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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가톨릭 문화산책: 성음악 (7) 교회의 분리와 교회음악의 분리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3-09-08 조회수3,961 추천수0

[가톨릭 문화산책] <32 > 성음악 (7) 교회의 분리와 교회음악의 분리


신교는 대중적 '코랄' 발전, 가톨릭은 전통 전례 유지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첫 음악가인 요한 발터의 코랄의 한 예. 이때까지는 네 성부를 대보표에 적을 줄 몰라 따로따로 네 장으로 만들었다. 주 선율은 테너가 부른다.
 

교회사에서 가장 큰 비극을 꼽는다면, 두말할 것도 없이 16세기 교회 분리를 든다.

하지만 모든 선의 근원이신 하느님께서는 고통과 비극을 통해서도 좋은 결과를 창조해 주셨다. 교회는 분리를 통해 다시 자신을 내적으로 정비하고 또 풍성하게까지 했던 것이다.

1516년 마르틴 루터(1483~1546)의 저항으로 시작된 교회 분리는 스위스에서 울리히 츠빙글리(1484~1531)와 그의 뒤를 이은 장 칼뱅(1509~1564)에 의해 보강됐다. 저항은 중앙집권적 신성로마제국에서 벗어나려는 지방 영주들의 지원을 받으며 급속히 세력을 형성했다. 결국에는 가톨릭교회를 옹호하는 황제 칼 5세와 이에 항거하는 지방 영주들이 교회분리파를 옹호하며 결성한 슈말칼텐 동맹세력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다. 복잡한 정치적 술수들이 얽히며 전쟁이 끝나고 아우크스부르크협약에 따라 영주의 신앙에 따라 해당 영지의 신앙이 결정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물론 백성들은 자신의 신앙에 따라 다른 영지로 이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협약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1618년에서 1648년 사이 30년 전쟁이 일어났고, 종내에는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각자 신앙이 보장되면서 전쟁은 막을 내렸다. 중앙집권제가 지방분권제로 변화되는 전환점에 교회 분리 운동이 큰 에너지를 공급한 셈이다.
 

프로테스탄트, 전례와 성음악 변화
 
이렇게 교회를 분리한 프로테스탄트(Protestant) 쪽에서는 신자들이 가톨릭교회에 대한 향수를 털어내기 위해 당면 과제가 있었다. 바로 전례와 성음악이었다. 처음으로 손을 댄 건 라틴어 사용을 금지하고 자신들의 언어인 독일어로 전례를 거행하는 것이었다. 라틴어가 이미 일반 국민들 사이에서 낯선 언어가 돼버린 당시 전례에서 모국어 사용은 대단히 충격적이었고 열렬한 호응을 얻었다. 거기에 독일어로 성경을 번역해 독일인이라면 누구나 성경을 읽을 수 있게 했다. 이때까지 가톨릭교회는 라틴어 성경만을 고집했고, 이는 성경을 성직자나 수도자들의 전용물로 만들었다.
 
또한 루터는 '코랄(Choral)'이라는 새로운 형식의 쉽고 대중적인 성가 형식을 고안해 냈다. 평신도들이 쉽게 배우는 성가 가사에 새로운 교리를 이식해 부르도록 한 운동은 커다란 효과를 거뒀다. 코랄은 또 지금까지 그레고리오 성가가 모든 음악의 소재가 됐던 역할을 대신해 독일 교회음악의 소재가 됐다.
 
루터는 성음악에 관심이 깊은 사제였다. 현악기인 류트(Lute)와 최고 음역의 관악기인 플루트(Flute) 연주를 즐겼고, 테너를 맡아 노래하기도 했으며, 조스깽 데 프레(1440~1521)의 음악을 좋아했다. 그래서 그는 코랄을 개척하면서 자신도 몇 곡을 직접 지었는데, '내 주는 강한 성이요(Ein feste burg ist unser Gott)' '깊은 고난에서(Aus tiefer Not)' 등이 대표적이다. 그렇지만 결국은 전문 음악가들의 도움이 절실했는데, 이 대목에서 요한 발터(1496~1570)가 등장한다. 처음부터 루터와 함께 활동한 발터는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첫 음악가다. 이는 당시 유럽 내에서 음악이 가장 빈곤했던 독일을 음악의 나라로 세우는 첫걸음이었다. 물론 그 전에 하인리히 이사악(1450께~1517)이나 오를란도 디 랏소(1532~1594) 같은 독일 출신 음악가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플라망 악파의 음악가들이며 주로 이탈리아 등지에서 활동했기에 독일의 음악전통과는 거리가 멀었다. 발터는 1524년에 「작은 성가책(Geystliches gesangk Buchleyn)」을 출판했고, 1526년에는 「독일 미사곡(Deutsche Messe)」을 발간했다.
 
발터를 잇는 프로테스탄트 음악가로는 속칭 '3S'로 불리는 하인리히 쉬츠(1585~1672)와 헤르만 샤인(1586~1630), 하인리히 샤이데만(1596~1663) 등을 꼽을 수 있다.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1685~1750)에 이르러서는 교회음악 분야에서뿐 아니라 세속음악에서도 유럽 음악을 선도하기 시작한다.
 
