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동호 신부의 생생 사회교리] (7) 재화 사용의 보편적 목적 (2) 사유재산권은 절대적이며 침해할 수 없는 것이라 인정한 적 없다
내 것, 나만의 것 아니다
사유 재산권에 앞서는 공동사용권
과연 재화의 소유권은 절대적인가? 어느 지역이 재개발 예정지구나 신도시 개발지역으로 묶여 개발이 제한됐다고 상상해보자. 이러한 상황에서 분쟁과 갈등이 끊임없이 발생하는 이유로 그 지역에 토지와 주택을 소유한 사람의 권리(사유 재산권)와 이해관계 등을 들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사유 재산권이 절대적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말하자면 주거환경 개선 혹은 공익을 위해, 혹은 공동선을 위해 개인 소유권에 일정한 제약을 가하는 경우가 있다. 이를 '공동 사용권에 의한 사유 재산권의 예속'이라고 한다. 교회는 이를 다음과 같이 밝힌다.
"그리스도교 전통은 사유 재산권을 절대적이고 침해할 수 없는 것이라고 인정한 적이 없다 (…) 사유 재산권은 재화가 만민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에서 공동 사용권에 예속된다."(「간추린 사회교리」 177항)
우리가 주의를 기울여야 할 대목은 재화는 만민을 위한 것이라는 점과 공동 사용권이다. 이를 '재화(사용)의 보편적 목적'이라고 한다.
비록 나의 노동과 지성을 통해 특정 재화를 소유하게 됐지만 그 재화는 반드시 사회적 기능을 가진다. 엄밀히 말해 분업과 협업을 통하지 않고는 내 것으로 삼을 수 없다. 그러니 그 재화를 어찌 나만의 것이라 주장할 수 있겠는가? 사회의 수많은 요소가 그 재화를 있게 했음을 부정할 수 없다.
「간추린 사회교리」를 살펴보면 "인간은 합법적으로 소유한 외적 사물을 자기 사유물만이 아니라 공유물로도 여겨야 하며 그러한 의식에서 자신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익을 줄 수 있어야 한다 (…) 개인들은 자기가 가진 자원을 (…) 자신과 가족만이 아니라 공동선에 이익을 가져다주는 방식으로 활용하여야 한다. 여기에서 재화 소유자의 의무가 생긴다"(178항)고 밝히고 있다. 또 만민의 공동사용권, 곧 재화의 보편적 목적과 사용은 "모든 윤리적, 사회적 질서의 제1원칙이고 그리스도교 사회교리의 특수한 원칙"(172항)이라고 말한다.
선용의 수단으로서의 소유
더 나아가 재화의 공동사용 권리는 무엇보다도 인간 본성에 새겨져 있는 자연권이며 타고난 권리다. 이는 재화에 대한 인간적, 법적, 모든 경제 사회적 체계와 수단에 우선한다. 사유 재산권과 자유로운 상거래 권리를 포함한 모든 권리는 '재화의 보편적 목적, 만민의 공동 사용권'에 종속되어야 한다. 이런 권리들의 본 목적을 되찾아 주는 일이야말로 중대하고도 긴급한 사회적 의무라 하겠다.(「간추린 사회교리」 172항 참조)
그러나 재화의 보편적 목적과 만민의 공동사용권 원칙이 만물을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다거나 편리한 대로 이용하거나 소유할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오히려 이 권리가 공평하고 질서 있게 행사되기 위해 국가적, 국제적 합의를 통해 권리를 규제하는 개입과 법질서가 필요하다.
종종 우리는 주변에서 평등과 자유를 내세워 규제를 철폐하거나 완화해야 한다는 주장을 듣는다. 반대로 규제를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도 듣게 된다. 나라와 나라 사이 관세와 무역장벽 철폐와 자유무역 같은 경우도 마찬가지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교회는 재화사용의 보편적 목적의 원칙에 바탕을 두고 적절한 규제 필요성을 제시한다. 이는 사유 재산권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규제의 필요성을 제시하는 것이다. 사실 사유재산은 (…) 본질적으로는 재화의 보편 목적의 원칙을 존중하는 도구에 불과하므로, 결국 목적이 아니라 수단인 것이다.(「간추린 사회교리」 177항)
교회가 사유 재산권을 반대하는 게 아니다. 교회는 사유 재산권이 진정한 사회적, 민주적 경제정책의 핵심 요소이고, 올바른 사회질서의 보증이란 점을 인정한다.
다만 사회교리는 모든 이가 재화에 대한 소유권을 공평하게 누리기를 강조한다. 사회교리는 복음에 나타난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우선권을 고려해 남보다 잘사는 사람들은 "자기 재산을 남들이 이용할 수 있도록 너그러이 일정한 자기 권리를 양보해야 한다"고 되풀이해 말한다. 소유는 선용의 수단에 불과하다.
[평화신문, 2012년 2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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