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신경 해설 21] “예수 그리스도” (삶과 활동 1) - 세례와 유혹받음
공생활은 세례 받고 유혹 겪음으로써 시작되었다. 왜 세례와 유혹으로써 공생활을 개시하셨는가? “지금은 이대로 하시오. 이렇게 해서 마땅히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모든 일이 이루어진다.”(마태 3,15) 세례 주기를 망설인 세례자를 설득하는 예수님의 이 말씀에서 드러나듯 그분은 하느님의 뜻에 따라 세례 받으셨다. “성령의 인도로 광야에 나가시어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셨다.”(마태 4,1) 세례와 유혹은 예수님의 단독 결정이 아니라 성부께서 원하신 바이고 성령께서 이끄신 결과이기도 하다.
세례는 죄인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셨음을 또 유혹은 비천한 인간의 처지와 동화되셨음을 드러낸다. 요한의 세례는 죄인이 잘못을 뉘우치며 회두하려는 원의를 표명하는 예식이었다. “모든 이가 그에게 나아가 죄를 고백하며 그에게 세례를 받았다.”(마태 7,6) “나는 너희를 회개시키려고 물로 세례를 준다.”(3,11) “우리에게는 모든 면에서 우리와 똑같이 유혹을 받으신, 대사제가 계신다.”(히브 4,15)는 말씀대로, 거룩한 예수님은 죄인인 우리와 온전히 동화되고자 스스로 유혹받으셨다. 유혹은 나약하기 때문인 것이다. 연약하기 때문에 악마로부터 유혹을 겪는다. 유혹은 예수께서 죄로 인해 약해진 인간성을 취하셨음을 뜻한다. 그분은 인간의 ‘연약함을 동정할 수 있는 대사제’이시다. 요컨대 죄 많고 나약한 인간과 온전히 하나되기 위하여 세례와 유혹을 받으셨다.
세례 때 하늘이 열리고 성령께서 강림하시고,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하늘을 찢고 내려 오십시오.”(이사 63,19)라는 염원대로 세례는 죄로 인해 닫힌 하늘을 여는 사건이다. 하늘과 땅이 화해하는 길을 열었다. 비둘기 모양으로 내려오신 성령은 한 처음에 창조를 위해 “어둠의 심연 위에 감돌던 하느님의 영”(창세 1,2)이다. 세례는 새 창조를 위한 성령의 내림이다. 아가서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표상하는 비둘기는 성령이 하느님 사랑의 영이심을 가리킨다.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태 3,17)라는 하늘의 소리는 그분이 하느님의 사랑받는 아들이지만 하느님의 종으로 살아갈 것임을 예고하는 것이다. 거룩한 분임에도 불구하고 죄인들 틈에 죄인의 모습으로 또 종으로서 시련 중에 사명을 수행하게 될 아드님에게 하느님은 성령강림을 통해 부성애를 쏟아 부어주신다.
