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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사회교리: 성경 속의 다문화 (2)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2-07-01 조회수2,428 추천수0
[김명현 신부의 사회교리] 성경 속의 다문화 (2)


지난 호에서 우리는 창세기에 나타나는 이주와 다문화 현상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이번 호에서는 탈출기 이후의 다문화와 관련된 사항들을 살펴보자.

6) 이집트 해방 : 야곱의 아들 요셉이 형제들의 시기를 받아 이집트로 팔려갔지만 파라오의 꿈을 해몽하고 이집트의 재상이 되어 있었다. 요셉이 해몽한 것처럼 7년의 풍년 후 7년의 기근이 들자 요셉의 형들이 곡식을 사러 이집트로 가게 되며, 마침내 파라오의 초청을 받고 야곱과 그의 가족들이 모두 이집트 땅 고센에 정착하게 되었다. 야곱은 기근을 피하기 위해 일흔 명의 가족을 데리고 이집트로 들어갔지만 그곳에서 수백 년간 살면서 자손들이 번성하였다. 이집트인들은 이들을 억압하기 위하여 피톰과 라메세스에서 파라오의 양식을 저장하는 성읍을 짓는 노예로 삼았다. 처참한 상태에서 노예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에게 하느님은 모세를 보내 주셨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이집트를 탈출하여 40년간 광야를 방랑하게 된다.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떠나올 때 이스라엘 민족뿐만 아니라 온갖 노예들이 하나의 집단을 이루어 이집트를 탈출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집단은 모세의 영도 하에 시나이로 향하였고 거기서 장엄한 계약을 맺고 하느님의 백성이 되었다. 이렇게 형성된 공동체가 이스라엘 민족의 핵심을 이루게 되었다. 이로 인해 시나이의 계약을 통해 형성된 신앙이 이스라엘 민족을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출애급과 시나이 계약은 이스라엘을 하나의 민족으로 형성하도록 해준 잊을 수 없는 강한 역사적 사건이다. 이스라엘은 출애급을 자기들이 한 민족으로 탄생시킨 창업적 사건으로 기억하며 자신들의 신앙고백의 핵심으로 여겼다. 또 이스라엘이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과 계약을 맺고 십계명을 받음으로써 다양한 기원을 가진 사람들이 한 민족으로서의 삶의 기준을 갖게 된다. 이와 같이 이스라엘은 출애급과 시나이 계약을 통해 다원적인 집단이 하나의 민족, 하나의 신앙을 갖게 되었다. 따라서 이스라엘에게 이집트에서 탈출하여 시나이에 이르는 이주과정은 여러 부족들을 한 민족으로 묶는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7) 가나안 정복 :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은 40년간을 광야에서 유랑생활을 하면서 그 수가 점차 불어나게 되어 강력한 집단이 되었다. 이들을 광야에서 아모리인들의 왕 시혼이 통치하던 헤스본 왕국을 점령하고(민수 21,21~32 참조), 임금 옥이 통치하던 바산을 정복(민수 21,33~35 참조)함으로써 요르단 동부를 점령하였다. 이어서 여호수아의 인도 아래 이스라엘은 요르단 강을 건너 가나안 땅을 점령하였다.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을 향하면서 자신들에게 복속하거나 도움을 주는 성읍이나 왕국과는 화친을 맺었지만 자신들에게 저항하는 성읍들과 왕국에는 ‘헤렘(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넘겨준 것은 무엇이든 모두 죽이거나 완전히 부수어서 하느님께 바치는 것)’을 적용하였다. 즉 이스라엘에 저항하는 민족들은 가나안 땅에서 몰아내야 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우상과 신상, 그리고 산당도 모두 헐어야 하며, 민족들은 반드시 전멸시켜야 했다.(민수 33,50~53; 신명 7,1~3 참조) 하지만 가나안 정복 후 가나안 땅에는 이스라엘 민족들이 함께 섞여 살고 있었다. 이는 약자 보호법에서 “이방인을 억압하거나 학대해서는 안 된다.”(탈출 22,20)라는 구절을 통해서도 잘 알 수 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정복해가면서 취한 태도는 크게 두 가지, 즉 화친과 헤렘이다. 이러한 태도를 선택한 기준은 바로 하느님에 대한 신앙이었다. 즉 가나안 땅을 향해 이주해 가면서 광야와 가나안 땅에서 만난 성읍과 부족들이 하느님에 대한 신앙이 있고 이스라엘을 환영하면 화친이 이루어졌고 그렇지 못할 경우 이스라엘은 전쟁을 통해서 이들을 전멸시켰다. 이스라엘이 취한 화친과 헤렘은 오늘날의 동화와 배척(분리)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화친은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중심으로 이스라엘과 토착민이 하나가 되는 것, 달리 말해 이스라엘이 토착민을 자기 민족으로 끌어들인 것이며, 헤렘은 이스라엘이 토착민들의 생명과 성읍을 철저히 유린한 배척과 분리의 태도라 할 수 있다. 반면에 이스라엘이 토착민의 삶을 받아들여 이민족에 동화된 경우도 있다. 이스라엘이 시팀에 머물러 있을 때, 백성들이 모압 여자들과 불륜을 저질렀으며, 이 여자들을 따라 우상을 경배하였다.(민수 25,1~2) 모세의 율법에서 이스라엘에게 가장 강하게 경고하는 것이 이방인들의 우상숭배를 금하는 것(탈출 23,24.32; 민수 33,50~54)인데 이것이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잘 지켜지지 않았다. 이는 곧 이주민인 이스라엘이 순수한 자신의 문화와 삶을 유지하지 못하고 자신들과 만난 민족들의 문화를 받아들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서른 한 명의 임금들을 쳐부수면서 가나안 땅을 정복하였다.(여호 12,9~24 참조) 이는 곧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면서 어떤 형태로든 서른 한 개의 왕국을 만났으며, 이 과정에서 각 왕국이 지니고 있는 다양한 문화와 접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이스라엘은 이들 왕국과 문화적 충돌과 융합, 배척과 수용이 일어났음을 추정할 수 있다. 우상숭배 금지는 이주 과정에서 이스라엘이 하느님에 대한 순수한 신앙을 보존하고 민족을 보존하기 위한 방편일 뿐 아니라 자신들의 문화를 지키는 방편이기도 했다.

