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동호 신부의 생생 사회교리] (10) 자유무역은 절대선일까? (1)
소수의 만족 위해 대다수는 불만족
"전체 인류나 사회집단 등을 빈곤으로 내몰면서 인간을 희생시켜 경제성장을 이루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간추린 사회교리」 332항)
자유무역
대부분 언론에서 그 내용이나 영향력에 대해 충분하게 다루지 않은 커다란 사회적 이슈 가운데 하나가 한미자유무역협정(FTA, Free Trade Agreement)이 아닌가 한다.
협정문이 무려 1500쪽에 이르는데다 국회 비준을 받아야 하지만 비준 주체인 국회의원조차 그 내용을 읽어보지 않았다고 한다. 협정문을 양국이 같이 만든 것이 아니라, 영어로 만든 것을 우리말로 번역했고, 얼마 전에는 법원이 그 번역의 오류를 공개하라는 판결을 내렸다는 소식도 들린다.
그런데 주류 언론은 FTA의 심각한 문제 제기가 있었음에도 이를 다루지 않은 채 협정이 구세주라도 되는 듯 홍보에만 열을 올린다. 그리고 마침내 몇몇 판사가 법 차원에서 검토할 부분이 있다고 SNS를 통해 알린 것을 두고도 그 내용보다 처신을 여론의 도마 위에 올린다.
한마디로 국민 대다수가 잘 모르고 국민의 합의(Consensus) 없이 몇몇 사람이 국가간 약속을 해버린 꼴이다. 국민을 대표하는 국회가 언론에 공개하지 않은 채 비준을 한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이제 와서 얼마 남지 않은 국회의원 총선에서 뜨거운 논란거리로 떠올랐다. 이 자리에서는 그 내용과 절차의 시시비비는 차치하고, 자유무역(Free Trade)과 국제교역(International Trade)에 대한 교회 가르침을 살펴보겠다.
모든 이들이 만족하는 거래는 없을까?
불과 40여 년 전이다. 어린 시절 동네 꼬마들은 마루 밑에 있던 먼지 쌓인 못 신는 고무신 한 켤레를 주고 강냉이를 바꿔 먹었다. 전형적 물물교환(Trade)이었다. 동네 꼬마들은 강냉이를 먹고 싶었고, 아저씨는 고물 고무신이 필요했다. 어린 시절에 얼마나 만족했는지는 기억이 확실치 않지만 대체로 만족했던 것 같다.
세월이 흘러 지하철 역사 한 구석에서 초라한 행색의 할머니가 더덕 껍질을 벗기고 있는 것을 볼 때가 있다. 더덕 냄새 때문에 기분이 좋아지지만 마음 한 구석이 편치 않다. 지하철 역사와 전동차 곳곳에 '불법으로 판매하는 것은 사지도 팔지도 말라'는 그럴듯한 계몽 투의 글귀들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법으로 사고파는 것을 규제하는 셈이다.
공익근무하는 젊은이들이 할머니 앞에 서서 야단을 치거나 빨리 거둬가라고 재촉할 때는 '얼마나 통행에 영향을 준다고, 너무 야박한 게 아닌가'하는 생각에 화가 나기도 한다. '질서'라는 노란 완장을 찬 젊은 할아버지들이 비슷한 연배의 잡상인 할머니를 내쫓는 광경을 볼 때면 슬픔과 분노마저 느껴진다.
이런 노점과 달리 지하철 이용객이 많은 환승역에는 거의 대부분 편의점이나 깔끔한 실내장식을 한 가게들이 들어서 있다. 물론 좌판하고는 수준이 다르다. 그렇다고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다. 가맹비와 관리비, 임대료를 내야 하고 때가 되면 공정하든 불공정하든 재계약도 해야 한다. 어쩌면 부채 원금과 이자 때문에 가게 주인도 힘겨워할 지도 모른다.
못 신는 고무신을 건네고 퍼주는 강냉이를 받아왔을 때는 주는 쪽과 받는 쪽 서로 만족했다. 강냉이 아저씨도 덤이라고 주면서 그다지 불편해 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런데 편의점이나 지하철 역사 내 점포에서는 '만족'이 안 생긴다. 편의점 직원도 시급을 받는 아르바이트니 물건을 건네주고 돈만 받으면 그만이고, 물건을 사는 나도 돈만 건네주고 물건을 받으면 그만이니까 말이다. 그러면 이런 거래(교역)에서 도대체 누가 만족하는 것일까.
누구를 위한 교역인가?
탐욕에는 끝이 없어서 그럴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그런 실존적 이유의 불만족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이 세상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소수의 만족을 위해, 대다수는 불만족스러운 단순한 소비자로 전락하는 심각한 불균형의 세상으로 변한 것은 아닌지를 말하려는 것이다. 20대 80의 사회, 10대 90의 사회, 더 나아가 1%대 99%의 사회라는 신조어가 아무렇지도 않게 세계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것도 이를 반영하는 것은 아닐까.
부실채권은 자유자본주의 경제의 치명적 결함이라 할 수 있다. 주기적 불황기에 발생할 수밖에 없다. 한 외국계 펀드회사가 어떤 은행을 사들였다가 다시 팔아 무려 5조 원의 이익을 냈다는 뉴스를 기억할 것이다. 2012년 정부 예산이 325조 원임을 감안하면 그 펀드회사 차익으로 이 땅의 얼마나 많은 보통 시민이 위기에 내몰렸을까.
우리 교회의 가르침을 소개한다.
금융 거래량이 실물 거래량을 훨씬 능가한 지금, 금융 부문은 경제의 실질적 토대를 무시하고 자신만을 발전의 준거로 삼을 위험이 있다. 그 자체가 하나의 목적인 금융 경제는 뿌리를 잃은 채 근본 목적을 상실하였기 때문에 그 목표들과 상충하게 된다. 다시 말해, 금융 경제는 실제 경제에 도움을 주고 궁극적으로는 민족과 인류 공동체 발전에 이바지해야 할 본래의 근본적 역할을 포기한 것이다.
[평화신문, 2012년 3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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