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당신부의 지상 교리] 교회가 무엇인가요? 성당에도 도둑이 있어요? 교회는 하느님의 백성 주일미사 후에 성당 마당에서 어느 자매님이 “성당에도 도둑놈이 다 있느냐? 어떻게 성당에서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면서 목소리를 높였다. 무슨 일인가 싶어 다가가서 내용을 들어보니, 미사 때 성체를 받아 모시고 제자리로 돌아오니 가방이 없어졌다는 것이다. 세례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초심자라 실망과 충격이 더욱 컸을 것임은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는다. 성당 안에서 이런 도둑은 마땅히 없어야 한다. 그러나 도둑이나 죄인이라고 해서 성당에 들어올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달리 말해, 교회는 의인들만의 집단이 아니다. 부족하고 허물 많은 죄인들이 모여서 자신의 나약함을 뉘우치고 새롭게 살아가려는 위로와 용기를 얻는 따뜻한 자리가 교회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하느님 백성 전체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공동체를 이루고 살아가는 모임’이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는 특정 계층이나 집단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약자와 죄인까지도 하느님의 자비와 위로를 얻도록 그 역할을 다해야 한다. 곧 교회는 어떤 자격이나 신분을 기준으로 구성원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함께 모여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며 친교를 나눌 때 교회, 곧 하느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다. 교회도 동호회 모임과 비슷한가요? 일치와 친교가 살아있는 교회 : 요즘 동호인들의 친교 모임이 대단히 많다. 교회는 이런 동호회와는 그 차원을 달리한다. 교회는 고상한 취미활동의 공간이 아니며, 교양이나 도덕적으로 수준이 통하는 사람들의 모임이 될 수 없다. 그럼에도 신앙의 근본인 일치와 사랑보다 인간적 친교가 더 우선시되는 각종 단체나 모임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친목회의 경우 인간적인 재미나 유익함이 없으면 더 이상 존속하기 어렵다. 그러나 교회 공동체의 중심은 구성원의 인간적 친교가 아니라 바로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러므로 교회는 언제 어디서나 예수 그리스도를 그 중심에 모시지 않으면 그 모양이 아무리 크고 화려해도 교회일 수 없다. 교회 구성원들 사이의 친교는 결코 비슷한 취미나 운동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친교이며 섬김이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나와 수준이 비슷하고 경제적 능력이나 교양이 통하는 사람들끼리의 모임들이 교회 안에 자리 잡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인간적으로 능력이 뛰어남에도 예수님처럼 자신을 낮추는 겸손과, 나약하고 힘없는 구성원을 받아들이는 친교가 있어야, 사랑이 살아 숨쉬는 교회 공동체라고 할 수 있다. 사회적으로 신분에 따른 대우와 차별이 분명했던 조선시대에 천민과 양반이 한자리에 모여 서로 존중하고 하느님 안에서 형제자매로 받아들인 우리 조상들의 삶이 바로 교회의 참된 전형이다. 교회가 맞나요? 성당이 맞나요? 일반인들은 교회는 개신교(프로테스탄트), 성당은 천주교로 피상적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우리가 말하는 교회는 눈에 보이는 건물이 아니라 ‘하느님 백성의 모임’ 곧 집회를 뜻하기에, 신자들의 모임이 없는 교회는 있을 수 없다. 화려하고 웅장한 교회 건물이 없어도 소박한 장소에서 두셋이 모여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하느님께 예배를 드리면 그 모임이 바로 교회가 되는 것이다. 성당은 이러한 하느님 백성이 모여서 공적으로 기도하는 장소, 곧 공간을 말한다. 그러므로 “성당에 간다.”는 말은 맞지만, “성당을 믿는다.”는 말은 있을 수 없다. 잘 모르는 사람들은 천주교 신자는 성당을 믿는 사람이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성당을 믿는 것이 천주교가 아니다. 그러므로 “교회를 믿는다.”