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지난 주말 드레스덴 성 십자가 합창단 연주회 관람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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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소순태 | 작성일2007-03-05 | 조회수2,239 | 추천수5 | 반대(0) 신고 |
+ 찬미 예수
지난 달 어느 날 집사람의 권유로, 어제 그제 토요일 및 일요일 (2007년 3월 첫 주말)의 상당 시간을 할애하여 예술의 전당 콘서트 홀에서 개최된 독일 Dresdner Philharmonie & Kreuz Chor 연주회를 관람하게 되었다.
첫 날 및 둘째 날 모두 3층 앞 쪽 정중앙 (A석(?))에서 관람을 하였는데, 최근에 콘서트 홀을 Renovation을 하였는 듯, 아주 편안한 분위기에서 잘 들을 수 있었다.
A. 연주회 곡목
첫 날(토요일 밤 8시 연주회)의 곡목은
A-1. J.S. Bach Cantata, Ich Hatte Viel Bekummernis, BWV 21 (내 마음에는 근심이 많도다)
A-2. W.A. Mozart, Requiem, K. 626 (레뀌엠)
둘째 날(일요일 오후 2시 30 연주회)의 곡목은
A-3. J.S. Bach, Mattaus Passion, BWV 244 (마태 수난곡)
이었으며, 지휘자는 Roderich Kreile 이었다.
참고: 첫 날 지휘를 Peter Schreier가 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당일 연주회장 들어갈 때에, 사고로 인하여 Peter Schreier가 지휘에 임하지 못한다고 공지한 것을 읽었음.
B. 성 십자가 합창단에 대한 느낀 점
B-1. 대부분 합창단 혹은 성가대의 경우에 있어, 지휘자의 비트에 약간 뒤처진 듯 하면서 합창단 (성가대)의 소리가 따라 가는데, 이 합창단의 경우에 "그러한 Delay"를 별로 느낄 수가 없었다. 오히려 합창단이 지휘자를 이끌어 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B-2. 합창단원은 35 - 38명의 초등학생과 24 - 25명의 변성기를 거친 중.고등학생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숨소리에 음을 얹어 실어 내는 듯 뿜어내는 듯한 매우 자연스러운 소리, 그러나 조금은 거칠게 느껴질 수도 있는 소리로서, 고음 혹은 저음 영역에 따라 전혀 달라짐 없이 매우 Dynamic하게 따라 붙는 소리, Vibration 전혀 없는 투명한 소리 그러면서도 고르게 잘 다듬어진 "투박한 소리"를 구사하였다. 특히 Boy Soprano의 소리는 평소 합창단의 여성 소프라노 파트가 내는 소리와는 전혀 다른 순수한 느낌, 때 묻지 않은 느낌을 주었다.
B-3. 옥에 티 라고 할까.. 첫날 및 둘째 날에 Boy Soprano의 오른 쪽 부분에서 한 명의 소리가 튀어 나오는 순간이 한 두 번 정도 잠깐 있었는데, 그 녀석은 중간에 쉬는 시간에 지휘자의 꾸지람을 들었을 것이 틀림이 없다.
B-4. 전체 연주시간이 3시간 30분 정도인 마태 수난곡의 경우에 있어서도, 중간 중간에 합창이 참여하는 관계로 중간 중간에 합창단원들이 앉아 쉬었다가 또 서서 노래를 불렀던 관계로, 그렇게 힘들지 않은 연주를 할 수 있는 듯 하였다.
B-5. 그런데 이러한 합창단을 지속적으로 잘 이끌어 가려면 재정적 문제 및 합창단 구성원들의 학교 교육 문제 등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어야 하는데, 학교 교육 문제는 기숙사 등의 도입으로 해결한다고 하더라도, 재정과 관련하여 국내의 가톨릭계의 현실과는 너무나 맞지 않아 참으로 부러웠다.
