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훈 주교에게 듣는 신앙과 경제] (5) 가난한 이웃 돌보는 일은 우선적인 선택
주님은 가난한 이들을 당신과 동일시여겨 구약뿐 아니라 신약에서도 가난의 다양한 실태를 엿볼 수 있는 말들을 찾을 수 있습니다. 우선 가장 저급한 경제상황으로 생계를 위해 일을 해야만 하는 가난인 ‘페네스(penes, πενηζ)’와 페네스와는 달리 비참한 생활조건으로 도움이 필요한 절대적인 가난의 상황에 놓인 ‘프토코스(ptochos, πτωχοζ)’가 있습니다. 프토코스는 ‘거지’ 혹은 ‘아주 가난한 사람’을 의미하지만 ‘하느님 앞에 비천한 사람’이라는 종교적 의미와 어감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상황에 비추어 보면 ‘상대적 가난’과 ‘절대적 가난’의 개념이 이미 2000여 년 전인 예수님 시대에도 일상적으로 쓰일 정도로 가난의 문제는 인류에게는 오래 전부터 화두가 되어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듯 인류 역사만큼이나 다양한 형태를 지닌 가난의 실체를 살필 때 유의해야 할 것은 가난을 단지 물질적인 부분에만 한정시킬 것이 아니라, 정치·경제적이면서 정신적, 영적인 부분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두고 성경을 좀 더 들여다보면 구약에 나타난 ‘가난’의 내용을 두 가지 관점으로 볼 수 있습니다. 우선 선민(選民) 사이에는 가난이 존재하는 사실 자체가 불의하다는 것입니다. 가난 속에 산다는 것은 이미 인간사이의 유대와 인간과 하느님 사이의 친교가 파괴된 것이기에, 더 이상 하느님 사랑이 머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자연히 가난은 죄가 표면에 드러난 상징이고 표징이 된다는 것입니다. 둘째,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체험한 물질적 가난은 그들을 영적 성장으로 이끌었으며, 그들 안에 ‘야훼의 가난한 사람들(anawim)’의 모습으로 드러났습니다. 여기서 가난은 하느님을 맞아들이는 자격을 얻는 것이며, 동시에 하느님께 대한 자기 자신의 모습 전부를 맡기는 모습으로 나타나는데, 이것은 후기 유다 사상에서‘하느님 앞에 겸손한, 그분께만 의지하는’영적인 가난의 개념으로 자리잡게 됩니다. 신약의 복음사가 가운데 마태오 성인이 쓴 복음서는 가난의 물질적 측면과 영적인 측면 모두에 초점을 두고 전개되고 있습니다. 마태오는 하느님께 향해야 할 삶의 모습으로‘마음의 가난함’을 말하고 있으며, 영적인 차원의 의지적인 가난도 반드시 하느님 나라를 위해 필요한 덕목으로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영적인 가난은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를 향한 전적인 신뢰와 투신을 바탕으로 하며, 나아가 핍박받고 소외된 이들을 위한 희생적이고 열린 사랑으로 자신의 가진 모든 것을 나누고 내어주는 봉사적인 삶의 자세입니다. 이는 인간의 행복과 해방, 영원한 삶을 위해 온 몸과 마음으로 인류를 사랑하신 예수님의 실존 그 자체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 몸소 보여주신 가난의 궁극적 언어와 실천은 바로 ‘사랑’의 구체적 열매이고 결실입니다. 하느님과 인류의 화해와 사랑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가난을 선택하였고, 가난의 절정이라 할 십자가의 죽음까지 받아들이셨습니다. 이런 면에서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사람들을 당신 자신과 동일시 여기시며, 가난한 이들 안에서 자신의 현존과 본래의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상적인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물욕을 포기하려는 노력’으로 가난을 선택하고 사랑하였으며, 가난한 이들을 돌보고 보살피는 일은 우선적인 선택사항이며,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교회 사도직의 과제로 삼았습니다. 이렇게 초대교회는 예수님의 삶을 ‘나눔’으로 본받고 실천에 옮겼습니다. 이렇듯 성경은 당시의 시대적 사회적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며, 가난이라는 악을 극복하고, 가난이 몸에 배이도록 익혀나가는 지혜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교회의 과제는 변함없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런 현실에 대해 가톨릭교회는 사회회칙을 통해 가난한 이들을 향한 관심을 늘 우선적으로 표명해오고 있으며, 가난한 이들을 억압하는 사회상황에 대해 가차없는 비판과 함께 의식전환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가톨릭신문, 2011년 6월 12일, 이용훈 주교 (수원교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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