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동호 신부의 생생 사회교리] (21) 시장의 실패를 바라보며 (2)
공정한 분배, 선택 아닌 도덕적 요구
세계화, 기회와 위험의 공존
우리는 통신과 교통수단 발달로 공간의 한계에 구애받지 않는 생활을 하고 있다. 지구 반대편 사람과 실시간으로 얼굴을 보며 대화도 한다. 저 먼 나라에서 열리는 축구경기를 방에 누워서, 혹은 지하철을 타고 가면서 시청할 수도 있다. 지구촌을 이룬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위험에 직면해 있다. 오늘날 세계는 금융규제 완화로 인한 폐해로 불평등과 빈부격차가 심화하고 있다. 하지만 문제 해결을 위한 적절한 처방을 내놓지 못한 채 장기간 대불황을 겪고 있다. 세계 많은 시민의 삶이 고통스럽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교회의 「간추린 사회교리」에서는 세계화를 '기회와 위험'으로 진단하고 있다.
시장 실패로 심화하는 사회 양극화
더 걱정스러운 것은 그동안 각국 정부가 위기 때마다 내놨던 대책에 실효성이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인플레이션으로 경기를 되살리는 통화팽창정책과 국채발행 같이 정부가 미래에 생산될 자원을 미리 앞당겨 쓰는 공공부채정책, 개인이 융자를 받아 생활하도록 돕는 민간부채정책과 같은 처방이 더 이상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돈을 찍어내도 물가상승에 맞는 실질임금인상이 이뤄지지 않음으로써 통화정책을 무한정 완화할 수도 없게 됐다.
정부로서는 공공부채 원금과 이자를 감당하기에도 벅찬 상황이 됐다. 경제적 부담 가운데 상당히 많은 몫을 국민 세금으로 해결해야 한다. 2011년 기준 우리나라 2인 이상 가구당 소득이 4600만 원인데, 부채는 이미 5100만 원을 넘었다. 지금 우리가 짊어지고 있는 힘겨움의 무게는 미래 세대가 겪을 그것에 비하면 차라리 가벼울지 모른다.
정부의 실패를 포함해 국가의 실패를 이야기한 것처럼, 시장의 실패를 포함해 자본주의 실패를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칼 폴라니라는 사상가는 저서 「The Great Transformation」(국내에서는 「거대한 전환-우리시대의 정치 경제적 기원」이란 제목으로 번역됐음)에서 시장경제를 '악마의 맷돌'(satanic mill)에 비유했다. 시장의 실패를 가장 적나라하게 묘사한 표현이 아닌가 한다. 독자들은 인내심을 갖고 읽어보길 권하고 싶다.
경제서적과 달리 교회의 「간추린 사회교리」에서는 시장의 실패, 혹은 자본주의 실패란 표현을 직접 사용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에 대해 성찰하는 내용을 쉽게 찾을 수 있다. 「간추린 사회교리」 2부 7장 '경제생활'에서 시장의 실패를 살펴볼 만한 대목을 소개한다.
"전체 인류나 사회집단 등을 빈곤으로 내몰면서 인간을 희생시켜 경제성장을 이루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 재화와 용역의 사용 가능성으로 드러나는 부의 성장, 그리고 이들의 공평한 분배에 대한 도덕적 요구는 인간과 사회 전체에 연대라는 근본 덕목을 실천하도록 고무해야 한다. 정의와 사랑의 정신으로 빈곤과 저개발, 낙후를 낳고 영속시키는 '죄의 구조'가 발견되는 모든 곳에서 이를 물리치기 위해서이다. 인간의 갖가지 구체적인 이기적 행위들이 이러한 구조를 쌓아 올리고 강화시킨다."(「간추린 사회교리」 332항)
인간과 사회 연대를 위한 공평한 분배
교회는 인류나 사회집단 등을 빈곤으로 내몰며 빈곤과 저개발, 낙후를 낳고 영속시키는 행위, 즉 인간을 희생시키면서 경제성장을 이루는 것을 죄의 구조라고 보았다. 자유자본주의 허구성을 비판하며 시장경제를 악마의 맷돌로 묘사한 폴라니를 떠올리기 충분하다.
우리 사회의 진보와 보수 진영 사이에 벌어지는 성장과 분배의 대립적 논란에 대해서도 교회는 길을 제시한다. 부의 성장은 재화와 용역의 소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용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며, 공평한 분배는 선택이 아니라 도덕적 요구라는 것이다.
인간의 이기적 행위들이 죄의 구조를 쌓아 올린다. 교회는 이 죄의 구조를 물리치려는 근본 덕목으로 연대를 촉구한다. 선을 행하고 악을 피하는 것은 인간 양심의 명령을 따르는 길이다.
"교회 교도권은 양적인 것만 추구하는 발전 뒤에 숨어 있는 위험을 경고한다. 일정한 사회집단을 위하여 온갖 물질 재화를 지나칠 정도로 확보해 주는 것은 사람들을 자칫하면 '소유'의 노예, 즉각적인 충족의 노예로 만든다.(…) 이것이 이른바 '소비' 문화 또는 '소비주의'라고 하는 것이다."(「간추린 사회교리」 334항)
즉각적인 충족의 노예로 만드는 이런 경제모델을 교회는 '소비주의'라고 점잖게 비판하지만, 어떤 이들은 이를 '천한 자본주의'라고 비판한다. 이 천한 자본주의를 교회는 "강력한 법적 틀(정치와 사회의 통제) 안에 두지 않는 무한자유의 경제 체제"라고 한다.
결국, 시장의 실패와 자본주의 실패는 사람과 사회를 소유의 노예로 전락시키고 고통에 시달리게 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평화신문, 2012년 5월 27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