무슨 이야기인고 하니, 독일의 경우에 있어 오래 전부터 개인이 세금을 낼 때에 종교세 명목으로 별도의 10% 세금을 내게 제도화 되어 있어, 국가에서 이 돈을 성당 및 루터파 교회의 봉사자들의 급여로 지급하는 것이 지금까지도 유지가 되고 있다고 한다. (단, 구 동독 지역에 위치한 이 합창단이 공산정권하에서 재정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였는지는 필자도 구체적으로 아는 바가 없다.)
이러한 제도적 장치가 전무한 국내의 여건 때문에 최상급 합창단을 발굴, 육성 및 유지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될 수가 없는 점이 참으로 안타까웠다.
B-6. 가장 궁금하였기에 가장 안타까웠던 것은, 비록 이 합창단이 1216년 경에 창단되어 분명히 그 뿌리가 그레고리오 성가 및 무반주 다성음악 연주이었을 것인데, 이번의 연주회에서 들어 본 소리에는 그러한 흔적이 전혀 없었다는 점이다.
16세기 중반 마르틴 루터의 종교 분리 획책이 불과 기름을 제공한 독일 지역의 "농민 전쟁"의 결과, 독일에서는 지역 영주의 선택에 따라 그 지역 주민들이 가톨릭 혹은 루터파 개신교 신자가 되어버렸는데, 아마도 지금의 동독 지역이었던 드레스덴 지역 영주가 개신교를 선택하는 바람에, 이 합창단 또한 개신교 측으로 넘어가게 되었고 또 세월이 거의 450여년 정도 흐르다 보니, 기도에 합당한 그레고리오 성가 및 무반주 다성음악적 발성은 그 흔적을 찾을 수 없고, 오로지 개신교 성향의 오라토리오 전문 연주 합창단이 되어 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즉, 이번의 연주회에서 구사한 소리를 들어보니, 이 합창단의 800년 역사 중에서 처음 350여년의 역사는 이미 그 흔적이 사라지고 만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매우 안타까웠다. (주: 필자의 경우에 있어, 이 합창단이 그동안 어떠한 곡을 연주하였는지에 대하여 아는 바 없음.)
C. 솔리스트들에 대하여 느낀 점
C-1. 테너 솔리스트를 제외하고 첫 날 연주곡 및 둘째 날 연주곡 전반부에 이르기까지, 솔리스트들의 기량에 대하여 깊은 인상을 받은 것은 별로 없었다.
C-2. 그러나, 둘째날 연주곡 후반부 어느 시점부터 완전하게 달라졌다. 예수 역할을 맡은 솔리스트 (베이스)의 경우에 있어 저음부 소리에 약각 갈라지는 문제가 있는 것을 제외하고는, 솔리스트들의 역량은 매우 뛰어났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의 F. 마태 수난곡 참관기에 있다.
D. 드레스덴 필하모니에 대하여 느낀 점
D-1. 어느 단체 연주회이던지 간에, 현악기 연주자의 실수는 정말로 분위기를 망치게 되는데, 이번에도 그러한 일이 발생하였다.
첫 날 첫 연주곡 시작 부분에서 바이올린 주자가 아주 매우 짧은 시간 동안 아주 쬐끔 벅벅 거렸으나 실황 첫 시작 부분이라 그런대로 봐 줄 수가 있지만, 이번 연주회의 백미였던 둘째 날 연주곡의 후반부에서 솔리스트에 의한 첫 아리아 연주에 보이스와의 앙상블 형식으로 참여한 바이올린 주자가 음감 부족 및 기량 부족으로 상당한 불쾌감과 실망을 안겨 주었다. 특히, 연주회 전반에 걸쳐 가장 오랜 시간 동안 노래한 테너 솔리스트는 이 바이올린 주자가 헛발을 내 딛는 것이 참으로 못마땅스러웠는지, 이 바이올린 주자가 연주를 하는 동안 계속 째려 보면서 책망하는 듯 하였다. 아마도 연주회 후에 이 바이올린 주자는 질책을 받을 것이 거의 확실하다.
