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훈 주교에게 듣는 신앙과 경제] (4) 교회 눈으로 바라본 가난의 참모습 육체를 지닌 인간은 물질없이는 한순간도 살 수 없습니다. 이에 대한 지나친 소유욕은 소위‘다 걸기’로 나타납니다. 오늘날 무한 경쟁 시대, 입신출세 지상주의가 그 결과입니다. 도대체 가난의 참모습은 무엇입니까? 지금 우리 사회는‘가난’의 문제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가난은 그 자체로 악한 것이고 극복해야 할 대상입니다. 그러나 가난의 척도나 범주는 다양하고, 한 인간이나 집단의 사상과 인격적, 지적, 영적 시각에 따라 가난을 보는 입장과 해석은 매우 다릅니다. 상대적 빈곤이라는 말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가난을 보는 잣대가 달라졌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과 위대한 성현들께서 실천한 가난은 인류에게 불변하는 만고의 가르침입니다. 언젠가 시사주간지에 우울한 기사 하나가 실렸습니다. ‘집이 가난하면 꿈도 가난하다’는 기사였습니다. 한 국회의원실의 보고서를 기초로 한 이 기사에서는 이른바 강남 3구라고 불리는 서울 강남, 서초, 송파구와 관악, 구로, 금천구 등 강북지역 초중고 아이들의 꿈을 비교하며 가난하면 꿈도 가난하다는 분석결과를 내놓고 있었습니다. 강남 3구의 아이들 경우 의료인, 법조인, 교수, 연구원 등 이른바 고수입이 보장된 사회를 주도하는 직업군에 대한 선호도가 높은데 비해, 관악, 구로, 금천구 아이들은 직업안정성이 높은 교사, 회사원, 공무원 등에 대한 선호가 높게 나타난 것입니다. 이러한 양극화로 가는 현상은 고등학교와 대학교로 갈수록 심화되고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갈수록 부의 편중이 심해지고 사회양극화가 심화되는 사회구조에서‘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은 통하지 않습니다. 열심하고 성실하게 살면 무엇이든 성취할 수 있다는 과거 서민들의 성공은 아득한 전설이 되고 있다는 말입니다. 빈곤한 집의 자녀들은 경쟁사회에서 좌절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의 꿈마저 양극화되고 있는 현실 앞에 교회는 온 백성에게 어떤 건전하고 균형잡힌 가르침을 내놓아야 할까요? 물론 근본적으로 직업에 귀천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세상을 보는 척도가 젊은 세대의 꿈과 이상까지도 억압하고 왜곡시킨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질적 가난과 낮은 꿈과 이상의 대물림이라는 등식이 성립하는 것은 매우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러한 가난의 문제는 교회와 사회가 함께 풀어야 할 과제입니다. 교회의 삶의 자리가 세상이고, 바로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을 주님께 바르게 인도해야 할 사명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가난의 문제와 함께 사회의 여러 가지 사안들에 대한 적절한 가르침을 끊임없이 내놓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가난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아야 하겠습니까?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좋은 교과서라 할 수 있는 주님의 말씀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성경에는 가난을 의미하는 말이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우선 구약에는 사회적 약자, 타인의 보호와 도움이 필요한 자인 ‘에비욘(ebyon)’을 비롯해 신분과 지위 따위의 명예와 관련된 가난인 ‘달(dal)’, 가난의 일반적인 형태인 사회, 경제적 가난인 ‘라쉬(ras)’, 가난에 대한 가장 강한 의미로 사회적인 불의와 억압에서 빚어진 가난인 ‘아니(ani)’, 종교적인 의미로서 고난과 고통을 통해 영적으로 겸손한 자를 뜻하는 ‘아나우(anaw)’ 등 가난과 관련된 다양한 어휘들이 등장합니다. 구약에 이토록 가난과 관련된 말이 많다는 것은 이미 구약시대인 오래 전부터 가난은 인간이 세상에 출현한 이래 그대로 방치하거나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바라만 볼 수 없음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가톨릭신문, 2011년 6월 5일, 이용훈 주교(수원교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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