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례음악자료실

제목 가톨릭 문화산책: 성음악 (9) 교회음악의 새로운 지평, 베네치아 학파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3-12-01 조회수3,617 추천수0

[가톨릭 문화산책] <42> 성음악 (9) 교회음악의 새로운 지평, 베네치아 학파


복합창, 기악곡 등 발달에 기여, 교회음악 폭 넓혀



- 베네치아 악파 음악가 중 가장 유명한 인물인 몬테베르디.
 

트리엔트공의회(1545~63)에서 교회음악 방향이 설정되고, 팔레스트리나(1525~94)를 중심으로 로마악파가 작품 방향을 만들어 나감으로써 교회음악과 전례와의 관계가 정리됐다. 전례 흐름과 잘 어우러지고 가사가 잘 전달되도록 그레고리오 성가와 무반주 다성음악(Polyhony)이라는 제한선이 설정됐다. 이 설정은 전례에는 긍정적이었지만, 차후 음악사에서 보자면 교회음악이 음악 발전의 주도적 역할을 포기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르네상스 시대가 지나고 바로크 시대에 접어들면서 악기가 발달하고 기악이 엄청난 발전을 이뤄나가는데도 교회가 선도할 길, 적어도 함께할 길조차 없어진 셈이 됐다. 여기서 베네치아 악파의 등장은 음악사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역사적 배경

이탈리아 반도 동쪽 해변의 가장 북쪽에 위치한 베네치아는 습지대와 섬으로 이뤄져 있다. 이곳에 서기 421년부터 사람들이 모여 살았다고 하지만 확실치는 않다. 6세기께 도시가 건설되고, 697년에 오르소 이파토가 국가 수반인 초대 총독으로 선출돼 공화제 독립국가 형태를 이뤘다. 그 옛날에 민주적 의회가 있었고, 원로원과 10인 위원회도 있어 총독의 독주를 견제할 수 있는 공화제를 이뤘다는 사실이 놀랍다. 9세기 초에 주스티니아노 파르티치파치오 총독 시절에 트리부노와 루스티코 등 두 상인이 알렉산드리아에서 성 마르코 복음사가의 유해를 가져왔으며, 그때부터 지금까지 성 마르코는 베네치아의 수호성인이다. 지금도 성 마르코 성당과 그 앞 광장은 베네치아의 상징이자 중심이다.

베네치아는 동쪽 비잔틴 제국과 북쪽 신성로마제국, 서남쪽 교황령과 늘 정치적, 군사적 긴장 관계를 유지하며 번영을 이뤘다. 1453년 비잔틴제국 수도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고, 제국이 멸망한 뒤로는 오스만 튀르크 제국과 국경을 맞댔다. 그리스도교 국가들 쪽에서 보자면, 이슬람교도와 마주한 최전선에 있으면서 이슬람의 서방 진입을 저지한 나라였던 셈이다. 가톨릭 국가였지만 영토 싸움에서는 교황군과 자주 전쟁도 벌였고, 프로테스탄트와 로마 가톨릭교회의 분쟁에선 프로테스탄트 입장도 어느 정도 수용하며 중재를 함으로써 교황청의 미움을 사기도 했다. 1797년에는 나폴레옹 침공에 함락됐고, 1805년에는 나폴레옹의 영향권에 있는 이탈리아왕국에 강제로 편입되기도 했다. 1815년에는 오스트리아 지배 아래에 들어갔으며, 1866년 이탈리아왕국에 다시 편입돼 오늘에 이른다. 이같은 역사적 배경 때문에 트리엔트공의회 지침이 베네치아에서는 별 영향력이 없었고, 베네치아 악파는 독자적으로 교회음악의 길을 걸었다.
 

베네치아 학파의 기법과 양식

플라망 악파의 다성음악은 로마뿐 아니라 베네치아에도 동시에 전수됐다. 그렇지만 로마와 베네치아는 배운 것을 제각기 다르게 발전시켰다. 베네치아 악파에서도 무반주 다성음악을 옛 양식(Stile antico), 혹은 제1기법(Prima pratica)이라고 부르며 사용하기도 했지만, 독자적으로 네 가지 특색 있는 기법과 양식을 고안했다.
 
첫째로 단성음악(Homophony, 화성 위주 음악)을 꼽을 수 있다. 다성음악에서 각 성부가 독자적 선율을 갖는데 반해, 요즘 우리에게도 익숙한 단성음악 기법은 한 성부가 선율을 노래하고 다른 성부들은 거기에 화음을 맞춰 함께 진행하는 기법이다. 오늘날엔 지극히 당연시되는 이 기법은 베네치아 악파에서 태어났다.

둘째로, 복합창 형식의 발견이다. 팔레스트리나 음악에서도 합창단 편성의 다양한 변화를 통해 마치 복수 합창단이 노래하는 듯한 효과를 내기는 했었다. 그런데 베네치아 성 마르코대성당에서는 제대 양쪽 위쪽에 합창단을 하나씩 두고, 두 합창단은 때로는 번갈아, 때로는 함께 노래하곤 했다. 이런 복합창 형식은 독일의 프로테스탄트 음악가들에게도 전수돼 독일 바로크 시대의 중요한 표현방식이 됐으며, 오케스트라 '합주 협주곡(Concerto grosso)' 형식을 낳았다.