는 말은 바로 “눈에 보이는 하느님 백성을 이끌어가는 거룩한 성령의 활동과 능력을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신앙의 보물을 담고 있는 교회의 모습들 교회가 거룩하다고 말하면 어떤 사람들은 이 말에 동의하기에 앞서 교회의 잘못을 더 크게 문제 삼기도 한다. 하느님 백성에게 나약함과 허물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교회가 거룩하다는 것은 교회가 인간에 의해 세워지고 통제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세워지고 유지되기 때문이다. 2,000년이라는 교회 역사를 통해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지금까지 교회가 살아온 것은 분명 성령께서 함께하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제자들과 사도들의 거룩한 희생과 죽음 위에 세워진 교회이기에, 어떠한 인간적 욕심이나 불순한 야망 때문에 교회가 무너지지 않는 것이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마태 16,18). 교회의 모든 거룩함이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것이기에 그리스도에 힘입어 교회는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이 된다. 가톨릭 신자는 생활 속에서 가톨릭교회의 구성원으로 살아간다는 자부심을 느낄 때가 많다. 지하철이나 버스 안에서 묵주반지를 낀 이웃을 만나면 나와 같은 신앙을 지닌 형제자매로 금방 대화가 이루어진다. 또한 전 세계 어디에서 어떤 언어로 미사를 지내더라도 전혀 이질감을 느끼지 않는다. 세계에 흩어져 있는 교회 공동체의 언어와 문화는 서로 다르지만, 같은 전례와 일치의 정서야말로 가톨릭교회가 지닌 복되고 거룩한 보물과도 같은 것이다. 우리에게 위로가 되는 가르침 성인들의 전구(통공 교리) : 예비신자들이신앙에 입문하면서 가장 마음에 와 닿는 교리 가운데 하나가 성인들의 통공 교리일 것이다. 우리 신앙은 이 세상에서 자신만의 구원을 지향하지 않고, 모든 산 이와 죽은 이의 구원을 위한 연대성을 품고 있다. 속죄와 정화 가운데 있는 연옥 영혼들이 하늘의 수많은 성인성녀들과 지상 신자들의 도움으로 천상 영광에 참여할 수 있다는 복된 희망은 그 영혼들뿐 아니라 살아있는 우리 모두에게도 든든한 희망이다. 특히, 오랫동안 절에 다니다가 천주교로 개종하려는 예비신자들의 경우, 부모님의 제사 문제로 고민할 때 성인들의 통공 교리를 설명하면서 우리가 죽은 이들을 위하여 바치는 기도와 희생이 그 영혼의 구원에 반드시 도움이 된다고 하면 대개 위로를 받고 안심하게 된다. 돌아가신 우리 부모님도 나약한 인간으로 이 세상에서 지은 죄가 분명 있을 것이고, 그 때문에 연옥에서 정화의 과정에 있을 때 자식들이 그 부모님을 위해 바치는 복되고 거룩한 기도와 희생은 그 무엇보다도 값진 선물이다. 아울러 죽은 이들이 죄 사함을 받도록 바치는 기도는 그들을 도울 뿐 아니라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구원에도 의미가 있는 것이다. 포도나무와 여러 줄기가 연결되어 한 생명을 이루는 것처럼 지상, 연옥, 천국에 있는 수많은 영혼들은 한 그리스도의 생명에 결합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이 생명의 친교이다. 교회의 거룩함을 이어가는 의인과 성인들 교회의 거룩함의 영속성 : 교회의 거룩함은 개인의 영웅적인 희생과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결코 아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에 따라 각자의 삶을 살아가는 하느님 백성 전체의 거룩한 생활을 통하여 교회 안에 거룩함의 물결이 흐르는 것이다. 그렇지만 성령께서는 시대마다 늘 거룩함의 모범이 되는 의인과 성인들을 통해 교회가 성찰하고 쇄신함으로써 거룩함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이끌어주신다. 마더 데레사 수녀,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이태석 신부, 김수환 추기경 같은 분들이 하느님께서 이 시대의 교회에 주신 거룩한 선물의 주인공들이다. 하느님께서는 이러한 분들을 통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하느님의 거룩함을 일깨워주시고 교회를 통해 그런 복된 삶을 계속해서 이어가게 하신다. * 최경환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 1987년 사제품을 받았으며, 현재 대구대교구 범어본당 주임신부이다. [경향잡지, 2011년 5월호, 최경환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