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동호 신부의 생생 사회교리] (28) 세상 속의 교회 (5) 무엇이 교회를 교회답게 할까?
사회적 약자와 사귐 이루고 있나
세상 안에서 세상과 구별되는 교회
지금까지 네 차례에 걸쳐 교회의 교회다움을 살펴보았다. 이는 세상을 초월한 교회가 아니라, 세상 안의 교회를 교회답게 하는 모습을 말한다. 교회의 초월성과 역사성을 가장 잘 표현한 것이 아마도 '대조사회'가 아닌가 한다. 세상 안에 있으면서 세상과 구별되는 교회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대조사회로서의 교회는 예언직과 사제직, 사목직을 수행하며 나눔과 사귐과 섬김의 공동체를 이룬다. 교회는 세상을 끊임없이 변화시키며 완성하려는 인류와 동행한다. 오늘은 그 마지막으로 교회의 사귐에 대해 성찰하자.
계급적 사귐이 사회의 분열으로
세상의 사귐은 유유상종, 끼리끼리의 형태를 띤다. 사는 동네가 달라도 교류하기 힘들다. 사람을 만나면 어느 동네에 사는지를 물어본다. 사는 지역을 확인하는 순간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지를 결정한다. 아무리 죽마고우라도 인생 여정이 다르면 함께 자리하는 것이 어색할뿐더러 사귐을 이어가기가 힘들다. 먹는 것도 다르고, 입는 옷도 다르며, 즐기는 문화도 다르다.
어른들은 그렇다 쳐도 아이들 다니는 학교, 어린이집도 다르다. 심지어 놀이터와 장난감까지도 다르다. 단순히 다른 것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다양함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른 것이 아니라 질적 수준의 격차가 존재한다. 그리고 그 격차는 점점 더 심화한다.
사귐은 철저하게 계급으로 바탕으로 이뤄진다. 계급의 벽은 너무 높아서 넘어설 수 없다. 서로 사귀지 못하게 하려고 경계의 담을 치기도 하고, 섞이지 않도록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한다.
이러한 사회구조는 한 인간을 특정계급에 귀속시키고, 그 안에서만 어울릴 것을 강요한다. 물론 상위계급으로 도약할 기회는 언제나 있지만 하늘의 별 따기만큼이나 어렵다. 그러나 하위계급으로 추락할 위험은 손바닥을 뒤집는 것 만큼 쉽다.
이른바 3계급사회(상류, 중류, 하류)는 급속히 허물어진다. 중산층의 몰락을 대표적으로 드러내는 표현이 '1:99의 사회'가 아닐까 한다.
계급과 계급 사이의 괴리도 점점 커진다. 이런 사회에서 하위계급에 속한 이들은 절망하며 미음에 증오를 키워가기 쉽다. 상위계급에 속한 이들은 그들을 멸시하고 경멸하기 쉽다. 나눔을 실천해도 우월적 지위에서 베푸는 '동정'정도에 머문다. 이해관계나 수준에 따라 사귐이 이뤄질 수밖에 없다.
교회,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끄는 수레
교회를 교회답게 하는 사귐은 소외된 이웃과의 사귐이다. 뜻이 다르고, 처지가 다르고, 하다못해 피부색이 다르고, 수준이 다르고, 그래서 중심에서 설 자리가 없어 주변으로 밀려난 이들과 사귀는 것이 교회다운 사귐이다. 이를 사회적 약자와의 연대, 혹은 사회적 약자에 대한 우선적 선택이라고 한다.
세상의 사귐이 유유상종의 사귐이라면, 교회의 사귐은 세상이 배제한 이들을 찾아 나서는 사귐이어야 한다. 그래야 세상과 대조되는 교회의 교회다움을 실현할 수 있다. 절망과 미움과 증오를 물리치기 위해서, 경멸과 우월감과 동정을 넘어 한마음 한 몸을 이루기 위해서 교회는 사회적 약자와 연대하고 사귀어야 한다.
이는 교회의 사명이기도 하다. "교회도 인간의 연약함으로 고통받는 모든 사람을 사랑으로 감싸주고, 또한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 가운데에서 자기 창립자의 가난하고 고통받는 모습을 알아보고, 그들의 궁핍을 덜어주도록 노력하며, 그들 안에서 그리스도를 섬기고자 한다"(「교회헌장」 8항).
오늘 우리 교회가 누구와 사귀며, 누구를 섬기며, 누구와 나누고 있는지 돌아보자. 교회의 세상 안으로의 투신은 한마디로 약자를 섬기고, 가난한 이와 나누고, 소외당한 이와 사귐으로써 세상을 인간다운 발전으로 끌어가는 '끌차'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당연히 땀을 흘리고 수고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 '남은 것' 뿐만 아니라 '요긴한 것'마저 내어놓아야 한다. 겉옷뿐만 아니라 속옷까지 내어놓아야 하고, 더 나아가서 고통과 희생까지 감수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가난과 박해 속에서 구원 활동을 완수하셨듯이 그렇게 교회도 똑같은 길을 걸어 구원의 열매를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부름 받고 있다"(「교회헌장」 8항).
값비싼 장식이 달린 옷을 입고는 수레를 끌 수 없다. 값비싼 장식이 훼손될까봐 수레에 손을 대려 하지 않는다. 또 화려한 수레를 만들면 아무 짐이나 실을 수 없다. 실을 것인지 말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혹여 싣더라도 품위 있고 괜찮은 값나가는 물건만 실을 뿐, 그 안에 형편없는 물건이나 지저분한 쓰레기 같은 물건을 싣지 않는다.
이는 인간다운 발전을 위해 약하고 가난하고 소외당한 이를 실을 수 있는 끌차가 아니라, 위세를 부리고, 자랑하고, 만족을 가져다주는 고급 승용차에 앉은 귀족과 같은 것이다.
그것은 교회의 신앙이 아니며, 교회의 길을 벗어나는 것이다. 우리는 소수의 '소유'가 다수의 '존재', 즉 인간됨을 손상하는 사회 현실(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사회적 관심」 31항 참조)을 보고 있다. 바로 그 현실에 오늘의 우리 교회가 있다.
[평화신문, 2012년 7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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