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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사도신경 해설: 사흗날에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시고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2-10-18 조회수3,302 추천수0
[사도신경 해설 31] “사흗날에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시고” (1) 부활의 중요성


예수 부활은 구원 역사의 중심이고 그리스도교의 뿌리이다. 복음 선포, 믿음, 구원의 바탕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부활하지 않았다면 그 모든 것이 허사다.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복음 선포도 헛되고 여러분의 믿음도 헛되다. 또 여러분 자신은 지은 죄 안에 있을 것이다.”(1코린 15,14-17) 십자가에서 모든 것이 종결되고 부활이 발생하지 않았다면 그리스도교는 순교의 종교일 수는 있어도 희망과 생명의 종교는 되지 못했을 것이다. 예수께서 부활하셨으므로 성령이 강림하시고, 그리스도 신앙이 생겨나고, 교회가 태어나고, 복음을 선포하였다. “우리가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인간 가운데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이다”(15,18-19).

예수님은 안식일 전날(금요일) 오후 3시경에 숨을 거두고 당일 일몰 직전에 묻히고 안식일 다음날(주일), 그러니까 죽은 지 사흘 만에 부활하셨다. ‘사흘 만에’는 시간 간격을 가리키는 것만이 아니라 신학적 의미도 담고 있는 표현이다. 하느님께서 의인을 어려운 처지에서 사흘 만에 구해내신다는 대목이 성경에 가끔 나온다. 구원을 위한 하느님의 직접 개입은 ‘이른 시일’ 내에 이루어진다는 믿음의 표현이다. ‘짧지만 충분한 시간’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하느님이 역경 중에 있는 의인을 오랫동안 방치해 두시지 않는다는 뜻이다.

부활사건을 목격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무덤의 경비병들도 부활에 잇따르는 부수적 현상(지진, 빈 무덤)만을 겪었을 뿐 부활의 현장에 있지 않았다. 부활한 분이 제자들에게 발현하셔서 이들이 살아있는 그분을 목격하고 만났기에 부활을 믿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이 보고, 듣고, 믿는 바를 사람들에게 선포하기 시작하였다. 부활과 그에 잇따른 일들의 순서는 이와 같다. 부활 사건 → 빈 무덤 → 부활발현 → 부활신앙 → 복음 선포 등의 순서다. 그분이 제자들의 마음이나 신앙 안에서 다시 살아나신 것이 아니다. 그들의 신앙은 부활하신 주님을 보고 만났기 때문에 생겨난 결과이다. 천사들의 부활선언 덕분에 부활한 것도 아니다. 실제 죽은 이들 가운데서 일으켜졌으므로 그 사실을 천사들이 전한 것이다.

부활은 실제 발생한 사건이다. 역사 안에서 제자들이 부활하신 분을 보고 만났으며 역사의 흐름을 뒤바꿔 놓았다는 점에서 ‘역사적 사건’이라 할 수 있지만 부활사건 그 자체는 역사를 넘어선 사건이다. 죽음에서 일으켜져서 현세로 돌아온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원한 세계 안으로 들어간 사건이므로 죽은 이가 현세로 되돌아오는 소생과 차원이 전혀 다르다. 초월적 사건이므로 그 현장에서 목격한 사람도 없고 또 그에 대한 묘사나 서술이 불가능하다.

부활한 분이 “네 손가락을 여기 대보고 내 손을 넣어 보아라.”, “나를 만져 보아라. 유령은 살과 뼈가 없지만, 보다시피 살과 뼈가 있다.”(루카 24,39)라고 말하는 것이나, 제자들과 함께 식탁에 앉아 빵을 떼는 장면 등은 소생이 아니라 ‘육신 부활’을 드러내는 것이다. 육신을 포함한 온 존재가 죽음에서 다시 일으켜져서 온 인격체가 하느님의 세계 안에 들어갔음을 나타낸다. 육신부활은 부활로 인하여 죽기 전의 삶 전부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변화된 방식으로 현세와 여전히 교류함을 드러낸다.

부활은 인간이 고안해낸 조작이 아니다. “어찌하여 살아계신 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서 찾고 있느냐? 그분께서는 여기에 계시지 않다. 되살아나셨다.”(루카 24,5) 이같이 최초로 부활을 선포하고 소식을 전한 이는 인간이 아니라 천사이다. 이는 부활이 초월적 사건이고 따라서 지상에서 전해진 소식이 아니라 천상에서부터 선포되는 복음임을 가리킨다. [2008년 12월 7일 대림 제2주일 가톨릭마산 8면, 최영철 알폰소 신부]


[사도신경 해설 32] “사흗날에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시고” (2) 빈 무덤과 발현 이야기


복음서는 부활 선포 이외에 빈 무덤과 발현에 관한 이야기를 전해준다. 부활은 하느님의 절대주권에 의해 발생된 초월적 사건이므로 감각에 의해 확인되지 않는다. 제자들에 의해 확인될 수 있던 것들은 빈무덤과 부활한 분의 발현이다.

