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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사도신경 해설: 저(나)는 믿나이다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2-10-18 조회수3,181 추천수1
[사도신경 해설 2] “저(나)는 믿나이다” (1) 신앙의 주체


믿는다는 것은 혼자만의 개별행위가 아니다. 신앙인들과 더불어 믿는 것이다. 고립된 채 외로이 신앙생활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며 그런 신앙은 이내 시들어버린다.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를 개인별로 부르시지만 당신과의 인격 관계 속에서 공동체 안으로 끌어들이신다. 그 과정 중에 생겨난 공동체가 교회이다.

그런데 사도신경은 “저희(우리)가 믿나이다”가 아니라 “저(나)는 믿나이다”로 시작된다. 신경은 왜 신앙행위의 주체로 우리가 아니라 나를 강조하는 것일까? 성경은 한 개인이 주님을 만나 변화되는 과정을 전해준다. 예수께서 특정인을 무리로부터 따로 불러내어 개인적으로 그와 만나 말씀을 나누시고 구원의 은혜를 베푸신다. 신앙은 예수님과의 개별만남을 통하여 이루어지고 깊어져간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허리가 굽은 여인을 당신께 가까이 부르시어 “너는 병에서 풀려났다”(루카 13,12)고 하시면서 손을 얹어 치유해주셨다.

예수께서 열 명의 나환자를 낫게 해주셨는데, 사마리아인 한 명만이 되돌아와 예수님을 만나 감사드렸다. 그때 비로소 예수님은 그와의 개별만남을 통하여 신앙의 은혜를 선사하시면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루카 17,19)고 선언하셨다. 부활하신 후 예수님은 제자들 무리로부터 시몬 베드로만을 따로 불러내어 만나시면서 그와 사랑의 대화를 나누셨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시는 예수님께 그는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라며 사랑과 충성을 고백하였다(요한 21,15-19 참조).

믿음은 우리 각자가 하느님과 ‘나와 너’의 관계를 맺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각 사람을 개별 이름으로 부르시며 ‘너’로 대하시고, 말씀과 사랑을 나누신다. ‘나’ 역시 하느님을 ‘너(당신)’라 부르며 다가가 자신을 하느님께 내어 맡긴다. 이래서 우리 각자는 하느님 앞에 이 세상에서 둘도 없는 가장 소중한 ‘나’로 인식하면서 인격체로 성장해 나간다. 인간은 남들로부터 ‘너’라 불리면서 스스로를 ‘나’로 자각하며 다른 이들로부터 구별되는 귀중한 존재로 인식한다. 이같이 자각하면서 자기 존재의 기반을 다지는 과정이 곧 인격성장이다. 인격체는 자기 자신을 ‘나’로 자각함으로써 다른 이들과 혼동될 수도 바꿔질 수도 없는 유일무이한 개인으로서 의식하고 또 다른 이들과의 관계 속에서 발전해나간다.

신앙의 성장도 마찬가지이다. 하느님께서 각 사람을 ‘너’로 대하며 사랑하시는 한편 각 개인도 하느님을 ‘너(당신)’라 부르며 인격적 만남을 통하여 사랑에 대한 보답으로 자기 자신을 하느님께 내맡긴다. 신앙은 하느님과 맺는 ‘너와 나’의 관계이다. 즉 상호 헌신과 신뢰의 관계이다. 하느님께서 지존하시고 거룩하신 반면에 인간은 비천하고 불결하기 때문에 서로 간에 ‘나와 너’의 관계가 이루어질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은 부름과 끌어당김을 통하여 자신을 낮추어 인간에게 다가와 인격관계를 맺으신다. 이는 인간으로서 상상할 수 없었던 하느님과의 ‘대등’ 관계 곧 사랑과 나눔의 관계이다. 이리하여 인간은 신앙을 통하여 인격체로서 성장하며 하느님의 높은 지위에까지 들어 올려 진다. 말하자면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2008년 5월 18일 삼위일체 대축일 가톨릭마산 8면, 최영철 알폰소 신부]


[사도신경 해설 3] “저는 믿나이다” (2) 신앙의 행위


신앙의 목적은 하느님을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20,31). 예수님은 인간의 풍요로운 생명을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다. “나는 내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왔다”(요한 10,10). 신앙의 궁극적인 지향목표도 영원한 생명이라면 그 특징은 생명과도 같은 것이다. 그래서 신앙은 정지된 상태가 아니라 활발히 움직이는 행위이다. 신앙이 멈추어서면 나무에서 떨어져 나간 가지처럼 즉시 생명력을 잃고 말라버린다. 믿음은 앎과 실천 그리고 체험을 통해 부지런히 하느님께로 향해 나아가는 삶이다.