셋째로, 신 양식(Stile moderno), 혹은 제2기법(Seconda pratica)의 창안이다. 이는 몬테베르디에서 유래한 용어인데, 처음에는 불협화음의 사용 방법에 관계된 말이었다. 그러다 논쟁 과정에서 음악과 가사와의 관계에 관한 이야기로 변했다. 팔레스트리나 시대까지 음악은 가사가 음악에 종속됐지만, 몬테베르디는 자기 음악에서는 음악이 가사에 종속된다는 논지를 폈다. 이 기법은 독일어권에 절대적 영향을 끼쳐, 교회음악뿐 아니라 독일 가곡 리트(Lied)에서도 음악은 가사를 잘 전달하도록 작곡하는 것이 원칙이 됐다.

넷째로, 전례에서 악기를 사용하는 것이다. 제대 양쪽 합창단은 각자 자기 오르간과 오케스트라를 가졌다. 오케스트라는 합창단 반주뿐 아니라 순수 기악곡을 연주하기도 했다. 이 전통은 독일어권 교회로 전수됐고, 다음 세대에 오케스트라와 협연이 필요한 무수한 명작을 탄생시켰다. 독일 프로테스탄트 초기 음악가인 하인리히 쉿츠(1585~1672)는 베네치아로 유학해 안드레아 가브리엘리(1510~85)에게 사사하고 복합창 형식과 오케스트라 사용을 익혔다. 또 한스 레오 하슬러(1562~1612)도 베네치아 악파에서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베네치아 악파가 없었더라도 오늘날 우리에게 전례음악으로 널리 알려진 그 수많은 대곡들, 즉 대미사곡과 칸타타, 오라토리오 등이 창작돼 전해졌을까? 로마악파만이 존재했더라면 상상할 수도 없었을 터다. 기악곡 발달도 훨씬 늦춰졌을 것이다.

베네치아 악파 창시자는 하드리아노 빌레르트(1490~1562)로, 성 마르코 대성당에 그가 악장으로 부임하면서 독특한 악풍을 일으켰고 그의 제자인 안드레아 가브리엘리(1510~86), 안드레아 가브리엘리의 조카 지오반니 가브리엘리(1557~1612), 치프리아노 데 로레(1516~65) 등이 뒤를 이었다.

유명하기로는 단연 클라우디오 몬테베르디(1567~1643)를 꼽는다. 그는 오페라 초기 작곡가로도 유명하지만, 1610년 작곡한 '성모 축일 저녁기도(Vespro della beata Vergine)'는 바흐보다 한 세기 전에 발표됐는데도 규모나 악기 편성의 화려함에서 바흐 작품에 비해 손색이 없는 대단한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을 뿐 아니라 듣는 이를 놀라게 한다.

 

 

'빨강머리 신부' 비발디



오늘날에는 누구나 다 '협주곡의 아버지' 안토니오 루치오 비발디(1678~1741)를 안다.

그러나 1940년대까지만해도 비발디라는 음악가가 있었다는 사실은 전문가들만이 알고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비발디 바람이 불며 그의 음악이 세인들의 귀에 유행한다.

이유는 이러하다. 독일인들에게 근대음악의 아버지 바흐는 우상이자 음악적 자존심이었다. 그런데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바흐 음악을 연구하던 학자들이 이탈리아 출신 작곡가인 비발디 음악에서 바흐 음악과 비슷한 점을 아주 많이 발견했다. 예를 들면 바흐의 '브란덴부르크 협주곡'이 그랬다. 또 비발디 현악 합주곡 몇 곡을 바흐가 건반 악기용으로 편곡한 것도 확인했다. 그래서 바흐가 비발디 음악을 열심히 연구하고 배웠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래서 독일 사람들은 자존심을 접고 비발디 음악을 열심히 들었다. 이같은 바람이 세계에 퍼져 오늘날의 비발디가 재탄생한 것이다.

비발디는 성 마르코 대성당 바이올린 주자인 아버지 조반니 바티스타 비발디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 아버지에게 바이올린을 배워 그도 명 바이올리니스트가 됐다. 25세에 사제가 됐으나 건강이 나빠 사목을 하지 못하고, 음악만 하는 특별허락을 받았다. 특히 베네치아에 있는 불우한 어린 여성보호시설인 피에타 특수교육시설(ospidale della Pieta) 음악선생 직무를 맡아 여성들에게 바이올린을 가르치고 합주단과 합창단을 이끌었는데, 너무나 연주를 잘 해 베네치아의 관광코스에 낄 정도였다고 한다. 그 와중에 '빨강머리 신부님(il prete rosso)'이라는 애칭도 얻었다.

전 유럽에서 유명세를 떨치면서 그는 외국으로 자작 오페라 연주여행을 많이 다니게 됐고, 그러다 보니 본 직책을 소홀히해 교구 신임을 잃었다. 게다가 오페라 가수인 한 여성과 불미한 소문마저 돌았다. 그래서 교구 당국은 물론 시민들에게조차 외면당하고 1741년에 비엔나로 간다며 길을 떠난 뒤 행방이 묘연해졌다. 나중에 전해진 소문에 따르면 객사해 빈민 묘역에 묻혔다고 한다. 이 불행한 음악가는 사후 200년이 지나서야 다시 음악가로 인정을 받고 음악애호가들의 가슴속에 부활했으니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는 500여 곡의 기악곡과 40곡에 이르는 오페라에 모테트와 오라토리오, 칸타타 등을 작곡했다. 그 가운데 기악곡으로는 '사계', 합창곡으로는 '대영광송(Gloria) D장조'가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평화신문, 2013년 12월 1일,
백남용 신부(서울대교구, 교회음악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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