빈 무덤은 실제로 확인될 수 있는 사실이다. 여인들과 제자들이 무덤을 찾아갔으나 열리고 비어 있음을 발견하였다. 빈 무덤 자체는 부활의 증명이 될 수 없다. 빈 무덤을 보고 제자들이 예수 부활에 관한 생전의 말씀을 기억해 내고 부활을 깨달아 인정한 것이 아니다. 신앙은 객관적 사실을 감각으로 확인하는 데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빈 무덤은 제자들을 당황케 했고 두려워하고 불안하게 했을 뿐이다. 공포심이나 불안감만을 조장한 빈 무덤은 시신의 도난이나 이동을 추측하게 만들었다. 막달라 여자 마리아는 천사와 제자들에게 두 번이나 “누가 저의 주님을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요한 20,2.13) 하고 말했다. 빈 무덤은 부활에 대한 확증이 아니라 그 표징이다. 그 자체는 중립적이며 모호한 현상으로 드러나지 아니한 부활의 의미를 가리키는 표징이다. 교회는 빈 무덤을 ‘육신 부활’의 표징으로 해석하였다. “너희가 예수님을 찾고 있지만 그분께서는 되살아 나셨다. 그래서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마르 16,6) 육신을 포함한 그분의 온 인격체가 되살아났으므로 시신을 안장한 무덤이 비었던 것이라 해석한다.

부활한 분은 무덤 근처, 집 안, 길 위, 산 위 호숫가 등 여러 곳에서 나타났고 또 모든 이들에게가 아니라 뽑힌 이들에게만 살아있는 자로 나타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성경 말씀대로 사흗날에 되살아나시어 게파에게 또 열두 사도에게 나타나셨다. 그 다음에는 한 번에 오백 명이 넘는 형제들에게 나타나셨고 또 야고보에게, 이어 다른 모든 사도에게 나타나셨다. 맨 마지막으로 나에게도 나타나셨다.”(1코린 15,4-8) 발현의 주도권은 목격자에게가 아니라 나타나는 분에게 있다. 주님은 목격자가 전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갑자기 발현하신다. 주님을 제자가 알아보는 순간에 그분은 사라지신다.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그들에게서 사라지셨다.”(루카 24,31)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존재하시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주도권으로 잠시 모습을 보이시는 것이다. 제자가 알아보지만 생전의 예수님을 뵙는 것과는 다른 양식으로 ‘보는 것’이다.

제자들은 알아보지 못하고 당황해 하고 의심한다. 발현을 목격하는 당시 제자들의 마음은 발현 이야기에는 일정한 틀이 있다. 주님께서 갑자기 나타나서 평화의 인사를 건네지만 여전히 불안, 걱정,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다. 주님은 목소리, 몸짓, 동행, 식사, 성찬행위와 같은 표징을 통해 당신이 되살아난 예전의 예수임을 드러낸다. 표징을 통해 주님을 알아보는 순간 제자는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하고 신앙을 고백한다.

주님을 보고 만난 제자는 떠나온 곳으로 되돌아간다. 십자가 사건에 충격 받고 절망에 빠져 각자 제 갈 길로 흩어져 갔던 제자들이 주님을 뵙고 나서 되돌아간다. 절망에서 벗어나 희망의 귀환 길로 방향 전환한다. 그들이 재집결함으로써 공동체가 복구된다. 용서, 기쁨과 평화를 체험한다. 부활 체험의 순간에 명령을 듣는다. “예수님께서는 전에 말씀하신 대로 여러분 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가실 터이니 여러분은 그분을 거기에서 뵙게 될 것이다.”(마르 16,7) ‘갈릴래아로 가라.’는 말씀은 선교명령이다. 소외 계층의 삶터이며 일터이고 쉼터인 그곳에서 예수님은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선포하셨다. 명령은 예수님이 늘 그곳에서 하신 것처럼 우선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말이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루카 24,48) [2008년 12월 14일 대림 제3주일 가톨릭마산 8면, 최영철 알폰소 신부]


[사도신경 해설 33] “사흗날에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시고” (3) 부활의 의미 (1)