D-2. 연주된 곡들이 18세기 작품들이라, 당시의 음량을 가진 고 악기들이 동원될 줄로 기대하였는데, 그렇지가 못하였다. 대부분의 관현악기 및 피아노가 18세기 중반, 혹은 후반부 이후에 들어와 음량 면에서 많이 개량된 점을 고려한다면, 이런 지적에 대하여 다들 한번 쯤 생각해 볼 필요는 있을 듯 싶다. 이번 연주회 프로그램에 따르면, 다음의 악기들이 사용 되었다. 괄호 안은 악기 숫자이다.
1st Violin (8), 2nd Violin (6), Viola (4), Cello (4), Contrabass (2), Viola da Gamba (1), Flute (4), Oboe/Englishhorn (4), Horn (2), Bassoon (2), Trumpet (3), Trombone (3), TImpani (1), Positive Organ (2).
D-3. 악기 연주자들의 기량은 국내 악기 연주자들의 기량과 대동소이하다는 생각이다. 즉, 비싼 돈 들여 불러 올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다.
E. 기타 이런 것 저런 것 E-1. 첫 날(토요일)에는 한 대의 Positive Orgel이 사용되었다. (Orgel 제공자: 분당 요한 성당)
E-2. 마태 수난곡이 연주된 둘째 날(일요일)에는 두 대의 Positive Orgel이 사용되었다. (Orgel 제공자: 분당 요한 성당 및 가톨릭대학교 교회음악대학원(중림동 소재))
E-3. 프로그램 판매 가격이 무려 8000원이었다. 달러로 8불! 프로그램의 내용은 매우 충실하였으나, 가격이 너무 비싸 많은 분들이 사지를 않았는데, 가격을 절반으로 하였더라면 더 많은 관객들이 프로그램을 사서 읽게 되어 더욱 더 이 좋은 음악을 잘 이해할 수가 있을터인데 하는 아쉬움..
E-4. 마찬가지로, 첫째날 및 둘째 날 모두 일층의 로얄석 중 상당 수의 자리가 텅 비어 있었는데, 이것 또한 너무 비싸게 티켓 가격을 책정한 결과로 생각되어, 참으로 안타까웠다.
긴 안목으로 볼 때에, 가능한 한 티켓 가격을 저렴하게 책정하여, 더 많은 관객들이 이 좋은 음악을 듣게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지 않을까?
F. 마태 수난곡 참관기
F-1. 사실 첫 날 연주된 두 작품은 큰 하자 없이 연주가 되었기에, so and so 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물론, 모짜르트의 레퀴엠은 참 짜임새 있게 밝은 음색으로 잘 불렀는데, 이를 두고서도 so and so 라고 말씀드리는 것은, 국내의 가톨릭 합창단 단체의 연주 기량과 비교하였을 때에, 그렇게 큰 차이는 느끼지 못하였다는 말이다. 즉, 국내 연주 단체의 기량이 최근에 들어와 부쩍 신장되었다는 이야기이다.
F-2. 둘째 날 연주된 마태 수난곡의 전반부도 그냥 so and so 로 흘러가는 분위기이었으나 (즉 별로 큰 느낌을 주지 못하였으나), 후반부에 들어와 점진적으로 확 달라지기 시작하였다.
이런 점을 귀로 들으면서 가지게 된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J.S. Bach가 영감을 받아 이 후반부를 제일 먼저 작곡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F-3. 연주회 관람시에, 별다른 느낌없이 진행할 경우 그냥 듣고 있는 편인 필자의 경우에 있어, 연주회 진행 중에 갑자기 무엇인가 감지가 되기 시작하면 그 동안 들었던 부분과 앞으로 들려 줄 부분을 비교 검토하면서 즉석 분석이 자동으로 시작되는데, 필자의 경우에 있어, "문제의 느낌"의 시작점은 후반부의 52 (61) 알토의 아리아 이었다. (참고: 전반부는 29a (35) 까지).