8) 가나안 정착 : 가나안 땅을 정복한 이스라엘은 지파에 따라 땅이 분배하였고(여호 13,8-21,42), 열두 지파들은 서로 동등한 입장에서 부족 공동체를 이루었다. 이스라엘은 하느님과의 시나이 계약으로 인하여 결합된 부족 공동체였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계약의 규정에 따라 지파들 간의 질서가 유지되었다. 부족 공동체인 이스라엘은 주변의 적대적인 종족들에 둘러싸여 있었지만 중앙집권적 정치체제나 체계화된 군사조직이 없었고 판관들에 의하여 통치되었다. 가나안을 정복한 초기(기원전 13세기말)에 강대국 이집트의 제20조 왕조가 멸망하고 아시리아의 세력은 위축되었기에 이스라엘은 강대국들의 위협을 받지 않고 발전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스라엘이 정복한 땅은 주로 필리스티나의 고원지대였고, 해안지대는 해양민족들이 차지하고 있었으며 내륙지방은 아람인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즉 가나안 땅을 정복한 이스라엘은 해안지대에 사는 블레셋 사람들과 내륙지방에 사는 아람인들과 섞여 살게 되었다. 달리 말해서 이스라엘은 점령한 땅을 배타적으로 지배하는 영토권을 확보하지 못하고 다른 민족들과 경계를 맞대고 살고 있었다. 그래서 해안지대와 에크론 지방에서는 가나안 인들과 섞여 있거나(판관 1,36 이하) 그들에게 예속되어 있었다.(창세 49,14 이하) 이러한 상황으로 말미암아 각 지역에 따라 고유한 관습과 전통 그리고 방언이 발생하게 되었다.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탈출하여 광야를 거쳐 가나안에 정착한 것은 곧 반유목민적인 삶에서 정착생활에 적응, 변화하여 농경생활을 하게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이는 곧 이주를 통해 새로운 삶으로의 변화를 의미한다. 또한 이스라엘이 정착한 후에 가나안 땅에는 이민족들이 남아 있었다.(판관 3,1~6 참조) 이로 인해 이스라엘은 주변민족들과 결혼을 하였고 심지어 이방인의 신들을 섬기기까지 하였다. 이러한 현상으로 인해 가나안 정착민들과 이방인들이 믿던 종교와의 갈등관계가 성립된다. 그중 가나안 땅에 만연해 있던 바알숭배는 하느님에 대한 신앙과 조화될 수 없다는 것이 율법의 가르침인데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민족 중 바알숭배에 빠지거나 하느님에 대한 신앙과 바알숭배를 융화시키기도 하였다.

[월간빛, 2012년 6월호, 김명현 디모테오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다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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