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현 신부의 사회교리] 성경 속의 다문화 (1)
사람들의 이주는 다문화 사회로의 변화를 초래하는 근본적인 사건이다. 구약성경은 최초의 사람과 여자의 이주, 아브라함의 이주, 야곱 집안의 이집트 이주, 출애굽, 가나안 땅 정착, 바빌론 유배와 귀환 등 구약의 중요 사건이 이주와 관련이 있다. 신약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는 강생과 이집트 피난 그리고 공생활에서 이주생활을 체험하였고, 예수님께서는 인간은 이 세상의 영원한 이방인으로 하느님 나라를 향하는 나그네임을 가르쳐 주셨다. 그리고 사도들은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세상을 떠도는 나그네의 삶을 살았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의 이방인으로 하느님 나라에 이를 때까지 나그네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로 본질적으로 이주민이라 할 수 있다. 이제 성경에 나타나는 이주민의 모습을 살펴보자.
1. 구약성경에 나타나는 이주와 다문화
1) 첫 사람들 : 하느님은 “흙의 먼지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어”(창세 2,7) 당신의 모습을 닮은 인간을 창조하시고 에덴동산에 조화롭고 평화로운 삶을 살게 하셨다. 그러나 인간은 뱀의 꼬임에 빠져 원죄를 짓게 되었다. 하느님은 원죄를 지은 인간을 에덴동산에서 추방하였다. 이 추방으로 인해 인간은 자신이 태어나고 하느님이 살 자리로 내어주신 진정한 고향인 에덴동산에서 쫓겨나 방랑의 삶, 나그네의 삶을 살아가게 되었다. 이와 같이 인간은 원죄로 인해 하느님과 함께 하는 에덴동산에서 쫓겨나 나그네의 삶을 살게 되었는데, 이 추방으로 인해 인간은 이주의 삶을 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 추방으로 인해 인간은 끊임없이 새로운 땅을 찾아가는 이주의 삶을 살게 되었지만 이 이주는 끊임없는 방황이 아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첫 사람들을 추방하면서 저주를 한 것이 아니라 구원에 대한 어렴풋한 약속(참조. 창세 3,15)을 하셨다. 이 약속이란 인류는 나그네의 삶을 통해 끊임없이 새 땅을 찾아가서 마침내 하느님의 나라에 이를 수 있음을 보장해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2) 카인과 아벨(창세 4,1~16) : 성경은 첫 사람들의 자녀들인 카인과 아벨의 비극을 전해주고 있다. 카인은 땅을 부치는 농부이고 아벨은 양치기이다. 하느님이 아벨의 제물은 기꺼이 굽어보시나 카인의 제물을 굽어보시지 않자, 카인은 분노에 사로잡혀 동생을 들로 데려가 살해하였다. 이 사화에 대하여 성서학자들은 단순히 카인과 아벨의 분쟁이 아니라 유목민과 농경민의 알력과 투쟁을 전해준다고 한다. 학자들의 이론을 좀 더 폭넓게 이해하면 카인과 아벨의 사화는 곧 유목민의 문화와 농경민의 문화적 충돌을 전해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유목민은 풀을 찾아 초원을 떠돌아다니는 반면, 농경민은 일정 지역에 정착하여 생활하는 사람들이다. 유목민이 소와 양 그리고 염소를 이끌고 지역을 옮겨 다니기에 농경민이 정착한 지역에 들어가게 되면 두 세력 간의 마찰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볼 때 카인과 아벨 사화는 성경이 전해주는 첫 번째 다문화 상황인데 불행하게도 문화적 충돌로 치닫게 된다. 카인과 아벨의 충돌 결과는 카인이 아벨의 땅을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그 땅에서 쫓겨나게 된다. 카인에게 추방은 가족과 친구를 비롯해 자신이 속했던 사회에서 배척당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카인은 어느 집단이나 공동체에도 속하지 않는 “세상을 떠돌며 헤매는 신세”(창세 4,14)가 된다. 가정이나 사회에 속하지 않는 개인은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게 되는데 카인의 추방은 바로 정체성의 상실을 의미한다. 정체성의 상실과 함께 카인은 자신이 속한 공동체가 없으므로 해서 언제 누구에게 죽음을 당할지 모르는 가련한 신세가 된다. 하느님은 이렇게 가련한 이를 버려두지 않으시고 그에게 표를 찍어 주시어 그의 생명을 보호해 주신다.
