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신경 해설 26]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고” (1) 삶과 죽음
예수님은 동족인 유다인들로부터는 ‘신성 모독자’로, 지배자이고 이교도인 로마인들로부터는 ‘민중 선동가’로 단죄 받아 이중 범법자로 십자가에 처형되셨다. 로마제국이 식민지의 범법자들을 처형하기 위해 이용한 십자가형은 죄수들에게 극도의 수치와 고통을 안겨주면서 천천히 죽게 만드는 사형도구이다. “그분께서는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요한 1,11)는 말씀대로 예수님은 그토록 사랑했던 성도 예루살렘 성 밖에서 처형됨으로써 당시 정치와 종교, 사회로부터 온전히 배척당한 국외자로 생애를 마치셨다. 가혹한 고통 속에서 서서히 죽어가는 육체의 고통, 모든 계층의 사람들로부터 철저히 거부당한 정신의 고통, 하느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영혼의 고통 등 삼중고 속에서 연약한 인간의 모습과 죄인의 모습으로 숨을 거두셨다. 유다 당국자는 그분이 그렇게 죽어야만 거짓 예언자로 판명된다고 여겼던 것이다.
십자가 죽음은 무고하게 거짓과 불의에 희생당한 결과로 소송과 재판을 거친 결과이다. 소송은 충돌과 대결의 결과인데, 그분의 처신이 대립을 불러 일으켰다. 그분은 독특한 하느님 체험을 바탕으로 그 당시의 종교를 비판했고, 인간에 대한 애정으로 사회를 비판했고, 진리와 정의에 향한 신념으로 정치를 비판했다. 정치, 종교, 사회에 대한 그분의 예리한 비판은 어느 것에도 얽매이지 아니한 자유로운 삶의 방식과 진리에 대한 깊은 통찰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런 비판이 당국과의 충돌을 야기시켰다. 그렇다면 그분의 십자가 죽음의 근본 원인은 그분의 삶에 있다 하겠다. 삶의 방식과 사명수행 때문에 십자자형에 처형되셨다.
삶과 죽음은 따로 분리되어 있지 않다. 인생은 끝이 있는 유한한 생명이다. 날 때부터 죽음을 향해 나아간다. 인간의 생명 자체 안에는 이미 죽음의 씨앗이 들어있다. 생명과 죽음은 함께 자란다. 죽음은 삶의 축소판이고 요약이자 계시이다. 죽음으로 인해 삶의 참 면모가 드러난다. 무능하고 죄 많은 인간처럼 죽음을 겪은 예수님은 일생 동안 종의 모습 및 죄인의 모습으로 살아오셨다. 겸손과 순종이라는 삶의 모습과 방식이 그분을 십자가형으로 몰아갔다.
그분이 죽은 라자로를 살리러 나서는 것은 죽을 위험을 각오한 행보이다. “우리도 스승님과 함께 죽으러 갑시다.”라고 토마스가 동료들에게 말했다(요한 11,16). 남을 살리는 자비의 행적도 죽음을 앞당기는 계기가 되었다. 그 소생 기적 후 최고의회가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했다. 죄인을 용서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자비의 복음이 종교체제를 뒤흔들었다. 사회인습이나 정치적 야망이나 이기심으로부터 온전히 벗어난 자유로운 처신이 사회체제를 뿌리 채 흔들었다. 권위 있게 가르치고 자유롭게 처신하신 그분의 생활방식에 사람들이 탄복하였으나 그분은 정치적 해방과 물질적 번영과 육체적 안락함을 요구하는 군중들의 요구에 굴복하지 않으셨다. 현세적 메시아가 되어달라고 조르는 군중들의 요구에 응하지 않으셨으므로 그들로부터 배척당하셨다. 주인이면서도 종처럼 자신을 낮추는 겸손과 하느님의 외아들이면서도 하느님의 머슴처럼 절대 복종하신 순종이 오만과 독선에 익숙한 지도급 인사들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이리하여 예수님은 권위와 자유로 특징지어지는 사명수행 및 생활방식 때문에 잘 짜여진 사회의 질서를 교란시켜 혹독한 죽음을 향해 스스로 걸어간 셈이 되었다. 그분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은 일차적으로 그분 스스로 처음부터 취하신 행동과 생활태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십자가 죽음은 하느님과 온전히 사랑한 열정의 결과이다. [2008년 11월 2일 연중 제31주일(위령의 날) 가톨릭마산 8면, 최영철 알폰소 신부]
[사도신경 해설 27]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고” (2) 죽음 준비