이미 이 아리아 곡의 선율은 이런 저런 형태로 변형되어 우리들 주변에 떠돌아 다니고 있는 듯 한데, 독일 예술 가곡의 진수가 드러나는 참으로 좋은 노래를 들었다.
다음에 보라색으로 인용한 그 부분의 가사 내용과 같이, 저의 두 눈에 눈물이 맺히지 않을 수 없는 깊은 감동을 준 최상급 아리아 이었다.
"내 빰에 흐르는 눈물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면
오 내 마음이라도
받아 주소서!
하지만 저 상처의 성혈을 위한
희생의 잔이 되게 하소서."
유럽의 추운 북쪽 변방 가까이에 위치한 독일 쪽에 일찍부터 낭만적 느낌을 담은 실내 예술 가곡이 잘 발달하였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알고 있을 것인데, 마태 수난곡 후반부에서 특히 이러한 예술 가곡적 기법을 통한 감정이입 혹은 감정전이 기법의 발휘는 참으로 탁월하였다.
F-4. 사정이 이쯤 되니, 후반부 전반에 연주된 곡들이 어떠한 구조를 가지고 있는지 분석을 연주회 곡을 들어가면서 즉석에서 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당시에 귀로 들어서 알게된 음악적 구조는 다음과 같다.
F-4-1. 예수 그리스도께서 심문 받고 고난과 조롱을 받는 장면을 묘사하는 데 처음으로 등장한 합창단의 주제 노래.. 지속적으로 발전하여 전개된 우리들이 잘 알고 있는 그 합창곡을 배경으로 하여 (37 (44), 40 (48), 44 (53), 46 (55), 54 (63), 62 (72))
F-4-2. 전반적으로 복음사가의 역을 맡은 테너 솔리스트에 의한 탁월한 Mood(분위기)의 발전 및
예수 역할을 맡은 베이스 솔리스트의 노래과 함께,
그 중간 중간에 테너 외의 다른 솔리스트들이 부르는 아리아를 균형적으로 배치하였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심문, 조롱, 그리고 십자가 형벌과 죽음 전후로 잘 배열된 그 구조적 배치는 다음과 같다.
42 (51) 바이올린 독주와 앙상블로 연주된 바리톤 아리아 (주: 프로그램에는 베이스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들리는 소리에 의하면 분명 바리톤 아리아 이었음),
49 (58) 플류트 독주와 앙상블로 연주된 아주 좋았던 소프라노 아리아,
52 (61) 알토 아리아 (너무도 아름다워 슬프게 가슴 깊숙히 파고드는 서정적인 노래였기에, 이때 사용된 악기의 명칭을 지금까지 기억(?)하지 못하여 죄송!),
57 (66) 저음 현악기 2대와 Positive Orgel 과 앙상블로 연주된 바리톤 아리아,
60 (70) 관현악기 + 합창을 곁들인 알토 아리아 (특히, 오라!-어디로?-예수의 팔 안으로, 구하라!-어디에서?-예수의 팔 안에서, 머무르라-어디에서?-예수의 팔 안에서 부분을 노래한 합창은 배열과 노래 또한 매우 독특하였다.)
65 (75) 현악기+ 포지티브 올간을 곁들인 바리톤 아리아,
등의 배열과 함께,
(주: 위에서 테너 솔리스트의 아리아가 빠진 것으로 보이는 것은 이 분이 복음사가의 역을 담당하면서 대부분의 서창을 다 불렀기 때문임. 즉 테너 솔리스트는 언급되지 않은 번호, 즉 거의 모든 나머지 부분에서 노래를 하였음).
F-4-3. 이들 배치 사이에 완전히 다른 주제의 합창곡을 배치하여 대비를 이루는 방식으로 전개 및 발전을 시키고 있는데,
예를 들어, 우리 인간들의 잘못에 대하여, 관객들이 가슴을 치며 통회하여야 한다는 느낌을 주기에 충분하였던 50b, 50d, 58b, 58d, 61b, 61d, 66b 로 이어지는 합창!
