
문학의 순정성에 대한 미신적 숭배주의가 또 한가지 연유임을
스스로 알고 있습니다.


가장 바라는 것은,
전문영역의 경우 번역은 최고의 전문가가 학문의 정통성을 걸고
또 다른 학문의 영역으로서 집대성 해야 할 분야임을 알아야 할 것이고,
그런 번역의 중요성이 학문의 기초가 됨을 이해하고 인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문학의 영역인 경우
번역은 새로운 창조이며 번역자의 작품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직역은 컴퓨터가 할 수도 있을 테지만
문자의 해독이 문학이 될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번역자의 문학적 소양과 언어적 능력이 조합되어
번역이 가질 수 밖에 없는 오류를 최소화 하는 것이
문학번역에 대한 예의가 아닐까 하고 생각합니다.


아주 드물게 훌륭한 번역문을 보게 되는데
그것이 원어를 능가하는 것을 볼 때가 있는데
그런 묘한 즐거움은
각각의 언어가 가지는 특성이나 우월성에 기인할 수도 있는
아주 오묘한 문제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한 독자의 문화적 언어적 배경에 따라
好, 不好가 달라질 수도 있겠고요.


물론 번역에 대한 유감이 많지만
그래도 요즘은 이러저러한 이유 등으로
번역어로 된 책들도 많이 보는 편입니다.
특히 학문적 서적들은
얼마든지 객관적인 정확성을 가지고 번역될 수 있고
번역되어야만 한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그래도 아직은
노벨 문학상은 노벨 번역상의 다름이 아니며
그 어떤 것을 다 양보 하더라도
詩만큼은
번역 불가하다는 것이 물러설 수 없는 제 마지막 생각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시편 성경의 번역과 노랫말 사이에 어려움에 생각의 괘를 같이 합니다.


성서의 번역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 보니
가뜩이나 metaphor 로만 말씀하시던
우리 예수님의 말씀을
누가 어찌 어떻게 번역하리요 하는 한숨이 폭~ 하고 나옵니다.


그래서 눈으로 읽고 이해하는 것이 아니고
성령이 이끄는대로 느끼도록하라고 목청 높이는 것으로
참된 번역의 임무를 면하려는 성직자 내지는 성서학자들이
곳곳에서 성행하지 않았을까 하고 여겨 봅니다.

더불어

전에 우리 가톨릭 교회에서 라틴어로만 원어 미사를 보거나
불가타 라틴성경을 인용한다거나
이슬람에서 코란 번역을 불허한다허는 것은
그것의 흠 없음을 사수하기 위한
아주 극단의 고집이 아닐까 하고 생각되지만
그 심정이 백 번 이해 되고도 남는 바가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 안에서 생명력을 가지지 못한다면
신앙이라고 하는 것도
도덕이나 학문과 다를 것이 없기에
그래도 우리는
열심히 번역 성경을 봐야 할 수 밖에 없겠지요.


뭐라고 하셨을까?
설령
내가 그 말을 직접 들었다 해도
내가 제대로 그 말을 알아들었을까?


알고 있는 만큼만 보이고
이해 하는 것만큼만 들리는 인간으로
그러면서도
내가 안다고 하며 살아간다는 것이
우습고도 두렵군요.

하여튼 어렵습니다.
그 참되고 진실된 말씀 한마디 마다 말입니다.
이해 하기는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도 어렵고
실천 하기는 오늘도 내일도 불가능해서 말입니다.
부끄럽지요.

 

혹여 최병철 선생님께서는 들어 보셨읍니까?

이슬람 사원 첨탑에서 기도 시간을 알리는 노래 '아잔'을?

이슬람 경전인 코란은 노랫말과는 상관없는 형태로 쓰여졌으나

마치 그레고리안 성가와 같이 매우 훌륭하게 노래로 불려지고 있읍니다.

전문가이시고 수고하시는 최병철선생님 같으신 분들이 하셔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신자들이 알아 들어야 한다면 우리말이어야 하겠지요

 

비록 가사로선 까다롭다 말씀하시지만 성음악을 만들어 내시는 모든 분들께서

새로이 번역된 성경으로도 매우 훌륭하고 아름다운 곡을 지어주시리라 믿습니다.

 

 

예전의 메모를 꺼내어 옮기면서

2007.2.16 목동에서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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