“당신 집에 대한 열정이 저를 집어 삼킬 것입니다.”(요한 2,7) 장사하는 집으로 변질된 ‘아버지 집’을 깨끗이 하려는 예수님의 정화작업을 지켜본 제자들의 머릿속에 떠올린 성경말씀이다. 열두 살 예수님은 부모에게 당신 아버지의 집에 대한 애정을 밝히신 적이 있다.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합니다.”(루카 2,7) 그분은 어릴 적부터 죽을 때까지 아버지의 집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 찼다. 즉 아버지에 대한 뜨거운 사랑으로 넘쳤다. 이 사랑의 열정이 더러워진 성전을 깨끗이 하려는 정화 노력으로 나타낫고 또 이 사건은 처단의 음모를 앞당기게 해주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죄인들을 부르고 사람들을 섬기려는 열정으로 자신을 불사르셨다. “사람의 아들은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르 10,45) 아버지의 집을 아끼는 열정 그리고 목숨을 바칠 만큼 인간을 섬기는 열정이 결국 예수님의 생명을 불살랐다. ‘열정’과 ‘고난’을 뜻하는 말이 같은 단어(passion)이다. 하느님과 인간을 향한 ‘뜨거운 애정’은 생명을 불사르고 또 그로 인해 고난이 수반된다. 예수님의 열정이 죽음의 때를 앞당겼다. ‘능력이 뛰어난 사람은 단명한다’는 말은 참되다. 삶과 사명에 대한 열정 때문에 그분은 단명하셨다. 하느님과 사람을 죽기까지 섬기고 사랑하셨으므로 일찍부터 죽음의 위험에 직면하셨다. 다가올 죽음의 그림자를 감지하시면서 예루살렘을 향해 나아가시고 또 수난과 죽음을 측근들에게 예고하셨다.
‘거룩한 변모’ 사건과 더불어 수난의 길이 본격 시작되었다. 높은 산위 제자들이 지켜보는 데서 새하얀 모습으로 나타나신 변모사건은 “영광 속에 들어가기”(루카 24,26) 위하여 고난의 길을 걷기 시작했음을 드러낸 일이다. 그 후로 그분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중도에서 수난과 죽음 및 부활을 예고하셨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우리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다. 이제 사람의 아들에 관한 예언이 모두 이루어질 것이다. 사람의 아들은 다른 민족 사람들에게 넘겨질 터인데 그들은 그를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다. 그러나 그는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루카 18,31-33).
거룩한 변모, 예루살렘행, 수난예고, 입성 후의 성전정화 사건들은 예수님이 목전에 온 죽음의 위험에 적극 대처하는 행위들이다. 삶과 사명에 대한 죽기까지의 열정으로 인해 고난과 죽음의 상황에 처하자 그분은 회피하거나 피동적 자세를 취하지 않고 적극적이며 능동적 태세를 취하셨다. 말씀을 선포하는 사명에 끝까지 충실하며 목숨을 빼앗긴 예언자들, 하느님께 대한 신의 때문에 박해와 고난을 겪고 끝내 목숨을 버린 하느님의 의인들, 그리고 회개와 정의를 부르짖다 순교당한 세례자 요한의 운명과 희생을 숙고하신 끝에 예수님은 죽음의 원인과 뜻을 온전히 파악하셨다. 또한 죽을 각오로 사명을 수행해 온 결과로 회피할 수 없게 된 고난과 죽음을 수락하기로 마음을 굳히셨다.
예루살렘 입성 후 예수님은 성전을 정화하심으로써 하느님에 대한 사랑의 열정으로 죽음을 받아들이려는 의지를 드러내시고 적대자들에게 소송, 재판, 처단의 구실을 스스로 제공하셨다.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 중에 임박한 죽음에 대한 그분의 이해를 드러낸다. 그분이 선언하신 말씀 곧, “받아먹어라”, “받아 마셔라”라는 식사와 관련된 발언들, 그리고 “너희를 위하여 내어줄 몸”, “너희를 위하여 흘릴 피”라는 희생제사 및 계약과 관련된 발언들은 죽음을 받아들일 완전한 준비태세와 죽음에 대한 이해를 보여준다. [2008년 11월 9일 연중 제32주일 가톨릭마산 8면, 최영철 알폰소 신부]
[사도신경 해설 28]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고” (3) 죽음 이해
예수께서 말년에 예루살렘에 가신 일, 가는 도중에 수난과 죽음을 예고하신 일, 입성 후 성전을 정화하신 일, 그리고 제자들과 함께 최후의 만찬을 거행하신 일 등은 그분이 다가온 죽음을 향해 도전적이며 적극적 자세로 나아가셨음을 드러낸다. “일어나 가자. 보라, 나를 팔아넘길 자가 가까이 왔다.”(마르 14,42) 겟세마니 기도 후 체포당하기 직전에 하신 이 말씀은 죽음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시는 그분의 결연한 모습을 반영한 것이다. 특히 성전정화 사건은 그분의 죽음을 은밀히 계획하고 있던 적대자들의 음모에 정면 대항한 도발적 행위였다.