또한 영국 왕 헨리 8세는 1554년 자신의 이혼과 재혼을 허락하지 않는 교황청에 항거해 영국국교회(성공회)를 세웠다. 그러고나서는 독일 프로테스탄트와 같은 고민 속에서 영어를 전례에 도입하고 영어를 가사로 하는 전례음악을 발전시켰다. 초기 기초를 닦은 음악가로 토마스 탈리스(1505~1585), 윌리엄 버드(1543~1623)를 꼽을 수 있는데, 이들은 겉으로는 국교회를 위한 음악가로서 활동하면서도 속으로는 가톨릭신앙을 지켰다. 영국국교회 역시 자신들의 독창적 음악을 마련하는데, 가톨릭교회의 모테트에 대응하는 앤섬(Anthem) 형식이 그것이다. 또 전례도 미사에서 변형된 예배(Service)를 고안했는데, 이는 미사와 시간전례(성무일도)를 적당히 섞은 형태였다.
 

가톨릭, 라틴어 전례와 음악 그대로
 
반면 가톨릭교회는 교회 분리의 충격에서 벗어나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를 개최하는데, 여기서는 교리와 교회개혁뿐 아니라 전례와 전례음악에 대한 정비도 뒤따랐다. 이 공의회에 따라 전례 흐름과 잘 어울리며 가사 전달이 잘 되는 음악, 곧 팔레스트리나를 중심으로 하는 로마악파 음악이 장려됐다. 교회 분리라는 몸살에도 가톨릭 신앙에 꿋꿋하게 남아 있던 프랑스와 이탈리아, 스페인, 포르투갈 등지의 교회에서는 당연히 라틴어 전례와 라틴어 전례음악이 그대로 유지, 발전됐다.
 
민족사적으로 보면 게르만족과 앵글로족은 북유럽에서 야만시기를 함께 보냈고, 영어와 독일어도 먼 친척 언어다. 네덜란드어는 이 두 언어의 중간 혼합언어다. 결국 이 친척들은 가톨릭교회를 떠났고, 자신들의 언어에 따른 전례음악을 개발했다. 프랑스어나 이탈리아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는 옛 라틴어의 사투리에 속한다. 이들은 계속 가톨릭교회에 남아 라틴어 전례음악에 충실했다. 언어상 문제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지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세계 각국 교회가 모국어로 전례를 거행할 수 있도록 한 것은 늦은 감이 있지만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니다.

 

 

코랄(Choral) - 코랄 기원은 그레고리오 성가



가톨릭성가집에는 작곡자 이름을 쓰는 자리에 '코랄'이라고 돼 있는 곡들이 여럿 있다. 코랄(독 Choral, 영 Chorale)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독일의 표준적 음악 대사전인 「역사와 현대에 있어서의 음악(Die Musik in Ges -chichte und Gegen wart)」에서 코랄 항목을 찾아보면 "서방 가톨릭교회 전례에 사용되는 라틴어 전례문에다 단성부이고, 악기도 동반하지 않으며, 소위 말하는 교회선법에 따른 온음음계식 음악의 옷을 입힌 작품들의 총체적 개념"이라고 긴 정의가 나오는 것으로 시작한다. 또 코랄의 본고장인 독일에서는 그레고리오 성가 미사를 코랄 미사라고 하며, 이때 그레고리오 성가를 부르는 합창단을 '코랄 숄라(Choral Schola)'라고 한다. 이를 보면 코랄은 그레고리오 성가와 우선적 연관을 갖는다. 그러나 당시의 그레고리오 성가는 이미 몇몇 부분을 제외하고는 대중(Chorus)이 부르기에는 너무 어렵게 발전했다.
 
현재 독일에서 쓰는 신자용 전례서(Gotte slob)에 실린 코랄.
 

그레고리오 성가에 찬미가(Hymnus)라는 곡이 언제부턴가 발견되기 시작하는데, 이 곡들은 여러 절의 가사를 단순한 한 선율에 붙여 반복해서 부르는 유절(有節) 형식을 갖고 있다. 현행 시간전례에 나타나는 찬미가들이 바로 전형적인 예다. 마르틴 루터는 이 부분을 눈여겨봤을 것이다. 그래서 찬미가와 같이 여러 절로 이뤄진 가사를 만들고, 모든 절을 하나의 단순한 선율에 붙여 노래하게 했다. 이 코랄은 그레고리오 성가처럼 박자도 마디도 없는 자유로운 선율이었고, 아직도 독일 성가집에는 바로 이런 외형을 가진 코랄이 실려 있다. 결국 루터가 코랄을 발견했다는 표현보다는 코랄을 재발견했다는 표현이 더 어울리겠다.

프로테스탄트에서 시작한 코랄은 곧 독일 가톨릭교회에서도 발전했다. 마치 그레고리오 성가가 정선율로서 모테트나 미사곡의 기본 소재로 사용됐듯이, 이젠 코랄이 독일 교회음악에서 오라토리오와 칸타타 양식의 기본 소재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이 단순한 형식의 전례음악이 가톨릭교회에서도 신자 대중이 미사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데 큰 공헌을 하는 성가(찬송가)의 기원이 됐다. 영어로는 이 코랄을 '힘(Hymn)'이라고 하는데, 코랄이 처음에 그레고리오 성가의 찬미가(Hymnus)에서 기원했다는 생각을 뒷받침하는 명칭이다. 1967년에 반포된 '성음악 훈령(Musicam Sacram)'에서도 "대중성가(Cantus popularis sacer), 곧 전례적(liturgicus)이며 종교적인(religiosus) 대중성가"를 성음악에 포함하는데(제4항), 이는 바로 코랄에서 기원한 현재의 성가를 지칭하는 것이다.
 
[평화신문, 2013년 9월 8일,
백남용 신부(서울대교구, 교회음악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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