한 가나안 여인이 딸의 치유를 위해 예수님 앞으로 다가가는 장면(마태 15,21-28 참조)은 나아가는 신앙의 행위를 잘 보여준다. “제 딸이 호되게 마귀가 들렸습니다” 하고 애절히 호소하는 여인의 간청에 예수님은 처음에 한마디 대꾸도 하시지 않았다. 더욱이 제자들이 “저 여자를 돌려보내십시오” 하고 아뢰자 그제야 예수님은 당신의 사명을 근거로 분명한 거절의 말씀을 하셨다. “나는 이스라엘의 길 잃은 양들을 찾아 파견되었다”라는 거부에도 여인은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도리어 앞에 와서 엎드려 절하며 “도와주십시오” 하고 매달리는 여인에게 예수께서는 ‘강아지’라는 모욕적인 표현으로써 냉정하게 배척하셨다. ‘너의 청을 들어 주는 것은 마치 강아지에게 빵을 던져주는 것’과 같다는 단호한 거절에도 불구하고 여인은 “주님, 강아지도 상에서 떨어지는 빵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라고 재치 있게 응답하면서 그분께 바싹 다가갔다. 드디어 주님은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라 칭찬하며 그녀의 소원을 성취해주셨다. 이 가련한 여인은 온 마음을 다하고 온 몸을 던져 예수님께 다가갔다. 그녀는 묵묵부답, 경멸하는 발언, 모욕적 언사 등으로 세 번씩이나 거부하시는 주님을 향해 온 정성과 온 마음과 온 몸을 다하여 가까이 나아갔다.

신앙은 인간 존재의 온전한 행위이지 결코 한 부분적인 행위가 아니다. 전 인격체를 주님께 내어맡기는 투신이다. 인격체란 지성과 감정과 의지의 조화 속에서 성장하는 인간이다. 신앙이 전 인격의 행위라면, 머리와 몸과 마음의 온전한 행위이다. 인격체의 세 가지 구성요소인 지성과 감정과 의지의 통합 속에서 주님께 다가가는 움직임이다. 이와 관련, 세 가지 전치사(~에 대하여, ~을, ~에게로)를 사용하여 신앙행위의 세 측면을 표현할 수 있겠다. 첫째, 하느님‘에 대해’ 믿는 것은 모든 계시진리를 머리로써 인식하고 이해하고 동의하는 지성의 행위이다. 둘째, 하느님‘을’ 믿는 것은 하느님의 뜻에 온 몸을 내맡기는 의지의 행위이다. 셋째, 하느님‘에게로’ 믿는 것은 하느님을 마음 안에 모셔 들여 느끼는 감정의 행위이다. 요컨대 신앙은 계시진리에 동의하는 인식이고, 신뢰심으로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실천이고, 하느님의 사랑을 온 몸으로 느끼는 체험이다. 신앙의 세 측면들 중 어느 하나라도 무시할 수 없다. 가톨릭 신앙은 인식으로서의 측면을 강조하는데 반해 개신교 신앙은 신뢰로서의 측면을 부각시킨다는 비판이 있다. 두 대조되는 측면을 통합시킬 필요가 있다. [2008년 5월 25일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청소년주일, 생명의 날) 가톨릭마산 8면, 최영철 알폰소 신부]


[사도신경 해설 4] “저는 믿나이다” (3) 신앙과 계시


믿음은 하느님과 생명 관계를 맺기 위하여 그분을 향해 나아가는 움직임이고 온 존재를 하느님의 품에 내던지는 투신이다. 그렇더라도 신앙의 주도권은 인간이 아니라 하느님에게 있다. 신앙은 인간이 하느님께 다가가기 이전에 하느님께서 먼저 인간을 찾아오시는 방문이다. 신앙은 한 쪽의 일방통행이 아니라 쌍방 간의 상호 교류이며 그래서 관계인 것이다. 신앙은 하느님께서 당신에게로 부르고 인간을 끌어당김으로써 이루어진다. “내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요한 6,44)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신앙은 하느님의 초자연적 선물이다.

계시가 신앙을 앞서고 일으키기 때문에 신앙의 주도권이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께 있는 것이다. 신앙은 하느님 계시에 대한 인간의 응답이다. 계시가 있기에 신앙이 생기고 성장하는 것이다. 계시란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당신 자신을 ‘열어(계) 보여주시는(시)’ 행위이다. 당신의 뜻과 진리, 마음과 사랑, 희망과 계획을 드러내시는 사건이다. 그런데 하느님은 그저 알리고 보여주기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열어 보이고 당신 자신을 내어주시기도 한다.

