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훈 주교에게 듣는 신앙과 경제 (21) 교육분야에도 만연한 계층 간 불균형
과도한 사교육 경쟁 … 상위 소수 대학에 집중
부익부 빈익빈 현상을 더욱 가속화시키는 ‘마태오효과’가 날로 커지면서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서는 인간미를 바탕으로 하는 사람 냄새가 사라지고, 명품과 유행, 외적이고 물적인 가치 등을 숭상하는 비정한 모습으로 포장한 허상이 깊숙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멀지 않은 과거와 비교해 보더라도 자본주의 체제는 하루가 다르게 급격한 변화와 함께 문명의 이기와 편리를 추구하고 있지만, 계층 사이의 불균형은 많은 이들에게 심각한 고독과 소외의식을 심어주고 있습니다.
자본주의 생산체제 자체가 비도덕적이거나 무가치한 것은 결코 아니지만, 무한 경쟁을 통해 세상의 부가 소수의 한 계층의 전유물로 자리 잡고, 대중들이 기본적인 인간적 생활과 생계를 위협받게 된다면, 지배 계급과 피지배 계급 사이의 피나는 투쟁의 길이 펼쳐질 수밖에 없습니다. 사용자와 노동자, 부유층과 빈곤층, 특권층과 소외계층 사이의 적절한 존중과 상생, 나눔의 길이 막혀 있다면 노동자, 빈곤층, 소외계층으로부터 사회주의 정신은 자연발생적으로 싹트게 됩니다. 우리 사회에서도 보수와 진보, 우파와 좌파의 이념적?현실적 논쟁이 적대적인 수준에서 뜨거워지고 있습니다. 무한 경쟁과 소비를 미덕으로 삼는 절대적 자본주의와 시장경제 체제, 이익과 효율성만을 궁극적인 가치로 삼는 일, 외적 능력에 따라 사람에게 등급을 부여하는 일 등은 하느님의 뜻과 정반대로 가는 것입니다. 인간은 경제적 이익과 성과로만 평가할 수 없습니다. 인간에게는 인정, 동정, 사랑, 우애, 효도, 봉사, 신앙, 영원한 생명의 추구 등을 실천하는 위대한 모습이 숨어있으며, 이는 외적인 수치와 잣대로 읽을 수 없는 것입니다. 경제적 이익과 효율이라는 관점에서만 사람을 본다면, 나치의 유대인 학살도 정당화될 수 있습니다. 나치의 이념과 체제는 노동력 없는 노인, 장애인, 어린이는 아무 희망과 기대를 걸 수 없는 무익한 존재들로 보았습니다.
자본주의가 지닌 모순의 한 측면을 보여주는 마태오효과는 경제뿐 아니라, 우리 삶에 있어 가장 중요한 부분인 교육적인 면에서도 나타납니다. 단적인 예가 우리 사회의 화두로 떠오른 대학등록금 문제입니다. 우리나라의 대학등록금은 미국 다음으로 높은 수준입니다. 국가의 경제력이나 장학금 혜택 수준 같은 것을 감안하면 사실상 세계 최고라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된 가장 큰 이유는 한국의 대학교육이 기본적으로 사학(私學)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 국내 전체 대학에서 사립대학이 차지하는 비율은 80%가 넘습니다. 이는 국가적 차원의 백년대계라 할 대학교육이 사적인 영역 중심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뜻합니다. 국가와 사회가 힘과 여력이 없어 사학이 중등교육과 대학교육의 전면에 나서 학교를 설립하고 운영해온 기여도를 과소평가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사학도 대기업이나 재벌이 운영하는 곳과 그렇지 못한 종교재단, 소규모 재단 사이의 재정자립도도 큰 차이를 보입니다. 이렇다 보니 각 대학별로 내놓고 있는 장학금만으로는 등록금 문제가 해결될 수는 없는 구조적 문제가 우리 사회에 내재해 있는 것입니다.
한국 대학교육 문제의 핵심에는 굳게 유지되고 있는 대학 서열 구조가 있습니다. 서열 구조의 상층부에 자리 잡은 대학들은 엄청난 적립금이나 발전기금이 있음에도 등록금을 올립니다. 대학 재정 상태도 차이가 많이 있기에 동일한 척도로 예단할 수는 없으나, 등록금이 아무리 비싸도 학생들은 대학으로 몰려오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대학입시는 사교육 경쟁의 장이 된 지 오래입니다. 학력신장 측면에서 보면 방과후 사설학원이 지대한 몫을 하며, 정규 중고등학교의 역할은 매우 축소되어 있습니다. 입시 지원자들이 대학입시를 위해 한 해 동안 학원비, 입시 전형료 등으로 지출해야 하는 돈만 해도 상상을 초월합니다. 이 때문에 우리 사회에서는 사교육에 돈을 많이 쓴 부유한 가정 학생들이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높은 서열의 대학에 들어가고, 이들이 졸업해 사회의 고위 지도층에 자리 잡게 되고, 다시 이들의 자녀가 유수의 대학으로 들어가 마태오효과는 교육분야에서도 고착화되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가톨릭신문, 2011년 11월 13일, 이용훈 주교(수원교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