3) 나필족의 탄생(창세 6,1~4) : 창세기 6장은 하느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에 반해 그들을 아내로 삼았으며, 이들의 자식들이 태어나 나필족이 되었다는 사실을 전해주고 있다. 이 사화를 종교사회학적으로 이해할 때 하느님의 아들들이란 곧 하느님을 섬기는 종족을 뜻하며 사람의 딸들이란 하느님을 섬기는 이들과는 다른 종족을 뜻한다. 달리 말해서 하느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의 혼인은 곧 기원과 문화가 다른 종족이 혼인을 통해 결합하였고 이들의 자손은 나필족이라 불리게 되었다. 이는 문화와 종교가 다른 두 집단이 혼인을 통하여 결합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다문화 현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4) 바벨탑(창세 11,1~9) : 인류는 단일한 언어를 사용하는 단일 민족으로 동쪽으로 이주해 오다가 신아르 지방에 자리 잡고 살았다. 이들은 “꼭대기가 하늘까지 닿는 탑”(창세 11,4)을 세워 하느님께 도전한다. 인간의 가증스러운 오만에 하느님은 이들의 탑을 허물어 버리고 말을 뒤섞어 놓고 사람들을 온 땅으로 흩어버렸다. 이로 인해 인간은 한 언어를 사용하는 일치성을 잃어버리고 온 세상으로 흩어져서 살게 되었다. 인류가 바벨탑 사건으로 인해 온 세상에 흩어졌지만 이것은 영원히 흩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류는 다시 하나가 되어야 하는 과제를 안게 되었다. 이제 인류는 서로가 흩어진 상태를 탓할 것이 아니라 다시 하나가 되기 위해 귀환의 과정, 즉 각자가 정화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결국 바벨탑 사화는 인류의 다원화가 결코 파멸로 치닫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일치에로 향해야 함을 가르쳐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5) 성조들(창세 12,1~50,26) : 이스라엘의 성조들의 이야기는 복잡한 씨족이동의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성조 아브라함과 이사악 그리고 야곱은 한 곳에 정착하여 생활한 것이 아니라, 가나안 지방과 이집트를 비롯해 중동지방을 유랑하는 반유목민 생활을 했다. 고대 메소포타미아 지역인 칼데아 우르 지방에서 태어나 하란으로 이주하여 살던 아브라함이 일흔 다섯 때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롯과 함께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창세 12,1)을 떠나 가나안, 이집트, 네겝, 베텔, 스켐 등을 떠돌아 다녔다. 하느님은 그에게 가나안 땅과 후손을 약속(참조. 창세 17,1-8)하였지만 그는 가나안 땅에 완전히 정착하지 못하고 마므레, 브에르 세바, 블레셋 지역 등의 이방인으로 살았다. 약속의 아들 이사악 역시 떠돌이 생활을 했는데 혹심한 가뭄으로 그라르로 이주하여 필리스티아 임금 아비멜렉에게 몸 붙여 살다가 필리스티아인들의 시기로(창세 26,14-16) 그라르 골짜기로 이주하였다. 이곳의 목자들과도 싸움이 일어나자 그는 브에르 세바로 이주하였다. 야곱은 속임수를 써서 형 에사오로부터 장자권을 사고 아버지 이사악을 속여 아브라함의 축복을 전수받았다. 이 사건으로 인해 형 에사오의 분노를 피하고 자기 조상들의 혈통을 찾아 결혼하기 위해 외삼촌 라반이 살고 있는 하란으로 가서 라반의 집에서 14년간 일을 하고 라반의 두 딸 레아와 라헬을 아내로 얻었고 11명의 아들을 얻은 후 가족과 가축들을 데리고 도주하여 가나안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형과의 관계 때문에 수콧을 거쳐 스켐 성 앞에서 거주하지만 딸 디나의 겁탈로 인해 벌어진 살해 때문에 베텔로 올라갔고 그 후 마므레에 살다가 기근이 들어 요셉의 초청을 받고 이집트로 가서 그곳에서 죽었다.
이상과 같은 성조들의 삶을 살펴볼 때 기원전 2000년기 초기에 팔레스티나에 새로운 주민을 정착시킨 반유목민 씨족들의 이주민들 가운데 일부였음이 확실하다. 달리 말해서 성조들은 부족을 이끌고 하느님이 약속한 땅을 찾아가는 이주민이었다. 성조들은 이주민으로 살면서 정착민들과 투쟁과 전쟁, 화합과 동맹을 맺으며 고단한 삶을 살았지만 하느님의 약속에 대한 신앙 때문에 일관된 삶을 살았다.
[월간빛, 2012년 5월호, 김명현 디모테오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다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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