예수님은 ‘목자의 비유’(요한 10,1-18)에서, 목자와 양의 관계를 통해 당신과 우리의 신비스런 생명관계를 설명하신다. 양들이 목자를 알고 따르는 것은 목자가 양들을 부르고 알고 사랑하며 심지어 그들을 위해 목숨까지 내놓기 때문이다. 양들이 목자의 목소리를 알아듣는 것은 목자가 그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밖으로 이끄는 덕분이다. 신앙은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상호 앎이고 따라서 상호교류이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10,14). 상호인식은 생명의 교류에까지 이어진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 놓는다”(10,11). “내가 스스로 내 목숨을 내 놓는 것이다”(10,18). 계시는 하느님께서 부르고 열어 보이는 것에 국한되지 않고 당신의 생명을 건네주시는 전달이기도 하다. 계시가 이러하기 때문에 그 응답인 신앙도 그저 머리로써 인식하고 동의하는 것만이 아니라 아울러 하느님께 온 마음과 온몸을 바치는 것이기도 하다.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부르고 다가서기 때문에 우리가 그분께 응답하며 믿게 되는 것이다. 하느님이 먼저 우리를 신뢰하시므로 우리가 그분께 자신을 내맡기는 것이다. 믿음은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신뢰하고 끌어당기고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내어주시는 결과다. 하느님이 존재하시어 먼저 우리를 신뢰하고 부르시기에 우리가 그분을 믿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인에게는 하느님의 존재에 대한 증명이 필요 없다. 하느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은 하느님의 사랑이 이미 우리 안에 있음을 증거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단순히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주신 것입니다”(1요한 4,10). [2008년 6월 1일 연중 제9주일 가톨릭마산 8면, 최영철 알폰소 신부]


[사도신경 해설 5] “저는 믿나이다” (4) 신앙의 성장


하느님의 사랑, 부름, 인식, 방문으로써 우리의 믿음이 시작되고 성장한다. 신앙은 무엇보다도 우선 은총의 선물이다. 하지만 앞서가시는 하느님의 선택이나 사랑만으로 믿음이 성숙되지는 않는다.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응답도 믿음에 포함되는 중요한 요소이다. 우리가 하느님께 다가가는 움직임이 믿음에 들어있다. 믿음은 듣는 것이기 때문에 순종이다. 믿음은 들음 곧 주의 깊게 귀기울임이다. “믿음은 들음으로써 온다.”

인간은 날 때부터 들음으로써 성장한다. 어린이는 어머니의 말씀을 계속 들어가면서 자라난다. 어머니의 말씀과 사랑에 감싸여 아기의 마음은 세계를 향해 점차 열려진다. 신앙은 듣는 것이기 때문에 이해 이전에 순종인 것이다. 신앙의 선조인 아브라함은 맨먼저 “떠나라”, “가거라”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따랐다. 신앙은 말씀에 대한 복종이다.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신앙은 성장해 나간다. 말씀을 들음으로써 주님을 따르게 된다. 들음과 따름은 신앙의 요소들이다.

네 명의 어부가 호수에 어망을 던지는 것을 예수께서 보시고 “나를 따라 오너라”고 부르셨다(마태 4,18-22). 어부들은 예수님의 부르심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이해하고 나서 그분을 따라나선 것이 아니라 먼저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명령에 따라 나섰다. 부르심을 받는 즉시 그들은 자신의 삶을 떠받히고 있던 그물과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그분을 따랐다. 주님을 따르기 시작한 어부들의 신앙생활은 “따르라”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복종함으로써 시작되었다. 한편 그 어부들은 밤새도록 애썼으나 한 마리 고기도 잡지 못해 몹시 지쳤지만 “깊은 데로 나가서 그물을 내려라”는 말씀에 복종하였다. 그 결과 엄청나게 많은 물고기를 잡아 그들은 주님 앞에 엎드려 “주님, 저에게서 떠나주십시오”(루카 5,8) 하고 고백하였다. 주님의 말씀에 복종함으로써 자신의 죄스러움을 깨달았기 때문에 그들은 주님 앞에 자신을 낮출 수 있었다. 신앙은 자신의 무능을 깨달으면서 주님께 순종하는 것이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함으로써 응답하는 자세는 하느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이다. 성모 마리아는 하느님께 불가능한 것이 없음을 온전히 믿으셨다. 전적으로 하느님의 뜻에 동조하고 따르셨다. 그리하여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고백하셨다. 마리아는 순종과 겸손으로써 주님께 대한 위대한 신뢰를 표명하셨다. 신앙은 믿고 바라고 사랑하는 인간의 응답이므로 이 선물은 우리의 응답에 호소하고 실천을 요구한다. 신앙은 땅에 묻혀 썩어서 싹틔우고 자라는 씨앗처럼 삶 안에서 자라 열매 맺도록 가꾸어야 하는 것이다. 신앙은 기도생활을 통해서 생생하게 보존하지 않으면 말라버린다. 신앙은 시련, 선행, 사랑, 성사 생활 등을 통해 뿌리내리고 성장한다. 희망을 통해서 어둠과 시련 속에서 견고해진다. 신앙은 희망과 사랑이라는 영양분을 먹고 자라는 생명체이다. [2008년 6월 8일 연중 제10주일 가톨릭마산 8면, 최영철 알폰소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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