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당신부의 지상 교리] 영원한 삶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사람은 죽음으로 이 세상 삶을 마칩니다. 우리 몸은 화장으로 순식간에 한 줌의 재가 되거나 땅에 묻혀 썩으면서 서서히 흙으로 돌아갑니다. 영혼은 어떻게 될까요? 영혼도 육신처럼 이렇게 소멸되어 없어질까요?
죽음, 그다음엔… 그냥 끝장인가!?
교회에서는 영혼의 불사불멸을 가르칩니다. 영혼은 죽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몸이 죽은 뒤에도 영혼은 육신을 떠나서 계속 살아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음을 새로운 삶으로 옮아가는 과정으로 고백합니다(위령 감사송 1, “주님, 믿는 이들에게는 죽음이 죽음이 아니요 새로운 삶으로 옮아감이오니…” ).
교리에서는 영원한 삶(생명)을 얘기할 때 보통 죽음, 종말, 심판(개별심판과 최후심판), 부활, 천국과 연옥 그리고 지옥에 대해서 가르칩니다. 죽음이라는 관문을 통해서 영혼은 하느님 대전으로 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상에서의 삶을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 심판을 통해서 영원한 복락과 영원한 벌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즉시 영원한 복을 누리기에는 약간의 허물이 있는 영혼은 연옥이라는 정화과정을 통해서 천국에 오르게 됩니다.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버리고 영원히 살지 않는다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지상에서의 삶이 중요하다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난다면 굳이 하느님을 믿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면서 자선을 베풀고 사랑을 베풀면서 살아갈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그냥 되는 대로 최선을 다해서 ‘먹고 마시며 즐기면서’ 살다가 가는 것이 오히려 현명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영생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지금 이 자리에서 영원한 삶(생명)을 준비하는 삶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특히 물질문명에 집착하면서 때로는 물질의 노예로 살아가는 우리들이 이미 시작된 영원한 삶을 지금 여기서 어떻게 준비해야 할까요? 아니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영원한 생명 문제로 고민하던 사람이 예수님께 와서 물었습니다. “선하신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마르 10,17; 마태 19,16; 루카 18,18 참조). 이미 우리가 하고 싶었던 질문을 벌써 누군가 한 것입니다.
그래서 저도 영원한 생명에 대한 준비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여기서부터 실마리를 풀어갈까 합니다.
예수님은 이 질문에 대해서 먼저 계명을 잘 지키라고 권고합니다. 계명의 핵심은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다른 사람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이웃 사랑입니다. 기특하게도 그 사람은 이런 계명들을 어려서부터 잘 지켜왔다고 답을 합니다. 웬만하면 그렇게 계속 살면 영원한 생명은 보장이 되었다고 격려해 줄 수도 있으련만 예수님은 그것만 가지고는 모자라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어라.”(루카 18,22) 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야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고 나서 당신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유감스럽게도 그 사람은 이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떠나게 됩니다. 가진 재산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랍니다.
어떤 낙타도 바늘구멍을 통과할 수는 없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마태 19,24). 이 말씀은 그 사람이 떠난 다음 제자들에게 따로 설명해 주시는 말씀입니다. 낙타는 바늘구멍을 빠져나갈 수 없습니다. 불가능합니다. 그러니까 여기까지의 말씀은 부자가 구원(영원한 생명)을 받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뜻입니다.
여기에는 착한 부자, 나쁜 부자의 구분이 없습니다. 말 그대로 ‘모든 부자’입니다. 그리고 모든 부자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부정직하게 재산을 모아서 나쁘게 사는 부자들이야 당연한 거라지만, 열심히 땀 흘려 벌고 정직하게 사는 부자도 그렇다는 것인지 좀 당황스럽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의 입장은 단호합니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
부자는 구원을 받을 수 없는데, 예외가 있었습니다. 바로 자캐오입니다. 자캐오는 루카 19장에 나오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세관장이었고 부자였다고 소개됩니다. 이 사람에 얽힌 이야기는 재미있습니다.
자캐오는 키가 아주 작았습니다. 그래서 지나가는 예수님을 보려고 했지만 군중에게 눈앞이 막혀서 볼 수가 없었습니다. 앞질러 달려가서 나무에 올라갑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예수님을 뵙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일이 생깁니다. 그 자캐오를 예수님께서 쳐다보시면서 부르신 것입니다.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5절). 자캐오는 서둘러 내려와서 예수님을 기쁘게 모십니다. 이렇게 해서 예수님은 그 죄인의 집에서 머무르게 됩니다.
여기서 자캐오는 놀라운 선언을 합니다. “보십시오,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하였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8절). 자캐오는 세관장이었으니 부정이 없었을 리가 없습니다. 그것을 네 곱절로 갚겠다고 했으니 실제로 자기 재산의 전부를 주겠다고 한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이 말씀을 듣고 예수님은 자캐오에게 구원을 선포합니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루카 19,9)
부자는 구원받을 수 없다?
그러니까 부자도 구원을 받을 수 있네요. 단, 그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과 나누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부자는 구원을 받을 수 없지만 자기가 가진 것을 가난한 사람들과 나눌 때에는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말한 ‘구원받지 못하는 부자’는 착하고 악하고를 떠나서 ‘나누지 않는 부자’인 것입니다. 더 나아가 재산의 많고 적음을 떠나서 나누지 않는 사람은 구원받지 못하는 부자에 해당이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가난한 사람도 나눌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꽃동네도 거렁뱅이 할아버지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거지들이 자기 것을 나누기는 상당히 어렵습니다. 그런데 이 할아버지는 자기가 동냥한 것을 아껴서 동냥을 할 수 없는 다른 거지들에게 나누어주며 돌보았습니다. 꽃동네는 이렇게 시작이 된 것입니다.
‘지금 여기서’ 나누는 삶이 최선의 준비다
누구나 피해갈 수 없는 죽음, 또 다른 새로운 삶, 영원한 삶은 지금 여기서 이미 시작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갑니다.
그러나 학생들이 시험을 치르면 성적표가 따라오듯이, 이 세상에서 어떤 삶을 살았는가 하는 성적표가 우리의 빈손 위에 얹어집니다. 마태오 복음 25장의 최후의 심판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이 이를 입증합니다.
예수님의 심판 기준은 너무나 뜻밖입니다.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라고 하시면서 가장 보잘것없고 불쌍한 사람들에게 얼마나 베풀면서 살았는가 하는 그 한 가지만 보신다는 것입니다.
“너희는 가진 것을 팔아 자선을 베풀어라. 너희 자신을 위하여 해지지 않는 돈주머니와 축나지 않는 보물을 하늘에 마련하여라. 거기에는 도둑이 다가가지도 못하고 좀이 쏠지도 못한다”(루카 12,33).
영원한 삶의 준비는 가진 것을 나눌 때 이루어지게 됩니다. 이것이 하늘에 보물을 쌓는 것입니다.
* 정인화 야고보 - 인천교구 신부. 1991년 사제품을 받았으며, 현재 부평4동본당 주임으로 있다.
[경향잡지, 2011년 11월호, 정인화 야고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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