십자가 죽음으로 끝났다면 예수님은 순교자에 불과하였을 것이다. 십자가에 처형된 그분이 다시 살아났으므로 십자가는 구원사건이 되었다. 부활은 십자가 사건의 숨겨진 의미를 밝혀 드러내고 그 사건을 완성하였다. 그것은 수난과 죽음 속에 감추인 의미를 하느님께서 해명하신 사건이다. 십자가의 숨겨진 의미가 부활을 통하여 증명되었다. 부활 덕분에 예수의 죽음이 한 인간의 우연적 사건이나 순교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과 계획에 따라(“성경 말씀대로”) 일어난 하느님 자신의 사건이요 구원사건이 되었다. 부활은 하느님, 그리스도, 인간과 관련하여 일어난 사건이므로 세 가지 의미를 지닌다.(※ 셋째 의미는 다음회 - 34회에 게재됨)

첫째, 부활은 하느님의 최종 계시이다. 부활로써 하느님의 계시가 완성되었다. 부활은 “성경 말씀대로” 일어난 하느님의 행위이다. 하느님께서 계획하고 의도하신대로 발생한 사건이다.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다”가 사도설교의 첫 선언이다. ‘부활’은 ‘다시 일으키다’, ‘다시 일깨우다’라는 타동사에서 나온 단어다. 이 동사의 주체는 하느님 아버지다. “내가 아버지를 사랑한다는 것과 아버지께서 명령하신 대로 내가 한다는 것을 세상이 알아야 한다. 일어나 가자.”(요한 14,31) 하며 예수님은 십자가를 향해 나아가셨다. 십자가 사건은 예수님이 죽기까지의 순종으로 아버지께 대한 사랑을 보여준 사건이다. 아버지께 대한 지고한 효도와 순종 때문에 그분은 십자가상에서 수난하고 죽으셨다. 이 사랑에 대한 아버지의 보답이 곧 부활이다. 하느님은 아들을 살리심으로써 십자가에서 드러난 아들의 완전한 사랑에 응답하셨다. 그리하여 하느님은 당신에 관한 아들의 계시진리를 최종 확증해 주셨다. 부활로 인해 하느님은 정의, 사랑, 생명, 희망의 하느님으로 그리고 아들을 지극히 사랑하는 아버지로서 계시되셨다. 무고하게 수난하고 처형당한 의인의 고통에 응답하셨고, 죽음을 쳐 이기고 생명을 주는 산 이들의 하느님으로 최종 밝혀지셨으며, 어떠한 절망적 처지에서도 빠져나갈 길을 마련해 주는 희망의 하느님으로 판명되셨다.

둘째, 부활은 그리스도의 ‘현양’이다. 십자가 사건은 예수님을 이름 없는 ‘무명인’, ‘인생의 실패자 또는 낙오자’, ‘하느님으로부터 저주받은 죄인’이 되게 했을 것이다. 부활은 그분을 ‘유명인’ 곧, ‘그리스도’, ‘주님’, ‘승리자’, ‘의인’이 되게 하였다. 예수님은 삶과 죽음 안에서 끝까지 자신을 낮춘 종으로 처신하셨다. 십자가는 죽기까지 자신을 낮춘 겸손의 행위이다. 이토록 십자가에 죽기까지 자신을 낮춘 아드님을 하느님께서 부활로써 들어 높이신 것이다. “그분께서는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드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분에게 주셨다.”(필립 2,8-9) 부활은 아드님의 자기 낮춤에 대한 아버지의 들어 높임이다. 겸손에 대한 보답이다. 예수님은 현양을 언급하셨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요한 3,14) “나는 땅에서 들어 올려지면 모든 사람을 나에게 이끌어 들일 것이다.”(요한 12,32) 들어 높임이 사람들을 치유하고 일치시키는 구원사건이 되리라는 말씀이다.

하느님이 낮은 데로 내려가신 예수님을 되살려 들어 올림으로써 그분의 삶, 말씀과 행적 및 수난과 죽음이 전적으로 옳았음을 확증해 주셨다. 그 결과 세상에 파견된 참 메시아 그리스도, 주님이심이 밝혀졌다. 하느님과 예수님이 부활로 인해 결정적으로 계시되셨다. 부활은 성부와 성자가 세상 안에서 인간을 위하여 서로 완전한 사랑을 주고받으신 결과로 발생한 사건이다. 성부와 성자 상호사랑이 구원의 결실을 맺었기 때문에 성령이 강림할 수 있게 되었다. 부활은 삼위일체의 공동업적이며, 삼위일체에 대한 결정적 계시이다. [2008년 12월 21일 대림 제4주일 · 12월 25일 예수 성탄 대축일 가톨릭마산 8면, 최영철 알폰소 신부]


[사도신경 해설 34] “사흗날에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시고” (4) 부활의 의미 (2)