이렇게 죽음의 세력에 저항하는 적극적 자세를 취하고 또 죽음을 맞이할 준비를 갖추신 모습은 죽음의 의미를 온전히 파악하셨음을 나타낸다. 왜 죽어야 하는지 그 원인을, 그리고 겪어야 할 죽음의 의미가 있으며 또 그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았기 때문에 예수님은 죽음을 향해 적극적 자세를 취하셨으며, 죽음을 준비하는 만반의 태세를 갖추셨다.
멀리로는 예언자들의 순교와 의인들의 희생, 가까이로는 세례자 요한의 참수형 따위가 예수님이 당신 죽음의 의미를 통찰하는 데에 관건이 되었다. 이사야 예언자가 네 차레(42,1-9; 49,1-6; 50,4-11; 52,13; 53,12)에 걸쳐 노래한 ‘하느님의 종’은 죽음 이해의 가장 좋은 자료가 되었다. 하느님의 종은 무고하고 의로운 존재로 하느님에게 특별히 선택되었다. 그는 무죄함에도 불구하고 사람들과의 깊은 유대관계로 인해 그들을 대신하여 고통을 겪는다. 지독한 고통 중에도 그는 불평하지 않고 오히려 하느님께 충성을 다한다. 하느님께 대한 순종으로 또 고통 한 가운데서 자기 목숨을 기꺼이 바친다. 이 희생과 봉헌을 통해 하느님은 당신 뜻을 이루시고 영광을 받으신다. 그 결과 이 종은 하느님에 의해 현양된다. 종의 이 운명은 예수님이 당신의 고난과 죽음을 이해하는 데에 결정적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최후의 만찬도 예수님이 곧 겪게 될 죽음의 뜻을 어떻게 이해하셨는지를 잘 드러낸다. 그분은 살아온 삶을 정리, 요약하면서 다가온 죽음에 대비하는 의도로 만찬을 거행하셨다.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거행한 예식이었다. 이 예식 안에 생명과 죽음이 한데 어우러져 있다. 더욱이 예수님은 만찬 중에 식사와 제사에 관한 말씀을 명백히 하셨다. “받아먹어라.”, “ 받아 마셔라.”라는 두 가지 말씀은 식사와 관련된 발언이고, 또 “내어줄 몸”, “흘릴 피”의 두 가지 선언은 희생제사에 관한 발언이다. 생명을 기르는 예식인 식사는 생명을 희생시켜 바치는 죽음의 예식인 제사와 깊이 결부된다. 원래 생명과 죽음은 따로 분리된 두 실재가 아니라 하나로 묶여 있는 한 실재의 두 가지 측면이기 때문이다. 생사가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듯이 그 예식들인 식사와 제사는 분리될 수 없다. 식사는 다른 생명체의 희생(제사)이 있어야만 가능한 것이고, 또 제사는 식사를 통해서만 남을 살리는 효과를 전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제사 뒤에는 의례히 식사가 따르는데 식사는 제사의 결실(축복)을 ‘먹는 것’ 곧, ‘음복’이다.
예수님은 만찬을 통해 무고한 죽음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남을 살리는 희생 죽음임을 드러내고자 하셨다. 십자가에서 ‘내어줄 몸’과 ‘흘릴 피’는 인간을 기르고 살리는 식사가 될 것임을 암시하셨다. 당신의 죽음이 남을 살릴 수 있는 이타적 희생 죽음이기를 기대하셨다. 그래서 예수님은 잔을 들어 명확히 선언하셨다. “이 잔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내 피로 맺는 새 계약이다.”(루카 22,20) ‘새 계약’은 하느님이 먼저 당신 목숨을 내놓고 또 인간이 그 생명을 받아먹음으로써 둘 사이에 생명관계가 맺어지게 해준다. [2008년 11월 16일 연중 제33주일(평신도주일) 가톨릭마산 8면, 최영철 알폰소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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