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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사회교리36: 폭력의 낙수효과와 비폭력 평화주의자 예수님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2-10-14 조회수1,894 추천수0
[박동호신부의 생생 사회교리] (36) 폭력의 낙수효과와 비폭력 평화주의자 예수님

사회 곳곳 파고든 폭력의 낙수


'낙수효과'라는 경제용어가 있다. 예를 들면 국가경제 상황이 좋지 않을 때 정부는 불경기를 극복하기 위해 막대한 자금이 드는 국책사업을 벌이고, 사업을 통해 서민들에게 골고루 돈이 흘러들어가 소비가 살아나면 덩달아 공급을 위한 생산이 늘어나게 돼 경제상황을 개선할 수 있다는 게 낙수효과다.
 
얼마 전 어느 경제인단체가 대기업과 중소기업 사이에 실제로 낙수효과가 발생했다고 발표하자, 다른 시민단체는 통계를 교묘하게 활용한 것에 불과할 뿐 낙수효과는 실현되지 않았다고 반박한 일도 있었다.
 
낙수효과를 간단하게 설명하면 돈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그것도 넓게 골고루 퍼져나간다는 이야기다. 그렇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 낙수효과가 실현될 것 같지 않다.
 
왜냐면 자본주의를 추종하는 경제인들이 위에서 아래로 돈을 흘려보낼 만큼 배려와 분배정의, 사회적 책임을 실현할 정도로 성숙하다고 믿기 어렵기 때문이다. 정당한 몫을 가진 다음 나머지를 아래로 내려 보내기보다는 오히려 기회를 놓치지 않고 주머니를 더 만들어서 최대한 축적하는 데 익숙하지 않을까.
 
오늘 이야기는 엉뚱하지만 슬픈 낙수효과, 곧 폭력의 낙수효과 실현에 대한 성찰이다. 우리는 오랫동안 폭력에 익숙하기 때문에 그것이 폭력인지 모르고 살았는지도 모른다. 매일 공기를 들이마시고 살면서도 공기의 존재를 자각하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나라는 과거 35년 동안 일제의 강압적 지배를 받았다. 사회 모든 분야에서 폭력의 일상이 35년 간 계속됐다면 생존을 위해서라도 폭력에 익숙해져야 했을 것이다.
 
물론 이 기회에 한 몫을 제대로 챙긴 '똑똑한' 이들도 몇몇 있었다. 우리는 이들 행위를 '친일부역'이라고 말한다. 폭력행위에 가담한 공범이라 할만하다. 그것으로 그쳤다면 아마 폭력의 일상을 극복했을지도 모르지만 해방 후 불행하게도 우리는 한국전쟁이라는 집단(국가) 간 폭력에 고스란히 노출됐다.
 
사람을 죽이는 일, 다치게 하는 일을 바로 눈앞에서 목격한 사람들이 어디 한둘이겠는가. 이는 남쪽에서든 북쪽에서든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침략을 했든 침략을 받았든 사람이 죽고 다쳤다. 그것도 수백만 명이 말이다. 사회 전 분야에 깊게 남아있는 전쟁의 상흔은 사실 폭력의 흔적이다.
 
국가는 외침을 막고 국민 안전을 확보하기 위한 군사력과 아울러 사회 내부 무질서와 범죄로부터 시민을 보호하기 위한 경찰력을 독점적으로 갖고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너무나 쓰라린 아픈 기억이 있다.
 
군사력을 외침에 대항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국민을 향해 사용한 적이 두 번이나 있다. 또 치안을 명분으로 일본 제국주의 권력의 몽둥이가 돼 조선 백성을 다스린 35년 역사가 있다. 군사력과 경찰력이 시민을 보호하기보다 시민을 억압하는 데 이용된 셈이다. 물론 모든 군인과 경찰공무원이 그런 것은 아니다. 그러나 양심적 군인과 경찰들은 대부분 빛을 보지 못했다.

필자가 병역의무 이행을 위해 입대했을 때 자대에 배치되어 내무반에 들어가 본 벽보는 다름 아닌 '육군명령 제0호, 구타금지'에 관한 내용이었다. 참 많이 맞았다. 이른바 '얼이 빠졌다'는 이유였다.
 
회식이 끝나면 맞고, 훈련이 끝나면 맞고, 하다못해 토요일 오후 축구경기를 마친 후에도 맞았다. 사람이 얼이 빠지고 혼이 빠지면 그게 사람인가. 아마 구타는 집나간 얼을 불러들이는 '전어' 같은 역할을 했나보다. 사목을 하며 병역을 마친 젊은이들에게 그 시절 이야기를 해주면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듣는다. 이제 군대에서 구타와 폭력은 거의 사라진듯하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우리 사회에 폭력이 마치 일상인 것처럼 되살아났다. 처음에는 학교폭력이 기승을 부리는 것처럼 언론이 대대적으로 보도하며 흥행몰이를 했다. 학교폭력이 조금 시들해지니 주취(酒醉)폭력이 유행을 탔고, 곧이어 질세라 성폭력이 뒤를 이었다.
 
폭력을 행사한 이력을 학생생활기록부에 적어놓으라고 윽박지르고 길거리에서 아무나 불러세워 조사하겠다고 한다. 술 마시고 행패 부린 이들을 잡아 가뒀더니 범죄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며 자랑한다. 성폭력범을 거세하면 재범률이 0%가 될 것이라고 한다. 폭력을 서비스 상품(용역)으로 제공하는 회사까지 생겼다.

그런데 어딘가 석연치 않다. 폭력을 휘두른 어린 학생, 술 마시고 행패를 부린 어른, 인면수심의 흉악한 성범죄자들, 폭력을 파는 회사 말단 직원 대부분이 사회적 소외계층이다. 그들에게 손가락질하고 침을 뱉고 고성을 지르며 제거하겠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더 큰 폭력은 철저하게 잊고 외면하고 침묵한다. 국가(일본군국주의, 남북의 군대와 경찰력)가 행한 폭력이 드디어 가장 낮은 곳에까지 골고루 스며든 것일까. 폭력의 낙수효과가 실현된 것일까. 우리의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비폭력 평화주의자'였다.
 
[평화신문, 2012년 10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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