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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사회교리27: 세상 속의 교회 (4) 무엇이 교회를 교회답게 할까?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2-07-07 조회수2,444 추천수0
[박동호 신부의 생생 사회교리] (27) 세상 속의 교회 (4) 무엇이 교회를 교회답게 할까?

세상의 섬김과 다른 교회의 섬김


구원의 표지이자 도구인 교회

교회는 세상 가운데서 예언직과 사목직, 그리고 사제직을 수행해야 한다고 몇 차례에 걸쳐 말했다. 이 직무는 교회가 작위적으로 설정한 것이 아니라 창립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다.
 
이 직무는 선택이 아니다. 교회는 나눔과 섬김과 사귐의 공동체로서 세상 안에서 세상의 '대조사회'가 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교회헌장」은 교회를 세상 안에서 '구원의 표지이자 도구'라고 정의한다.
 

뒤바뀐 사회의 섬김

지난 호에서 교회의 나눔을 살펴보았다. 나눔은 결코 이해관계에 따른 거래가 아니다. 남은 것만이 아니라 요긴한 것까지 내어주는 것을 의미한다(교황 요한 바오로 2세 회칙 「사회적 관심」 31항 참조). 오늘은 교회의 섬김에 대해 우리 모습을 성찰하자.

교회의 섬김은 '누구를 섬기는가'하는 관점에서 세상의 섬김과 구별된다. 교회의 섬김은 세상의 섬김과 방향이 다르다. 세상은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힘 없는 쪽에서 힘 있는 쪽으로 섬긴다. 그 대표적 표현이 바로 '노블리스 오블리주'다. 직위에 따른 도덕적 의무쯤으로 번역되는 이 표현이 나온 시대에는 귀족이 평민과 노예를 보살필 의무가 있었다. 물론 평민과 노예는 귀족에게 절대 충성해야 했다. 심지어 목숨까지 바쳐가며 귀족을 섬겨야 한다는 전제가 있다.

현대사회에서도 툭하면 노블리스 오블리주가 거론되는 배경에는 전근대적인 계급적 상호관계가 무너진 것에 대한 개탄이 섞여 있을 것이다. 넘나들 수 없는 계급을 당연하게 여기는 쪽에서는 보통 사람을 하위계급에 묶어 두려는 불순한 의도가 있는 건 아닌가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그럼 지체 높은 사람, 가진 것 많은 사람, 높은 지위에 오른 성공한 사람을 섬기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삶이 고달플 것이다. 신분상승 기회마저 박탈당할지 모른다. 가난을 대물림할 수 있다. 심지어 정치와 경제, 사회적 기본권, 인간의 존엄함을 드러내는 기본 인권마저 빼앗길지 모른다. 국가는 시민을 통제하고, 자본은 노동을 지배하고, 법은 사회적 약자를 겁박하는 일이 벌어진다. 봉사 혹은 섬김을 이야기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언어의 유희인 경우가 많다.

정치공동체는 더이상 시민을 위해 봉사한다고 보기 어렵다. 오히려 시민이 정치공동체에 순종해야 하는 꼴이다. 노동자가 땀 흘린 1시간의 가치가 5000원도 안 되지만 그마저 자본에 구걸하고 선처를 기다려야 할 처지다. 사회적 약자는 법적 권리마저 보호받지 못한다. 그래서 저마다 한을 품는다.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노랫말을 곱씹으면서 성공하겠다고 뱃속에서부터 다짐한다.


하느님 백성을 향한 교회의 섬김

교회 공동체도 크게 다르지 않다. 교회를 걱정하는 대화를 나누다가도 "오죽하면 평신도를 '병신도'라고 하겠어"하는 자조 섞인 말로 대화를 마무리한다. 평신도라는 용어를 바꿀 생각을 하는 이도 없다. 평신도가 귀족과 대조되는 신분을 드러내는 전근대적 용어임에도 이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찾아보기 힘들다.
 
성직자와 수도자 사이의 위계질서 역시 다르지 않다.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현장에서 성직자와 수도자 사이에는 높낮이가 분명하다. 하느님 백성 곧 교회의 보편사목직을 분명히 밝혔음에도, 성직자는 수도자의 '사목'을 인정하지 않는다. 기껏해야 '사목 협력자'라는 말을 붙여 인심을 쓴다.
 
성직자라고 해도 다 같은 성직자도 아니다. 고위 성직자와 하위 성직자가 존재한다. 둘 사이의 벽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높다. 물론 교계제도는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교계제도를 신분의 구별쯤으로, 그리고 신분에 따른 지배와 복종의 관계쯤으로 이해하는 한 제2차 바티칸공의회 「교회헌장」이 정의한 것을 수용할 여지는 없다.
 
"주님이신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의 백성을 사목하고 또 언제나 증가시키도록 당신 교회 안에 온몸의 선익을 도모하는 여러 가지 봉사 직무를 마련하셨다"(「교회헌장」 18항).

그런데 우리는 이 봉사 직무가 그리스도께서 마련하신 것이며, 그 목적은 온몸의 선익을 도모하는 데 있음을 외면한다. 섬김은 찾기 어렵고 다스림만 도드라진다.

교회의 섬김은 그리스도의 몸, 하느님 백성을 향한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마련하신 봉사 직무의 전형을 교회 창립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본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누구를 섬겼는지 너무나 분명하게 보여준다. 현학적, 철학적, 신학적으로 해석할 필요도 없다.

하느님 아들만큼 지체 높고 힘 있고 모든 것을 가지신 이가 또 있을까. 그런 분이 당대의 주변인을 섬기셨다. 사람 축에도 끼지 못하는 이들을 벗으로 삼으셨고 당신과 동일시하셨다.

교회의 섬김은 그런 것이다. 그분처럼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주변으로 내몰린 이들, 곧 사회적 약자를 섬기지 않는 것은 '교회의 길'에서 일탈한 것이다.

[평화신문, 2012년 7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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