그리고, "진실로 이사람은 하느님의 아들이었구나"를 가사로 하는 합창 63b, 그리고 매우 편안하고 부드러운 음성으로 복음 수용을 권고하는 65 (75) 바리톤 아리아 는, 신앙적으로 정말 좋았다.
그리고, 모든 악기와 함창이 함께 어우러진 마지막 곡은 중간 부분에서 그 동안에 사용된 합창의 주제곡을 한 차원 높여 변형한 선율과 그 뒤를 이어 전개된 귀에 들리기에 완전한 다른 주제의 선율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마지막 피날레답게 참으로 웅장하고 거룩하게 연주되었다.
게시자 주: 소프라노 솔리스트의 노래도 참 좋았는데, 위에서 빨간색 글자로 굵게 표시한 곡들이 이번 연주회 곡들 중에서 특히 최상급으로 기억된다.
F-5. 비록 오페라 곡을 별로 작곡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진 J.S. Bach가, 인간적 탄식과 안타까움을 노래에 담은 아리아를, 간단하면서도 절제있게 잘 배치한 마태 수난곡 후반부는, 신앙적인 면에서 볼 때, 비록 연주자와 관객이 함께 어우러져 기도하는 마음과 분위기에 빠지게 하지는 못하였으나, 보통의 합창곡들이 보여주지 못하는 인간적인 탄식과 안타까움을 F-4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잘 표현하였기에 우리들에게 성큼 다가오는 "확실한 주제가 있는 작품"임에는 이견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비록 솔리스트들의 아리아 연주가 아주 좋았기에 좋은 호평을 드리기는 하였으나, F-4에서 설명한 음악적 구조는 사실은 대단한 구조가 아닌 매우 단순한, 어쩌면 초보적 배역 구조로 보아야 할 것이다.
바흐의 마태 수난곡은, 주제가 신앙에 근거한 작품이므로 교회음악으로 당연하게 분류가 될 것이지만, 그러나 교회음악으로서는 가장 중요한 것이 빠진 작품이기에, 바로 이 점에 대하여 말씀드리고자 사실은 이 글을 쓰게 되었다.
가장 중요한 것으로서 빠진 것은 다름이 아닌, 연주자와 관객이 혼연일치가 되어 기도하고 청원하는 분위기가 매우 부족하였다는 것이다.
즉, 연주자의 기막힌 연주를 보면서도 대다수 관객들은 어디까지나 연주를 보면서 즐기는 입장으로 남아 있었지, 함께 기도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무한한 자비를 간구하며 분위기로는 빠져들지 못하였다는 점.
G. 결언: 몬테 베르디(1567-1643)의 성모 마리아의 저녁 기도 작품을 생각하면서..
게시자 주: 여기를 클릭하시면, 2006년도 10월 말 경에 명동 성당에서 연주된 몬테 베르디의 작품인 성모 마리아의 저녁기도 작품에 대한 필자의 참관기 졸글을 읽으실 수 있겠습니다.
바흐(J.S. Bach, 1685-1750)는 마태 수난곡을 쓰면서, 마르틴 루터가 독일어로 번역한 마태오 복음서의 본문을 마태 수난곡 대부분의 노래의 가사로 사용함으로써, 그 반대 급부로 많은 것, 정말로 중요한 것을 놓쳐 버렸다.
즉, 천상교회의 성인, 연옥 영혼 그리고 지상교회의 영혼들 간에 기도 중에 함께 어우러지는 통공(Communion)은 마태 수난곡 전체를 들여다 보아도 어디에도 없었다.
바로 이 통공이 없다는 것은, 실황연주 현장에서 연주자와 관객이 함께 기도하는 마음으로 어우러질 수 없다는 것을 바로 의미하므로, 비록 인간적 감성에 호소하는 아리아의 효과는 대단하였으나, 그리하여 마치 오페라 중에 불러지는 탄식을 담은 노래 등와 같이 구경하는 관객들이 인간적 그 무엇을 느끼게 하는 데에는 성공하였으나, 교회음악으로서 그리 좋은 작품이라고 할 수 없다.