부활이 없었다면 십자가는 미완성 사건으로 남았을 것이다. 부활로 인해 십자가가 완성되었다. 셋째, 부활은 십자가 사건의 완성이다. 그런데 부활은 십자가의 자연스런 결과가 아니다. 십자가의 예수님이 스스로 죽음에서 일어난 사건이 아니다. 부활과 십자가는 긴밀히 연결된 사건들이기는 하나 엄연히 구분된다. 십자가가 구원을 위한 하느님 아들의 죽음이라면, 부활은 새 삶이다. 십자가가 예수님이 인간을 대신하여 겪은 하느님의 심판이라면, 부활은 하느님이 그분을 의인으로 확증하신 사건이다. 십자가가 그 외형상 분노의 사건이라면 부활은 은총의 사건이다. 십자가가 하느님의 자기낮춤이고 수난이라면, 부활은 하느님의 현양이고 영광의 사건이다.

십자가와 부활은 서로 구분되지만 몇 가지 의미에서 내적으로 긴밀히 일치되어 있다. 이 두 사건 안에서 하느님은 당신을 결정적으로 계시하고 인간과 스스로 화해하시며, 새 세상에 대한 주권을 실현하신다. 하느님의 구원계획 안에서 둘은 뗄 수 없이 묶여 있다. 그래서 본래 있던 낱말이 ‘파스카(유월, 과월)’이다. ‘건너감’, ‘그르고 지나감’을 뜻하는데 죽음에서 생명에로, 멸망에서 구원에로, 속박에서 자유에로 넘어감 또는 옮아감이다. 십자가와 부활로 말미암아 인간과 세상은 구원을 받아 죽음과 멸망을 넘어서 예속과 어둠에서, 자유와 광명으로 옮아왔다. ‘파스카’ 용어는 구분되는 두 사건이 하나의 사건임을 가리킨다. ‘파스카’는 ‘제거’를 뜻하지 않는다. 십자가와 부활로 말미암아 구원이 성취되었으나 죽음과 죄와 고통이 제거된 것이 아니다. 그 제거는 구원이 최종 완성되는 종말에 가서야 실현될 것이다. 파스카는 승리 또는 극복을 의미한다. 죄와 죽음을 극복한 구원사건이다. 파스카 이후에도 죽음과 죄의 세력은 여전하다. 그러나 그것들은 제거된 것이 아니라 패배 당했고 극복되었다. 죄는 사랑과 용서로써, 죽음은 희망으로써 극복되었다. “승리가 죽음을 삼켜버렸다. 죽음아, 너의 승리와 독침이 어디 있느냐?”(1코린 15,55)

십자가와 더불어 부활로 인해 구원이 결정적으로 성취되었다. “다 이루어졌다.”(요한 19,30)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이 외치신대로 완성되었다.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죽기까지 사랑’이 완성되었다. ‘끝까지’ 사랑을 보여주기 위하여 예수님은 수난의 길을 가셨는데, 그 길이 부활로써 완결되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아버지께로 건너가실 때가 된 것을 아셨다. 그분께서는 이 세상에서 사랑하신 당신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요한 13,1)

예수의 생애 자체 특히 십자가와 부활은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지고한 사랑을 보여주고 그 사랑을 세상 한가운데 구현하기 위한 사건들이다. 구원의 본질은 하느님의 끝 모르는 사랑이다. 고통 자체는 구원이 아니다. 십자가 그 자체만으로 구원은 완성된 것이 아니다. 십자가에서 멈추는 신앙, 부활에까지 나아가지 못하는 신앙은 온전한 그리스도교 신앙이 아니다.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하느님 아버지와 아드님이 성령 안에서 역사 한가운데서 나누신 완전한 사랑이 구원의 근원이 된다. 인간과 역사는 부활에 의해 ‘새 하늘과 새 땅’을 맞이하게 되었고 또 삼위일체 사랑이 그 궁극적 의미가 되었다. 부활로써 최종 구현된 하느님의 사랑이 인간을 죄와 죽음, 율법에서 해방시켜 자유인이 되게 한다.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은 역사 안에서 발생하였으므로 시간과 공간의 제약 속에 갇혀 있다. 부활은 역사적 인물인 예수님이 살고 수난하고 죽으시고 다시 일으켜지신 초월적 사건이기에, 이 초월성으로 인해 그분의 삶과 죽음 안에서 일어난 하느님의 구원이 시간과 공간의 한계를 벗어나 영원한 효력을 발생하게 되었다. ‘단 한번’의 십자가 사건이 부활로 인해 ‘온 세대 모든 이를 위한’ 보편 사건이 되었다. 부활은 유일한 십자가 사건을 영원히 효력을 내는 ‘보편적 사건’이 되게 하였다. [2009년 1월 11일 주님 세례 축일 가톨릭마산 8면, 최영철 알폰소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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