약속의 땅을 향해 가던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유혹에 진 것과는 반대로 예수님은 같은 장소에서 악마의 유혹들을 물리치신다. 빵, 권력, 하느님 시험 등 세 가지 유혹은 그분이 메시아로서 사명을 수행하는 데 결정적 장애들이다. 하느님이 바라시는 방식이 아니고 세상 사람들이 요구하는 방식에 따라 삶을 영위하고 사명을 완수하라는 압력이다. 이 유혹들은 생애 초기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평생 그분을 괴롭힌 것이었다. 측근들 심지어 베드로까지 이용하여 악마가 집요하게 제시한 유혹들이다. 십자가에서 이 유혹은 더 격해진다. “하느님의 아들로 자처했으니 하느님이 구하러 오는가 보자.” “남들은 살렸으면서 너 자신은 살리지 못하는구나!”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시지, 그러면 메시아로 너를 믿고말고.” 유혹들을 예수님은 말씀에 의지하여 과감히 물리치신다. “사람은 빵만으로가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으로 산다.” 세례와 유혹은 나약하고 불결한 인간과의 동일화이다. 멸망할 인간을 구원하려고 그 비참한 처지에까지 내려옴이다. 세례 때 그분은 물 속으로 몸을 낮추셨고, 유혹 중에 전능하신 분께 온전히 신뢰하셨다. 세례와 유혹 때의 겸손과 순종은 생애 중 갈수록 뚜렷해진다. [2008년 9월 28일 연중 제26주일 가톨릭마산 8면, 최영철 알폰소 신부]
[사도신경 해설 22] “예수 그리스도” (삶과 활동 2) - 선교와 ‘하느님 나라’
구원을 위하여 세상에 파견되신 하느님 아드님의 유일한 활동은 선교이다. 선교는 만인을 구원에로 초대하고 부르는 이끎이다. 예수님의 온 생애가 선교이다. 그분은 죄로 인해 하느님에게서 멀어진 이들을 하느님의 집에 귀환하도록 부르고 이끌기 위하여 세상에 파견되셨다. 그분이 세상에 파견되신 유일한 목적이 선교이므로 파견이 곧 선교이다. 둘은 같은 말(mission)이다. ‘사명’이란 말도 똑같은 낱말이다. 선교와 파견, 사명이 다 같은 말이다. 선교 사명을 위하여 파견되었기에 선교는 곧 파견이다. 예수의 구원활동 결과로 이 세상에 생겨난 교회의 유일한 지상 과제가 선교인 것이다. 교회도 예수님과 마찬가지로 선교를 위하여 세상에 파견되었다. 파견이 곧 선교이므로, 예수님의 생애나 교회의 삶 자체가 선교이다.
세례 후 공적 활동을 개시할 즈음에 예수님은 회당에서 메시아 사명에 대한 자의식을 공표하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 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카 4,18) 이 대목에서 두드러진 표현은 ‘파견’과 ‘선포’이다. 선포를 위하여 파견되었다는 예수님의 자의식이 뚜렷이 드러난다. 예수님은 공적 생활 중에 파견되었다는 사실을 늘 의식하셨다. 파견의 주요 활동은 선포이다. 선포와 아울러 활동도 강조하셨다. 파견되신 분의 두 가지 사명은 선포와 활동이다. 세 가지 선포와 두 가지 활동을 지적하신다.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선포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기” 위해 파견되셨다. 그분의 선포는 가난한 이들을 복음의 선포, 묶인 이들을 위한 해방의 선포, 모든 이들을 위한 은총의 해 선포 등이다. 두 가지 활동은 눈먼 이들에게 시력을 되찾아주는 일과 억압 받는 이들을 풀어주는 일이다. 곧, 신앙과 해방 활동이다. 예수님의 선교사명은 기쁜 소식을 전하고 해방을 선포하며 만인을 위한 은총의 해를 선언하고 또 신앙을 갖게 함으로써 해방시켜주는 일이다.
실제로 예수님은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고 선포하면서 선교를 본격 개시하셨다. 선교는 말씀의 선포(설교), 자비의 행위(기적), 공동체 설립(교회) 등으로 펼쳐졌다. 해방에 관한 말씀을 선포하고, 화해하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를 드러내는 기적을 행하고, 사람들을 가까이 부르며 공동체를 형성하셨다. 선포 및 해방활동이 지속되기 위하여 기쁜 소식을 듣고 받아들인 이들을 공동체 안으로 이끄시고 그 안에 그들을 선교에 훈련시키셨다.
