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례음악자료실

제목 토착화 성가에 관한 논의(1)
작성자이유재 쪽지 캡슐 작성일2001-04-16 조회수1,654 추천수5

찬미예수님!

알렐루야! 주 참으로 부활 하셨도다!

부활을 축하드립니다.

예전에 써놓았던 글인데 이번에 조금 수정해서 올립니다.

토착화 성가에 관한 저의 생각을 적은 글입니다.

글이 길어서 한 3~4회 정도에 걸쳐서 올려 드릴 생각입니다.

(너무 길면 읽기 지루하실 테이깐.)

글내용에서도 밝혔듯이 전적으로 이 내용은 저 개인적인 생각이며

저의 글 내용중 잘못된 것이 있으면 가차없이 지적해 주십시오.

또한 이글을 읽으신 분들이 이와 관련된 다른 많은 글들을 올리셔서

우리 천주교 토착화 성가 제작에 적으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토착화 성가에 관한 논의

 

서언

한국 가톨릭 교회도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거룩한 전례에 관한 헌장(Sacrosannctum Concilium)"에 의거 도착화에 관한 연구가 많이 진행되고 있다.

이종철 신부님을 중심으로 하는 '한국 성음악 토착화 연구원' , 가톨릭 음악원 등에서 훌륭하신 전문 연구원들을 중심으로 토착화 사업이 연구되고 있으리라고 본다.

나는 국악을 전공으로 공부한 사람도 아니고 또 작곡을 공부한 사람도 아니다.

그러므로 내가 써 내려갈 글의 상당부분이 옳지 않을 수도 있다.

다만 원하는 것은 이 글을 필두로 현장에서 성가대를 지도하거나 아니면 활동하고 있는 많은 분들이 토착화사업에 관한 의견을 개진 함으로써 우리 성음악을 만드는데 좋은 참고 자료로 활용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다.

 

1.자연적인 토착화

 

음악사적으로 볼 때 외래로부터 새로운 음악이 전래되면 대계는 그 나라의 토양에 맞게 적당히 변형이 이루어 진다.

오래 전부터 유럽은 하나의 문화를 유지 하고 있었다고 하지만 영국과 독일과 프랑스, 이태리의 음악문화에는 차이가 있다. 예술가곡의 경우만 보더라도 프랑스의 샹송과 독일의 리트, 이태리의 가곡, 영국의 가곡은 많은 부분에서 다르다. 그것은 그 나라의 언어와 정서에 맞게 음악이 토착화 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종교에 있어서도 예외는 아니어서 기독교가 전파되면 그와 함께 들어온 많은 문화들이 그 나라의 토양에 맞게 변화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아프리카의 흑인들이 미국으로 건너가 신앙을 알게 되자 그들은 자신들이 기존에 알고 있던 아프리카 음악에 서양음악을 합쳐 '흑인영가'라는 새로운 장르를 탄생시킨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공자의 제'때 연주되어지는 궁중음악인 '향악'이 있다고는 하지만 이도 많은 부분이 중국의 음악과는 다르게 토착화 되었고 '아악'이라는 중국음악과는 완전히 다른 음악을 탄생시켰다.

그렇다면 시간을 갖고 기다리면 자연적으로 성음악의 토착화가 이루어 질 텐데 왜 토착화를 연구하고 논의해야 하는가?

그것은 일제36년간 우리문화의 단절과 급속도로 유입되어 버린 서양문화때문이 아닐까.

이제는 자연적인 변화를 기다리기에는 너무 약해져 버린 우리음악을 갖고 있는 것이다.

이는 비단 우리뿐 아니라 대부분의 동양 문화권 국가에서 느끼는 문제일 것이고 더구나 36년간 우리문화 단절을 겪은 우리나라에 있어서는 더욱 그러하다.

토착화란 그 나라 문화의 토양 안에서 새로 유입된 문화가 섞이는 과정이다.

그러나 문화의 토양이 없다면 토착화는 이루어 질 수 없으며 다만 그 나라의 문화가 새로 유입된 문화에 종속되어질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성가토착화 사업은 우리 음악의 기반을 다지는 데서부터 시작 해야한다.

 

2. 우리의 음악을 생각해 보자.

 

나는 요즘 속속 발표되는 우리가락 성음악에 불만이 있다.

우리 음악에는 아주 다양한 장르가 존재한다.

그런데 너무 한쪽으로만 치우쳐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우선 토착화 사업을 위해서는 우리음악에 대하여 보다 다양한 부분에서 연구하고 생각해 보는 것이 선결 과제일 것이다.

 

우리는 흔히 우리의 문화를 '한'의 문화라고 이야기 한다.

그리고 우리의 음악역시 '한'이 서려있고 '더욱 애절하게 우리 마음에 와 닿는다.'라고 이야기 한다. 또 국악은 곧 우리의 음악이기 때문에 훨씬 친근해 질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생각에 절대 반대한다.

 

첫째 왜 우리의 문화를 '한'의 문화라고 이야기 하는지 모르겠다.

방송에서 국악 중에서 슬프고 애절한 음악을 연주해 주고는 '우리의 음악에는 한이 서려 있습니다.' 라고 이야기 할 때 마다 화가 난다. 세상에 어느 나라든 슬프고 애절한 음악은 갖고 있다. 그러면 그 나라들은 모두 '한'이 있는가.

오히려 우리의 음악은 '한' 보다는 '락'이 많다.

선비들은 가사나 시조를 통해 세상의 아름다움을 노래했고 벗이 찾아옴을 노래했다. 민중들은 힘든 노동을 보다 즐겁게 하기 위하여 노래라는 도구를 이용했다.

심지어 우리는 책을 읽을 때도 가락을 붙여 읽을 정도로 음악을 사랑했으며 즐겼다.

풍류를 제1의 '도'로 여기고 살아온 우리 민족의 정서를 왜 '한'이라는 슬픔의 단어와 연관을 지어버리는지 모르겠다.

 

둘째 과연 현실적으로 '우리의 음악이 더욱 우리의 마음에 와 닿는가'에 관한 의문이다.

어려서의 음악적 환경은 그 사람의 일생에 매우 중요한 작용을 한다.

지금 나이 20대에서 40대의 분들은 어려서 부터 서양의 음악을 들으며 자라왔다.

또 그 이전의 분들은 일본의 음악을 들으면서 자랐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어려서 동요를 듣고 젊어서는 팝송이나 가요를 들으며 커서는 트롯을 듣는다. 이 모두는 화성 음악이다.

(트롯은 일본의 가부끼 음계를 사용한다. 서양음악이 일본에서 토착화된 예라 하겠다. 따라서 성인이 되면 트롯을 좋아하게 되는 이유는 일제의 잔재가 아닐까 생각한다. 하지만 이 부분은 검증되지 않은 부분이므로 절대 내 개인적인 생각임을 밝힌다.)

클래식은 바로크 이후의 음악은 대부분 화성음악이며 우리는 이 음악들에 쉽게 친해 진다.

하지만 국악은 그렇게 쉽게 친해지지는 못한다. 실제로 TV등에서 방영되는 국악방송은

언제나 시청률에서 최하위권에 머문다.

즉 성가의 토착화를 연구함에 있어서 '우리 음악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보다 쉽게 신자들에게 보급되어 질 것이다' 같은 안일한 생각은 버려야 한다.

정말 아름답고 질적인 음악을 만들어 내지 않으면 서양음계로 만든 음악보다 언제나 뒷 전에 있을 것이다.

 

- 다음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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