위의 F-4에서 마태 수난곡의 음악적 구조에 대하여 간략하게 언급하였으나, 바흐가 보여준 음악적 구조는, 몬테 베르디가 그의 작품 성모 마리아의 저녁 기도에서 보여준 음악적 구조에 비하면, 너무도 초라하다.
바흐가 오페라 곡 전문 작곡가가 아니었기에 그렇겠지만, 몬테 베르디가 그의 작품에서 구사한 음악적 구조는 참으로 다중적이었던 반면, 바흐가 그의 작품 마태 수난곡에서 구사한 음악적 구조는 너무나 단순하기에, 여러가지 만감이 교차하지를 않아, 초라하게 느껴진다는 이야기이다.
이 부분에 관하여 연주회 참관 이후 곧 바로 필자가 느낀 느낌을 그대로 표현하자면 다음과 같다. 즉, 바흐가 마태 수난곡에서 보여준 음악적 구조가 초등학생 수준이라면, 몬테 베르디가 성모 마리아의 저녁기도에서 보여준 음악적 구조는 대학생 혹은 대학원생 수준이다.
몬테 베르디의 작품의 경우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연주자와 관객이 통공을 통하여 한 마음으로 어우러져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 기도하게끔 하였는데, 개신교 신자이었던 바흐의 경우에 있어, 자신의 작품 속에 연옥교리와 통공교리를 스며들게 하지 못하는 개신교 신앙의 한계점 때문에, 마태 수난곡이 그냥 "듣기 좋은 곡", 즉 "유흥성 음악" 으로 남아 있다고 생각된다.
필자가 귀로 들어 바흐의 마태 수난곡으로 부터 느낀 바에 의하면, 몬테 베르디의 성모 마리아의 저녁기도 작품을 바흐가 생전에 들어 본 적이 없었던 것이 거의 확실한데, 만약에 바흐가 다시 태어나 몬테 베르디의 성모 마리아의 저녁기도 작품을 감상하게 되면, 자신의 작품인 마태 수난곡이 몬테 베르디의 작품에 비하여 신앙적으로 너무나도 부끄러운 곡임을 고백하면서, 자신의 곡의 연주를 금지할 것임을 필자는 거의 확신하고 있다.
필자가 평소에 그의 음악을 들어 알고 있는 것 중에 하나는, 바흐는 적어도 이러한 수준의 자존심은 가지고 있을 작곡가이라는 점이다. 음악을 전공한 분들이라면 더 쉽게 필자의 기분을 이해할 것이지만, 음악은 절대적 가치를 추구하는 학문이기에 특히 이러한 성향이 강한 줄로 알고 있다.
가톨릭 교회 교리를 학습한 가톨릭 신자들에게는 지금 드리고 있는 이 지적에 대하여 비교적 쉽게 이해할 것이나, 그러나 이러한 신앙적 교육의 기회를 전혀 가지지 못한, 그러기에 Protestant라고 불리는, 개신교 신자들의 경우에 있어, 교회음악의 근본에 대한 이 중요한 지적에 대하여 어떻게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을런지.. 하는 안타까움을 이번 글의 제일 마지막 지적으로 남기고 싶다.
교회음악(Church Music)은 "음악을 위한 음악" 혹은 "유흥성 음악"이 결코 아니므로, (연주자와 관객 모두) 교회음악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위하여서는 꼭 사전에 학습하여야 할 것이 있는데, 바로 가톨릭 교회의 전통적 가르침인 통공(Communion) 교리와 연옥(Purgatory) 교리이다.
게시자 주: 드리고 싶은 말씀의 요지는 이제 다 쓴 듯 합니다만, 내용 전개의 매끄러움을 위하여 조금 더 보강을 하여야 할 듯 싶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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