설교의 주제는 ‘하느님의 나라’다. 그것은 하느님이 이 땅 위에 차지하고 지배하시는 영토나 국가가 아니다. 하느님이 온 세상 안에서 사랑과 자비로써 다스리시는 통치이다. 하느님(하늘) 나라는 하느님의 정치이다. 하느님이 성자를 통하여 온 세상을 몸소 다스리실 때에 구원과 ‘샬롬(평화)’의 나라가 실현된다는 내용이다. 성자의 선교활동과 더불어 구원을 위하여 정해진 결정적 때가 도래하였다. 하느님께서 세상 구원을 위한 적절하고도 충만한 때를 스스로 결정하셨으니 곧 성자의 파견으로써 ‘마지막 때’가 도래한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 모든 이가 잘못을 뉘우치며, 하느님께 돌아가는 신앙의 결단을 내려야 한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2008년 10월 5일 연중 제27주일(군인주일) 가톨릭마산 8면, 최영철 알폰소 신부]
[사도신경 해설 23] “예수 그리스도” (삶과 활동 3) - 선교와 자비의 행적
예수님의 선교는 선포와 행적 등 두 가지로 되어 있다.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면서 그 말씀의 능력을 행적으로써 드러내 보이셨다. 선언과 비유 및 가르침으로써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고, 사귐과 기적으로 하느님의 자비를 보여주셨다.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을 계시하는 주제이기도 하다. 인간과 화해하고 일치함으로써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자비를 드러내는 계시이다. 예수님의 선교활동이 구원 및 계시의 행위이다. 하느님의 나라는 곧 하느님의 자비 그리고 그 자비가 이루는 구원을 나타내고 실현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비와 평화의 하느님 나라를 보여주고 땅위에 세우기 위하여 자비를 말씀과 행적을 펼치셨다. 세리인 마태오를 제자로 부르실 때 이를 심히 못마땅히 여긴 이들에게 예수님은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태 9,15)고 단언하셨다. 모든 이가 죄인이므로 하느님의 자비를 입어야함을 보여주기 위하여 그분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사귀고 먹고 마시셨다. 예수님은 ‘영혼의 의사’로서 사명을 천명하면서 “병든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다.”고 강조하셨다. 모든 이가 영혼의 병을 앓는 죄인임을 보여주시고 또 그 병을 치유하려면 하느님의 자비가 절대 필요함을 역설하셨다. 죄인들과 자유로이 교제함으로써 예수님은 하느님의 자비에 힘입어 치유되고 구원을 누리게 됨을 보여주셨다. 그분의 활동과 삶은 죄인과의 사귐으로 특정지워진다.
인간의 감각을 초월하므로 보이지 않는 ‘하느님 나라’를 생생하게 또 구체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예수님은 ‘비유’라는 독특한 언어를 구사하셨다. 비유는 불가시적인 것과 가시적인 것을 대비시킴으로써 보이는 현세 사물을 통해 보이지 않는 구원의 실재를 드러내는 표현법이다. 비유를 통해 그분은 ‘하느님의 나라’가 평범하고 일상적인 실재들과 가까이 또는 그것들 안에 감추어져 있음을 가르치신다(누룩, 씨앗의 비유). 전능하고 자비로우신 하느님이 숨어 계시듯 눈에 보이지 않게 우리의 일상생활 한가운데 가까이 계심을 강조하면서 특히 하느님의 자비를 부각시킨다(되찾은 양, 은전, 아들의 비유). 비유들은 초월적이어서 알아듣기 힘든 하느님의 다스림 및 사랑과 자비를 생생하게 또 쉽게 파악할 수 있도록 해준다.
기적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다스림과 사랑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기 위해 예수님이 행하신 ‘자비의 행적’들이다. 그것은 불가시적 하느님 나라를 보여주려는 가시적 표징이다. 악령 추방, 질병의 치유, 자연 기적 등 세 가지로 분류되는 기적은 단순히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하는 기묘하고 신기한 일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초월적이며 영적 실재인 하느님 나라를 감각을 통해 보고 믿음으로써 확인할 수 있도록 가리키고 드러내는 표징이다. ‘하느님 나라’로 표현되는 구원의 세상과 인간, 영혼과 육체, 자연을 통합적으로 치유하고 해방시키는 가치임을 나타내 보인다. 악령추방 기적은 구원이 인간을 온갖 죄와 악의 세력에서 해방시키는 것이고, 질병치유 기적은 육체적 속박에서 자유롭게 해주는 것이며, 자연기적은 이스라엘의 이집트 탈출에서 드러나듯 구원을 위해 자연의 세력을 통제하고 활동하시는 하느님의 권능을 보여준다. 기적들은 하느님 나라의 표징이고 하느님 자비의 표징이며, 인간을 옭아매는 온갖 속박에서 자유롭게 하는 해방의 행위이다. [2008년 10월 12일 연중 제28주일 가톨릭마산 8면, 최영철 알폰소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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